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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7월31일 일요일 7 (제187호) 특 집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 관은 음성陰城이며 자는 경 원景瑗, 호는 회재懷齋이 다. 사예 곤鯤의 아들이며 전라도 광주에 세거世居하 였고 10세 때 정황丁潢의 문하에 들어갔다. 1546년 (명종1)진사시에 합격하였 으며, 광주 선도면船道面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 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 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였 다. 또 향약을 실시하고 기 대승奇大升, 박순朴淳, 이 이李珥 등과 교유하였다.1568년 광주목사 유경심柳景深을 도와 광주향교를 중수하고 학헌學憲,학규學規를 제정하였 다. 1568년(선조1)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며,157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종부시 주부宗簿侍主簿가 되었다. 운봉현감雲峰縣監이 되었을 때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세웠다. 1578년 전라도, 충청도의 도사都事를 거쳐 1579년 예조정랑禮曹正郞,1580년 지평持 平이 되었으며,그 뒤 성균관 직강直講,영광군수,밀양부사 를 역임하였는데 영광과 밀양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뒤에 광주 전주의 교수와 사예司藝, 사섬시정司瞻寺正, 봉 상시정奉常寺正등에재직하였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가 일어나자, 전에 정여립 의 이조정랑직 진출을 막은 이경중李敬中을 탄핵한 죄로 삭탈관직 당하기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신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의병도청義兵 都廳을 세워 맹주(盟主)로 추대되고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하였다.당시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무능을 탄핵하였으 며 새로 목사에 부임한 권율權慄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다. 의병활동의 공로로 다시 관직에 올라 나주목사로 재임하다 가돌아가셨다. 1602년(선조 35) 광주 벽진촌碧津村에 세워진 벽진서원 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그 사당은 뒤에 사액 의열사賜 額 義烈祠로 바뀌었다.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조선왕조 명종과 선조 두 분 임 금 때 당 나 라 정 관 貞 觀때와 宋나라 가우嘉佑 때 처럼 국치성國治成을 융숭 隆崇하게 선양宣揚할만한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침입 한 왜구를 소탕하여 삼백년 태평성대의 문치를 활짝 열 어놓았으니 호남땅 光州남 쪽 十里지점 개산마을에서 태 어 난 회 재 박 선 생 이 그 중한분이다. 선생의 휘는 광옥光玉이 고 字 는 경 원 景 瑗 이 며 本 貫 은 陰 城 으 로 고 려 고 종 조 때 서북병마사로 몽고병을 정 벌한 功으로 문하시랑평장 사를 제수한 충정공忠靖公 서犀의 후손이고 文科에 올 라 사예司藝를 지내신 곤鯤 의아들이다. 先生은 일찍이 충간공 정 황丁黃에게 사사하면서 정암靜菴 先生의 학문을 익혔으며, 또 金河西,奇高峰,李栗谷,朴思菴,鄭松江,李一齋,柳眉岩, 盧玉溪, 金健齋, 高霽峰 등 諸賢들과 講論하고 연마하여 풍 부한학문을쌓았다. 明宗 二年 二十一세에 生員 進士 兩試에 합격하였으며, 大臣의 천거로 敎官에 제수除授되어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思菴의 勸誘로 文科別試에 합격 內外官職을 두루 지내면서 치적을 남겼고 고향에 향약을 세워 예의로 인도하였으며, 또한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 수월당水月堂이 란현판을걸고詩句를읊고경서를강론하기도하였다.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明나라에 들어가 임무 를 마치고 朱晦菴 呂東萊 兩先生의 진상眞像을 모시고 歸 國하여 尊慕하는 뜻을 담았다. 光州 敎授와 雲峰 靈光군수 를 지내면서 學校와 學規를 세워 諸生들을 敎訓하여 무너 진 斯文을 붙들었으며 尹元衡과 李拭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가 하면 太祖大王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세우기 도하였다. 壬辰倭亂에 임금이 피난길에 올랐는데 순찰사 이광이 出 兵하지 않고 머뭇거리자 조정에 상소하여 그 죄상을 아뢰 었으며 金健齋 高霽峰과 義兵을 일으키는 격문을 발송하고 자신은 노쇠老衰하여 갑옷을 입지 않고 의병과 의곡을 조 달하는가 하면 군중을 위로하며 간신배들을 제거하고 나라 의근본을견고히하였다. 광주목사 권율을 도와 연이어 승전하도록 하였는가 하 면,또 장령 최시망과 주부 홍민언이 이끈 의병을 보내어 운 봉 여원치에서 적로를 차단하도록 하였으니 그 계책은 국 가에 큰 공적을 남겼다. 조정에서는 그 공로를 누차 포상하 고 도승지 벼슬을 증직하는가하면 그 사당을 의열사라 사 액하고예조좌랑이정인을보내어祭祀를모셨다. 또한 先生을 讚美하는 諸賢들의 敍述이 많으니 佐郞 柳 思敬 滄溪 林泳과 文簡公 李敏敍,文谷 金壽恒,文忠公 金壽 興, 文忠公 閔鼎重, 文獻公 洪良浩, 文忠公 徐命膺, 文敬公 洪直弼의 上疏文과 啓文이 수백년 역사속에 이처럼 화려하 건만 先生께서 태어난 마을은 지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 았다. 그 地域을 荒廢하지 않게 하는 것은 後學들에게 책임 이 있 는 것 이 기 에 後 孫 들 이 이 를 가 슴 아 프 게 생 각 하 고 종 원들과 상의하여 그 곳에 碑를 세우기로 하고 나에게 碑文 을 청함으로 곰곰히 생각하니 先生께서는 堯舜政治를 實現 하자는 靜菴先生의 學問을 터득하였기에 가정에서는 齊家 를 하였고 官吏로서는 太平政治를 實現하였다. 壬辰倭亂이 닥쳐오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防禦하여 唐나라 韓弘처럼 戰功을 세우려 했건만 結果를 보지못하고 애석한 삶을 마치셨다. 때문에 세상 사 람들은 先生과 健齋, 齊峰 세분을 殷나라 三人처럼 成仁을 하였다고 칭송하며, 또 權公을 薦擧하는 것이 더욱 大端한 것이였건만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것이 恨嘆스럽기만 하 다. 아 先生께서는 處地에 따라 行動이 온당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이는明徹한仁義에바탕을두었기때문이다. 晦菴의 道德과 靜菴의 至治思想에 바탕을 둔 先生은 壬 亂을 當해 顔卿과 韓弘처럼 平亂의 기쁨을 보지 못하고 諸 葛亮처럼 돌아가셨지만 列聖朝께서는 贈職을 내리고 또한 祠堂에 賜額하여 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모셨는가 하면 後 學들로 하여금 千萬年俎豆를 받들도록 土地를 주었다 先 生을 尊慕하는 努力은 계속되여 官廳과 儒林 그리고 後孫 들의 관심속에 眞影을 모신 雲裏祠는 이처럼 雄壯한 모습 으로 바뀌였고 先生께서 굴착한 연못은 진평제란 이름으 로 區廳이 周圍를 훌륭하게 정화하는가 하면 못 中心에 정 자를 세워 이곳을 찾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觀光名所 가 되였다 예전에 세웠던 遺墟碑는 地主의 請에 따라 이곳 에 옮겨 세우면서 규모를 늘리고 先生의 遺蹟을 누구나 쉽 게 읽을수 있도록 國漢文으로 풀고 最近 달라진 狀況까지 를 이 비 에 새 겨 훗 날 역 사 적 자 료 를 삼 고 자 하 니 先 生 께 서 남긴얼소멸되지않고저높다란瑞石山처럼영원하리라. 懷齋先生 誕辰五百二十九年(二○○三(癸未) 月 上浣에 東洋學硏究院長後學泰仁朴來鎬員삼가 기록하다. 회재로는 회재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2009년에 광주광역 시에서선생의호를따서명명한도로명이다.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에서 지석천을 건너 서창방면 좌 측 도로에서 바로 시작해 고싸움놀이테마파크, 개산방죽 (전평제), 서부농수산물도매시장, 풍암호수, 국제양궁장, 백운광장 고가도로가 시작하는 대남대로를 지나 프라도호 텔위사거리에서독립로까지의12.98㎞도로를말한다. 박광옥(朴光玉)- 고경명과 함께 창의 한 제공의 사실(同 倡諸公事實)- 자(字)는 경원(景 瑗). 호(號)는 회재 (懷齋). 본관은 음성 (陰城). 사예(司藝) 곤(鯤)의 아들이고, 한림(翰林) 붕(鵬) 의 조카이다. 명종 1 년(1546) 생원·진사 시에 모두 합격하였 고, 선조 7년(1574) 문과에 급제하여 지 평(持平)을 제수 받 았다. 어려서 사인(舍人) 정황에게서 공부하였고, 향학을 보수 하고 가숙(家塾)을 세움으로써 사림들의 추앙을 받았다. 대간으로 있을 때 탄핵받는 것을 피하지 않았고, 여러 고을 들의 수령을 지냈는데 학교를 진흥시키는데 크게 성과를 내었다. 명종 20년(1565)에 진사 박규(朴揆)와 의논하여 윤원형 (尹元衡)의 죄를 극론하였다. 선조 7년(1574) 운봉(雲峯) 현감일 때 조정에 건의하여 태조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 碑)를 세웠다. 선조 13년(1580)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 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가서 회암(晦菴, 朱熹)·동래(東萊, 呂祖謙) 두 선생의 진상(眞像)을 구하여 돌아와 매월 초하 룻날에 펴 놓고 바라보며 흠모 하였다. 임진란 때 임금께서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바라 보며통곡하면서여러날음식을먹지않았다. 마침내 거의(擧義)에 힘을 쏟기로 하고 건재(健齋) 김천 일(金千鎰)·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과 의논하여 의병 청 (義 兵 廳 )을 설 치 하 고 정 예 용 사 와 군 량 ·군 기 등 을 모 으 고 가정(家丁)을 내어 편오를 갖추고 자제들로 하여금 수 송을 맡도록 하였다. 고공의 군사가 담양(潭陽)을 향해 출 발하였는데 공은 병 때문에 따라갈 수 없게 되자 호남지방 을보전하는것을자신의임무로삼고남기로하였다. 김공 또한 글을 보내 권하여 말하길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이나 고향에 남아 지키는 것이나 나라를 위한 것 아닌 것 이 없소이다. 근본이 되는 땅(호남)이 한번 흔들리면 장차 어떻게 될는지 헤아리기 어렵게 됩니다. 우리들의 용병(用 兵)의 유·불리는 오로지 귀하에게 달려 있습니다.”라 하였 다. 이광(李洸)이 파진(罷陣)한 이후 인심이 크게 동요하였 다. 본 고을(:광주)의 목사 권율(權慄)이 군사를 일으키고 자 격문을 내어 모집하나 이에 응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 에 공 이 자 제 들 을 여 러 고 을 에 나 누 어 보 내 잘 타 일 러 정 병 수천을 모았다. 권공이 이로써 출진하여 행주(幸州)의 대 첩을이룰수있었다. 이때 조정과의 소통이 되지 못함에 공이 먼저 문인 박희 수(朴希壽)를 보내 호남의 형편을 아뢰었다. 조정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특별히 권공을 순찰사(巡察使)로, 그리고 공을나주(羅州)목사로임명하였다. 공은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병고를 무릅쓰고 부임하였 다.매번 앉을 때는 정당(正堂)을 피하고,음식은 단지 조밥 만 먹으며 매번 식사 때마다 문득 통곡하면서 “임금께선 어 디 계시는가? 지금은 도대체 어찌 된 때인가?”라 하였다. 주병(州兵)을 이끌고 북상하여 적을 치려는 계획을 가지고 준비해 가던 중,병이 도져서 마침내 사망하였다.사당이 세 워졌는데 숙종 때 의열사(義烈祠)라는 사액을 내리고 제사 를지내게하였고도승지(都承旨)를 증직 받았다.[광주(光 州)] △황산대첩비 연대:1577년(선조10년) 지정 : 사적 제104호(문화재명 : 남원 황산대첩비지[南原 荒山大捷碑址]) 크기: 높이4.25m 소재: 전라북도남원시운봉읍가산화수길84(화수리) 황산대첩비(荒山大捷 碑)는 원래 1577년에 운 봉현감이던 회재 박광옥 선생이 주도하여 전북 남 원군 운봉면 화수리에 세 워졌던비이다. 1380년(우왕 6년) 9월 이성계가 전라도 지리산 근방 황산에서 왜구를 격 퇴시킨 싸움이다. 이보다 앞서 1376년 홍산싸움에 서 최영에게 대패한 왜군 이 78년 5월 지리산 방면 으로 다시 침입하였고, 8 0년 8월에는 진포에 500 여 척 의 함 선 을 이 끌 고 침입, 충청·전라·경상 3 도의 연안지방을 약탈· 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 이때, 원수 나세·최 무선 등이 화통, 화포로써 왜선을 격파, 전부 불태워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적은 더욱 발악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 다.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전라· 경상도순찰사로 임명, 이 지방의 방위책임을 맡게 하였다. 적은 함양 운봉 등의 험지를 택하여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 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황산 북서쪽에 이르렀 을 때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이때 적은 산을 의지하여 유리 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고전에 빠졌으나, 이를 무 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최영의 홍 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싸움이 며, 이를 계기로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세워졌던것이다. 일제강점기 침탈기간에 조선의 정기를 훼손시킬 목적으 로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 있는 정도였 으나 1957년에 남아 있는 귀부(龜趺)와 이수(?首)를 그대 로 이용하여 중건하였다. 1973년에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전·홍살문·삼문·담장,그리고 부속건물들을 새롭게 단장 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 p://gsm.nricp.go.kr)자료를 인용한다.판독자와 해석자는 이우태이다. 문집 원본자료는 김귀영의 문집 동원집(東園 先生文集)에 실려 있다. 한국고전번역DB(http://db.itkc.o r.kr)에서 인용한다. [본 글은 2019. 11. 22, 학술대회 발표문 을요약하여게재한것입니다.] 뱚청년들과떠나는선조유적탐방뱚 뱚뱚뱚뱚회재박광옥관련문화 유산 이종일(향토문화개발협의회장) 김희태(향토문화개발협의회전문위원) 회재선생이축조한개산방죽(전평제)의수월정은많은시인묵객과시문을강론하였던곳으로청년들이선조유적탐방길에찾아기 념촬영을하고있 다. 지난2018년음성박씨정승공파주관청소년수련회에서황산대첩비를찾았다. 회재박광옥선생의생애 회재박광옥존영 회재선생유허비(懷齋先生遺墟碑) 광주 서구 매월동 전평제에 세워졌 다. 회재로 호남절의록 호남절의록高廷憲編간행년대1799년(정조23) 븮호남절의록븯 박광옥(朴光玉)-고경명과 함 께창의한제공의사실(同倡諸公事實) 황산대첩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