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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7월31일 일요일 6 (제187호) 특 집 1602년 회재 박광옥 선생의 학덕과 절의정신을 추모한 후학들이 광주 서구 벽진동에 창건하여 향사(享祀)와 교학 (敎學)에 힘써왔으나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27년에 운리영당(雲裏影堂)을 설립해 향사하 였는데 도시개발로 선생의 묘소와 영당이 편입되어, 1999 년에 묘소를 이장하고 그 옆인 서구 풍암동 769-1번지에 운 리사(雲裏祠)를 종중에서 건립했다. 이후 뜻있는 유림과 학자들이 150년만인 지난 2018년 6월 7일 지역 유림들에 의 해복설되었다. 회재선생의삶은구국과애민에있다. 1592년 선생이 67세 때 임진왜란을 당해 전국이 왜적에 게 유린되어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다. 선생은 인근 에 살던 고경명(高敬命) 나주의 김천일(金千鎰)과 의병을 일으켜 나라와 민족을 구출하자고 다짐하고 의병을 모집 해 김천일과 고경명에게 출전케하여 큰 성과를 올리게 하 고 뒤에서 의병과 군량을 확보하여 그 뒷바라지를 도맡았 다. 광주목사 권율(權慄)이 천 여 명의 광주군사로 이치대첩 을 거두고, 이어서 전라순찰사가 되어 만 여 명 의 호 남 의 병 을 이끌고 북진할 때 군사와 군량을 공급했으며, 대흥사의 승장 처영(處英)을 함께 참여시켜 행주대첩을 이룩하는데 큰공헌을하게한것도선생의역할이었다. 선생은 67세의 고령에도 나주목사에 취임하여 국난을 극 복하는데 전념하다가 병환으로 사임하고 1593년 10월 26일 에별세했다. 지역주민의 기근을 해소하기 위해 개산방죽을 막아 농용 수를 제공하면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으며, 지역 의 문인들과 함께하면 예향광주의 발전적 문화환경의 기반 을 세웠으며, 광주향교 향약을 재정하는 등 지역주민의 순 화에도심혈을기울였다. 벽진서원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문화체육관광부 유교 지원국고보조사업공모에서 전문강좌와 교양강좌, 청소년 인성교육강좌 등 3개 프로그램 운영을 골자로 한 3회 연속 유교아카데미교육사업기관으로선정되었다. 그리고 해마다 광주 서구청 지방보조금 지원사업으로 일 반인을 대상으로 전통생활다례강좌, 지역아동센터 학생들 을 대상으로 청소년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광주효성 청소년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청소년인성예절교육을 실시 하는 등 전통다례와 청소년인성교육의 전문 서원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어 서원의 본래 기능인 강학을 통해 시민과 함 께하고있다. ▶회재박광옥관련문화유산7면에 고려 벽상공신 박춘 선생을 비롯한 3代 4 位의 제단으로 ‘서석단’ 이라한다. 丙辰年(1976)에 祭壇을 세우고 祭享을 받들어 왔으나 세월이 흘러 제단이 퇴락되었으나 행정규제 로 인해 중수하지 못하다가 己亥年(2019)에 어렵게 인허가 를 얻 고 종 원 (宗 員 ) 들 이 정 성 을 모 아 동 년 8 월 3 1 일 중 수 를 마쳤다. 서석단을 중수하는데 9천6백5십여만원의 성금이 기탁되 었다.좌상공파대종회는종재가없다. 이는 개성에서 관료로서 생활하다 갑작스럽게 신돈이 구 가세족을 정리한다는 구실로 정적을 없애는 과정에서 1순 위로 최영장군과 함께 유배를 가고 또 열엄사에 휘하 사람 을 보내 암살하고 사패지를 비롯 모든 재산과 노비들을 몰 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석단 중수에 이렇듯 많은 성금 이 일순간에 모금된 것은 집행부의 무한 신뢰가 뒷 받침 되 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수를 마치고 펴낸 서석단지(瑞石 壇誌)는 성금 모금과정을 비롯한 모든 기록을 담았으며,수 십년동안 각종 규제에 묶여 정비하지 못했던 것은 처음 단 을 세울 때 행정관청의 기록이 없었기에 이 같은 오류가 재 발하지 않도록 행정관서의 신청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모 든 과정을 담았다. 그리고 이날 찾은 탐방객들은 서석단지 를 받아보고 각자 문중의 롤모델에 될 것이라며 꼼꼼히 들 여다보았다. 좌 시 중 박 춘 선 생 의 시 호 ( 諡 號 )가 문 정 (文 定 )으 로 , 내 시 중 과 시 어 사 를 지 낸 휘 상 례 ( 尙 禮 )의 아 들 이 고 은 산 행 산 공과는 삼종간(8촌)이다. 이재 백이정(彛齋 白 視正) 선생 에게 수학하였고, 문장과 무예를 익혀 元나라에 들어가 등 제하고, 한림학사가 되어 이제현·이색과 더불어 정주(程 朱)의 학설을 강론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고 려 말 외침이 끊이지 않아 국가가 위태해졌을 때에는 나주 목사 겸 전라도존무사,도병마사,응양군상호군,만호,청주 수원도병마사, 판밀직사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외적을 물리치는데많은전공을세웠다. 공민왕 12년(1363) 윤3月 공신을 녹훈(錄勳)할 때, 公은 1362년 1월에 홍건적에 점령된 개경을 수복할 때의 전공으 로 수복경성공일등(收復京城功一等)에, 1363년 윤3월 흥 왕사 변란에 王을 호종한 功으로 부시피난공일등(扶侍避 難功一等)에 녹훈되어,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서 공신각 (功臣閣)에 존영(尊影)이 걸리게 되었다. 공민왕 12년 5월 元나라가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의 왕으로 삼자,도병마사 로 임명되어 강계독로강등처(江界禿魯江等處)에 주둔하 다가 공민왕 13년(1364) 1월에 수주 달천(隨州 川)에서 최영·이성계 등과 함께 최유(崔濡)의 元軍을 대파하여, 그 전공으로 판밀직사사에 임명되고 정난일등공(靖難一等 功)에녹훈되었다.공민왕14년(1365)3월 우시중에 임명되 었으나 신돈의 모함으로 공민왕 14년 5월 광양에 유배되었 고, 공민왕 15년 8월 울주군 열암사(裂巖寺)에 유폐되었다 가 암살당하고 수장(水葬)되었으니, 유체를 모시지 못한 것이자손에게는천추의한이었다. 좌상공은 1남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인지는 찬성 공이고 딸은 우리나라 최초로 수군을 창설한 정지장군에게 출가했는데 학문이 뛰어나 남편을 대과에 오를 수 있도록 내조했다. 죽녹원은 2003년 5월에 조성하여 약 31만㎡의 공간에 울 창한 대나무숲과 가사문학의 산실인 담양의 정자문화 등을 볼수있는시가문화촌으로구성되어있다. 죽녹원은 전망대,쉼터,정자,다양한 조형물을 비롯 영화 ·CF촬영지와 다양한 생태문화관광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가족,연인,친구,수학여행 등 연간 관광객 100만 명이 찾는 대한민국최고의관광명소로자리잡고있다.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대 바람이 일상에 지쳐있는 심 신에 청량감을 불어 넣어준다. 또한 댓잎의 사각거리는 소 리를 들으며 빽빽히 들어서 있는 대나무 숲길을 걷노라면 푸른 댓잎을 통과해 쏟아지는 햇살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 아내는기분또한신선하다. 죽녹원 안에는 대나무 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먹고 자 란다는죽로차(竹露茶)가자생하고있다. 죽 림 욕 을 즐 기 고 난 후 죽 로 차 한 잔 으 로 마 음 의 여 유 까 지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죽녹원에는 죽림욕을 즐길 수 있 는 총 2.2㎞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운수대통길,죽마고 우길, 철학자의 길 등 8가지 주제의 길로 구성되어 있는데, 죽녹원전망대로부터산책로가시작된다. 전망대에서는 담양천을 비롯하여 수령 300년이 넘은 고 목들로 조성된 담양 관방제림과 담양의 명물인 메타세쿼이 아 가로수길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생태전시관, 인공 폭포, 생태연못, 야외공연장이 있으며 밤에도 산책을 할 수 있도록대숲에조명을설치했다. 죽녹원에는훈장초암박인수현종이있다. 규정공 후 청재공 후손으로 1947년 전남 해남군 황산면 에서 태어난 훈장님의 호(號)는 초암(草庵)으로 어렸을 적 해남 대흥사의 스님으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이후 중헌 윤 정복 선생에게서 부족함을 채웠다. 그리고 남종화가 아산 조방원 선생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를 완성시킨 실력은 국가에서도 인정하고 있어 그의재량(才量)을짐짓가늠케한다. 초암 훈장은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의 예술인촌 ‘월선서 당’을운영하면서17년동안예술에매진해왔다. 잘 나가던 사업도 접고 묵향에 묻혀 자신만의 서체와 화 풍을 정립시켰고, 논어(論語) 등 고서(古書)를 연구해 식 사예절과 웃어른을 공경하는 올바른 자세를 익혀, 자라나 는 학생들에게 일깨워주고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 다. 낙안읍성에서 ‘낙안서당’을 3년 동안 운영했으며, 전남 영광의 대안학교 성지중고등학교에서 20년 동안 한문과 인 성교육 강의와 수원의 문화센터에서 전통예절, 서예, 사군 자를 가르쳐 왔다. 그리고 지난 2010년부터는 지금의 죽녹 원송강정에서시(詩)서화(書畵)강의및창작활동을통해 뭇사람들의정신을깨우쳐주고있다. 초암선생은 학국관광공사 주관 국제여행박람회에 초청 북경 서안 청도 등에서 한국의 멋을 선보여 중국인들을 사 로잡은바있다. 창평향교 창건 연대는 읍지(邑誌)에 1398년(정종원년) 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창평이 고려 중기 이후부터 독립적인 현으로서 자리했고, 이는 조 선 초까지 이어진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초 ‘일읍일교 (一邑一校)원칙’ 즉 모든 고을에 학교는 세우는 당 시 통 치 규 범 에 따 라 1 3 9 8년 창건도 맞는 것으로 보여진다. 성종대에 완성한 븮경국 대전븯 외관직제에 의하면 창평은 형령(종5품)이 파견된 고을이었고, ‘동 국여지승람’(1488)에도 전라도 57개 향교중 하나 로기대되어있다. 당시 ‘동국여지승람’에 의 하 면 전 국 8 도 에 모 두 329개소의 향교가 건립 되었는데 이는 조선 초 지방 수령들이 신 왕조의 유교화 정책에 적극 참여 한 결 과 로 볼 수 있 다 . 창평향교는 성종10년(1479)에 지금의 자리, 즉 치소 동 쪽산기슭에서반대편북서쪽으로옮겼다. 왜 창건 후 100여년도 안된 시점에 향교를 이건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호랑이 출몰이 원인이 었다고한다. 원 자리는 당시 치소의 오른쪽에 있는 목맥산(木麥山)골 로 지금도 마을 주민들은 그곳을 향교골이라고 부르고 있 는데 목맥산은 매우 산세가 깊고 험난하다. 한편 이 시기는 1479년 현의 복현 시기와 맞물리므로 이 과정에서 새롭게 향교 이건 논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명륜당 중수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는 1582년 2월 2일의 기록이 있어 상 고해보야야할것같다. 향교의 장소적 특징 중 하나는 이건인데 특히 17~18세기 에 가장 많다. 이는 임란 시 많은 향교가 소실되어 새로 좋 은 장소로 옮겼고, 이외 풍수적인 사유(서향, 선비가 나오 지 않음)과 현실적인 수재, 소랑이 출몰 등도 이건 사유가 됐다.1회정도는보통이고많게는5번옮긴향교도있다. 창평향교건물구성은비교적단순하다. ‘현(縣)’ 고을에 소설위(小設位) 향교라는 제약된 여건 에 기인한 것으로도 여겨진다.건물 규모도 대성전 정면3칸 등장대하고화려한건물이없다. 문묘에는 대성전, 강학구역에는 명륜당과 동·서재가 있 으며,지원 건물은 문묘 우측에 있다.향교의 주 출입문으로 건립되는 외삼문은 본래 없었고, 문묘의 출입문인 내삼문 은 건립되지 않았다. 대신 협문식인 사주문과 일각대문이 외삼문과 내삼문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구성은 협소한 향 교 터와 전면의 급한 지형적 여건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 다. 창평향교는 지형적으로 상당히 급경사지에 위치하고 대 지는종(從)축보는횡(橫)축에조성되어있다. 제향(문묘)과 교육구역 설정은 경사지 입지의 규범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두 구역의 차는 1.2m로 큰 차이는 없다. 즉 두 구역이 한데 모아있는 형식이다. 강학구역은 호남지방 향교의 특징인 ‘전당후재(前堂後 齋’인데 대지가 협소한 관계로 동재와 서재가 대성전에 매 우 근접해 있어 마치 다른 향교의 동·서무 위치에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따라서 창평향교의 전체 배치모습은 평면적 으로‘□자’형과같은독특한형식이다. 사찰로 보면 불전 앞 좌우에 승방이 있고 앞에 누각이 있 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배치는 전남뿐만 아니라 전국에 서도보기힘든배치형식이다. 향교 출입은 명륜당 우측 아래쪽의 사주문을 이용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는 경사가 매우 급해 자연석 계단을 설치 했다(1987년 상황) 이 구역은 진입이 불편하여 2020년에 진입로를 일부 변경했고, 사주문 자리에 새로 외삼문을 건 립했다. 창평향교 배치와 구역설정에서 주목되는 시설은 대성전 앞마당의 담장 설치다.즉 문묘의 신성함을 저해 할 수 있기 때문에 대성전 앞마당 좌·우쪽, 즉 동·서재 앞에 별도의 담 장을 설치했다.이 담장이 언제 설치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부터있었을것으로보인다. 당시 유림들이 문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협소한 대지 여건에 조성된 문묘와 강학구역의 혼재를 담장 설치로 해 결했던것으로여겨진다. 담장구조는현재한와가올려진자연석한식담장이다.1 987년 당시 시멘트블럭 구조였으나 후에 개보한 것이다.블 록구조 이전에는 토담이었으나 유지가 어려워 블록담장으 로 1970년대 새로 축조한 것이다. 담장 높이는 1m로 그리 높지않아단순히구역설정역할만했다. 담장에는 출입용 일각대문3개를 명륜당과 동재, 서재 방 향에설치했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청년들과떠나는선조유적탐방뱚 벽진서원 광주광역시서구송풍로42(풍암동769-1) 벽진서원전경 벽진서원에서 노강 박래호 현종의 집례로 알묘를 하고 있다.(왼쪽부터 집례래호,알자상열,분헌관병룡,봉향응조순) 죽녹원시가촌송강정에서 서석단 광주광역시북구화암동360-4 서석단전경 박부돌고문이좌상공제단에분향하고있다. 죽녹원 전라남도담양군담양읍죽녹원로119 박인수훈장이죽녹원을소개하고있다. 창평향교 전라남도담양군고서면교촌길43-11 창평향교전경 창평향교에 세워진 고직당 박영철 선 생숭모비 창평향교에서단체기념촬영 뱚▶7면으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