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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7월31일 일요일 8 (제187호) 종합 밀양박씨 영광공종중(회장 형원)은 2 021년(辛丑)발간된 ‘밀양박씨비천공파 표준보’를 지난 10일 본보에 기증했다. 기증한 표준보는 색인록을 포함하여 전 체 7 권 으 로 1 권 부 터 4 권 까 지 는 충 헌 공 파 최초의 족보인 1701년 발행한 신사보 (辛巳譜)부터 1902년 임인보(壬寅譜) 까지 선계를 영인하여 더하고 5권~7권 은 이후 자손록을 수록하였고, 8권에는 별 권 으 로 양 주 세 가 연 계 록 을 더 해 집 안 의 계통(혈손)을 명확히 하면서 향후 잡 음을 일소(一掃)해 중요한 사료로 인정 받고있다. 박형원 회장은 이번 표준보 발행은 종 중으로 보면 중요한 작업이었다고 말하 고 족보연구와 신문발행에 도움이 되었 으면 하여 기증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박 회장은 2019년 국립중앙도서관에 초 정 박수현 유고집 5책 등을 포함하여 17 01년 발행한 신사보 등 족보 11종과 또 한 집 안 선 대 문 집 3 종 , 북 보 1 종 등 총 1 5 종 125책 등 평생 수집한 많은 고문헌을 기증한바있다. 비천공은 밀성박씨 12중조의 한분인 충헌공(휘 척)의 후예이다. 이조참판에 증직된 휘 율(栗)과 어머니 증 정부인 이씨(李氏,종실인 영양수 이춘복의 딸) 와의 사이에 1561년(명종 16) 8월 15일 차남으로 태어났다. 휘(諱)는 이서(彛 敍) 초휘는 문서(文敍), 자(字)는 석오 (錫吾)비천(泌川)은아호이다. 선생은 9세 되던 해에 부친을 여의었 다.이에 모부인(母夫人)이 매우 엄하게 교육을 시켰는데, 선생 또한 그 가르침 을 명심하고 뜻을 가다듬으면서 문예 (文藝) 방면에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 기시작하였다. 1588년(선조 21)에 반시(泮試:알성 문과,謁聖文科)에서 등제(登第)한 뒤, 권지 성균관학유(權知 成均館學諭)를 거쳐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으로 선 발되었다. 이어 추천에 의해 승정원 주 서(承政院注書)로 임명되었고, 관례에 따라 사직(史職)을 겸대하였다. 1592년 (선조25)에 병조 좌랑으로 승진되었다 가, 얼마 뒤에 왜란(倭亂)을 맞게 되었 다. 7년여에 걸친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고 폭군으로 묘사되어 온 광 해군시대에 살면서 때로는 본인에게 화 가 미칠 것이 자명함에도 상소문을 올려 이를 바로잡으려 했고, 부정한 관리의 등용을 반대하고 또는 청렴하지 못한 상 관의 부임에 과감하게 관직을 버리면서 까지본인의의사를표출했다. 그러나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 을 걸면서까지 원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스 로 호를 졸졸 흐 르는 시냇물이라는 뜻으로 비천(泌川) 이라 함은 시경(詩 經) 진풍(陣風)에 나오는 시로 조촐한 집에서 편히 쉬는 즐 거움을 노래한 것으로 선생의 검소한 삶 을엿볼수있는대목이다. 택당 이식 선생은 충간공의 신도비명 에서 “학문을 좋아하여 저술에 힘쓰는 일을 노년에 이르기까지 게을리 하지 않 았다.”라고 하였고 또 “서궁에 유폐되었 던 인목대비가 모함 속에서도 화를 당하 지 않 은 것 은 모 두 선 생 이 힘 써 준 덕 분 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선생은 시비 를 명확히 하였던 분으로 60세의 노년에 명나라 태창황제(泰昌皇帝)의 상(喪) 에 조위사(弔慰使)로 갔다가 육로가 청 나라에 함락되어 해로를 통해 귀국하다 태풍으로 인해 배가 함락되어 서거함에 아쉬움이 남는다.그리고 후손들은 선조 현창을 위해 많은 서적을 발간하며 선조 현창사업에정진(精進)하고있다. 영광공종중‘密陽朴氏泌川公(忠簡)派標準譜 ’기증 1902년壬寅譜표준으로이후자손록더해,각문중에서기증된족보와고문헌은신문발행 에큰기여 영광공중중의박형원회장(좌)이본보상섭편집국장에게최근발행한족보를전달하고있다. 유 교 아 카 데 미, 청소년 예 절 캠 프 등 진 주 지역 선비문화 를 이끌어 오며 지역 유림의 추 앙을 받아온 박 종식 유도회장 (사진)이 지난 20일 임시총회에서 만장 일치로 인준되어 제27대 전교로 피선되 었다. 진주향교 전교 선출은 원로회의에서 추대하고 임시총회에서 관반수 이상 득 표로 선출되는 데 이번 만장일치는 그동 안의업적이인정된셈이다. 박 회장은 밀성박씨 졸당공 후예로 경 남 진주에서 태어나 밀성박씨전국청년 회장을 역임하는 등 밀성재 이사, 추원 재,봉양재,산천재 등 대소 종중의 임원 을 맡아 왔으며 제24대 진주시 유도회장 으로 2019년 취임했다. 유도회장 재임시 “모름지기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사람의 도덕(道德)과 심 성(心性)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더불 어 인간의 선한 심성을 바탕으로 우리사 회를 밝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유도회의사명이자,앞으로나아갈 방향이라 생각합니다.유도회 회원 모두 는 공부자의 가르침인 인·의·예·지(仁· 義·禮·智)를 바탕으로 극기복례(克己 復禮)하고, 솔선수범(率先垂範)하는 자 세를 견지하면서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 (配慮)하는 마음으로 지역사회의 도덕 성회복에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며 유 도인을이끌었다. 한편 박 회장은 오는 8월1일 진주향교 충효교육원에서 취임식을 갖고 공식 업 무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번 박 회장의 전교 피선은 졸당공 후예로 또 한명의 전교가 더해진 것이다. 현재 거창향교 박정제 합천 삼가향교 박창재 전교에 이 어 세 번째이다. 보통의 문중에서 전교 배출이 어려움에도 졸당공 문중에서 전 임전교 포함 10여명에 이르고 있어 가문 의전통을엿볼수있다. 박종식현종진주향교전교피선 유도회장연임중추대,진주역사·문화강좌와선비반 교양강좌등이끌어 박원희 선생은 대전에서 태어 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부설 사범과를 졸업했다.1921년 김사 국과 결혼 후 함께 일본으로 3년 간 유학하였다. 1923년 귀국한 박원희는 여자고학생상조회가 주최한 강연회장에 모습을 드러 냈다. 그는 이곳에서 여성의 반 역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이 후 지역 단체인 광진부인회를 시 작으로 1924년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를 조직 하고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925년 초 서울파 공산주의 그 룹의 여성단체인 경성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이를 이끌었다. 1926년 말에는 화요회계 여성단체인 경성여자청년동맹과 함 께 통합적 사회주의 단체인 중앙여자청년동맹을 탄생시켰다. 이는근우회탄생의밑거름이되었다. 김영순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15년 군산 메리볼덴 여학교 교사로 있다가 2년 후 모교인 정신여학교사감으로옮겨왔다.이곳에서1919년 결성된 대한 민국 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애국부인 회는 1919년 9월에 이르러 김마리아 등을 중심으로 결사부·적 십자부를새롭게꾸리는등조직을탈바꿈하였다. 독립운동에 좀 더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이때 선생은 서기에 선임되어 활약하였으나 1919년 11월 그 조직이 드러나면서 선생도 함께 체포되어, 1920년 12월 대구 복심법원에서징역2년을선고받고옥고를치렀다.출옥후태 화여자관 교사를 거쳐 정신여학교 사감으로 재직하였으며, 1 927년근우회창립을이끌었다. 두선생의근우회활동은발기단계부터시작되었다. 1927년 4월 26일 근우회 발기총회가 열렸다.선생 등 40명의 발기인단이 중심이 되어 총회를 이끌었다. 이들 40인은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던 지식 여성이었으며, 민족주의 여성 운동계와 사회주의 여성운동계가 함께한 좌우연합의 성격을 띠었다.이날의 총회에서 창립대회 날짜를 5월 중순으로 결정 하고,준비위원을21인을선임하였다. 두 선생도 준비위원에 선임되었다.이날 창립대회 준비위원 회 구성 및 사무 분장이 이루어졌다.사무는 ①강령븡규약 초안 및 취지 작성 ②총무부 븡재무부 ④회원모집 ⑤창립사무소 교 섭위원으로분장되었다. 두 선생은 유각경븡황신덕븡이현경븡정칠성븡조원숙 등 8명과 함께회원을모집하는역할을수행했다. 드디어 1927년 5월 27일, YMCA 강당에서 회원 150명, 방 청인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근우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창립총회에서 21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으며, 두 선생도 집행위원이 되었다.이날 선출된 집행위원들은 5월 29일에 제 1회 집행위원회를 개최했다.두 사람은 여기에 참여하여 근우 회 활동 청사진이 될 8개 항을 결의하였다. 이날 부서 결정이 이루어졌는데 두 선생은 황신덕븡김동준과 함께 교양부를 맡 았다. 발대식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져, 6월 17일 발대식 거행 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여 1927년 6월 17일 발회식이 거행 되면서,두 선생은 한국여성운동의 한 걸음을 내딛는 데 큰 역 할을하였다. 박원희 선생의 근우회 활동은 집행위원회의 교양부원으로 서 역할이 중심을 이루었다. ①약 7차례의 중앙집행위원회 참 여 ②편집부와 학생부 설립 운영,③부인의 교양을 위한 강연, ④근우회 선전일의 팜플렛 제작븡보급 ⑤근우회 지회설치를 위한 강연활동 등이 바로 그것이다.이 가운데 특히 강연 활동 은 부인 교양을 위한 핵심 활동이었다. 1927년 7월 교양부 주 최의 제1회 부인학술강습회에서 븮부인문제븯라는 주제로,1927 년 10월 함흥에서는 븮특수 환경에 처한 조선여성의 사명븯이라 는주제로강연했다. 이날 “조선은 농산국이요 일본은 공업국이다. 조선의 원료 를 염가로 일본에서 방매함으로서 조선의 경제는 날로 쇠퇴 하여 간다. 이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적으로 무슨 기관이 있어야 하겠다”는 내용으로 강연 도중 일본 경찰의 급습으로 중지당하고경찰서에연행되는고초를겪기도했다.이후192 7년 11월 인천 산수정 공회당에서 븮조선청년의 지위와 사명 븯이라는주제로강연하였다. 박원희선생은신간회활동에도참여했다. 신간회 본부의 정기대회 준비 활동, 신간회 경성지회 활동 이 확인된다.그러나 선생은 더이상 활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 병고로 1928년 1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을 떠나며. 동 지들에게‘일들 잘 보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생애 마지 막 순간에도 자신이 못다 이룬 여성해방븡민족해방의 꿈을 동 지들이이어가길바라는마음에서였을것이다. 선생의 장례는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치루었다. 장례식에는 1,000여명의각계인사가참여하였다. 김영순 선생은 신간회 창립 및 제1회 집행위원회 활동 이후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박원희와 함께 교양부를 맡아 여성의지위향상과항일독립운동에앞장섰다. [출처보훈처] 근우회창립이끈여성독립운동가박 원희 국가보훈처(처장황기철)는광복회,독립기념관과공동 으로 박원희·김영순·조복금 선생을 2022년 5월의독립 운동가로선정하였다.1925년5월27일,YMCA강당에 서 근우회 창립대회가 열렸다.한국 여성운동의역사적 한발을내딛는순간이었다.이는여성계의전국적 통일 기관 마련을 위한 노력의결실이었다.근우회의창립은 한국근대여성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측 면에서큰의의를지닌다. 근우회창립이끈박원희·김영순선생 박원희선생 근우회전국대회모습 근우회강습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