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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7월31일 일요일 10 (제187호) 종합 2008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연재해온 운산박희학 참봉의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철학』율정 박서생 선생을 비롯한 朴姓의청백리를 소개한 『청백리 열전』21세기를살아가는우리들에게교훈이되는주옥같은글『한빛의메아리』를엮어‘그리움을남 긴박근혜대통령과한빛의메라리’를지난2월 말출간하바있어성손여러분가정에소장을권장드립니다. 정가15,000원구입문의053-588-7300한빛신문 운산박희학참봉저서‘그리움을남긴박근혜대통령과한빛의메아리’구입안내 박근혜대통령과아버지인박정희대통령의국정철학은우리나라를위해아무도하지못한많은일 을함으로써경제대국으로발전시켰다고생각하 는데어떤죄로탄핵을받았는지알수가없었다......저자인사말에서 효자정문(孝子旌門) 밀성박씨 행산공(휘 세균)의 10세(世)은 경남 밀양에 세거 하는오랜세족(世族)으로고려말불사이군하지않고절의를 지킨 가문이다. 이에 정변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서 많은 불이 익을 감내해야하는 과정에서 행산공의 손자이고 소감공의 장 자이신 신좌(臣佐-小尹公) 한성소윤(韓成小尹)께서 전라도 태인군 옥박동 (현재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으로 (現在 玄岩 文中) 차자 신필(臣弼-鎭士公) 은 경상도 고령군으로 이주하 였다.(現在高靈文中) 옥박동(俗稱 옥박골)에 정착 후 수대를 내려와 임진왜란을 당하여 강원도 및 전라도 장성군 등을 전전피난 끝에 행산공 의 제10대손 정민(挺珉븡字븡汝珍 號븡靑岩)이 고부군 금정촌 (현재 정읍시 용계동 정문 마을 어귀 덕고개에 있었으나 폐촌 되었다고함)에정착하였다. 당시 고부군 청금록의 기록을 보면 행산공 8대손 리(鯉. 號. 菊圃)께서 조선 성종조에 창릉참봉을 하시고 외방직 찰방(外 方職 察訪)을 재수 받았고, 그의 손자 정민(挺珉, 號 靑岩)이 경학(經學)을깊이하였다고전해지고있어이를뒷받침한다. 현암 선생은 슬하에 세유(世維) 세경(世經) 세위(世緯) 삼 형제를 두고 우암 송시열 선생과 종유하면서 문하에 입문하 고 둘째아들 세경을 우암선생 문하에 입문시켰다. 두남 박세 경이결혼하여바작산(현암마을뒷산)아래에집을집터를마 련하여정착하면서현암(玄巖)마을즉거먹바위동네가시작 되고 밀성박씨 행산공 후예 집성촌으로 번창하게 되었다. 그 러나 현재 현암마을을 일본인이 강점하면서 상흑 하흑으로 나누어지고흑암동이라하여본래의이름을되찾았으면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제자 두남 박세경의 집을 방문하여 주 변을살펴보던중거므스레하고현묘하게생긴서기(瑞氣)넘 치는 큰 바위를 보고 또 박재 선생이 문하의 제자를 가르치며 강론한다하여현암(玄巖)이라이름짓고박재선생에게현암 (玄巖)이라는 후를 지어주었다.해남 현감 최체(崔體)의 현암 집 현암기(玄巖記)에 의하면 이 바위는 태극현현(太極玄玄, 우주 만물의 근원이며 하늘과 땅이 나눠지기 전 세상)때부터 무근현현(無極玄玄, 우주의 본체 끝이 없는 태극의 맨 처음 세상)의 이치를 갖추어 푸른 산을 등지고 맑은 시냇물을 내려 다보며 만고에 바람 천둥에도 흔들리지 않고 바위 모양이 크 고 높고 평평하여 가히 6~7명이 앉을 만하고 주변 풍광이 수 려하여 현암 박재 선생이 문하생들과 더불어 우주의 현묘한 이치를 강론할 만한 장소이기 때문에 우암 선생이 정읍시 현 암1길 34-13에 소재한 바위를 현암(玄巖)이라 이름 짓고 제 자인 박재에게 현암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는 기록이 전해 진다. 그러나 현재는 거먹 바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후손들이 농지를늘리기위해조금씩깨서경작하면서치워진것이다. 현암박재선생은세유(世維)·세경(世經)·세위(世緯)삼형 제를 두면서 크게 번성하였다.이에 장자 세유(世維) 종파(宗 派)이고 차자 세경(世經)은 중파(中派) 셋째 세위(世緯)는 계파(季派)로 각각 나뉘어 소파조(小派祖) 각기 번창하였다. 삼형제 모두 뛰어난 학자로 지역의 문풍을 일으켰으며 이중 차남세경(世經)은우암송선생의제자로각별한관계를유지 한다. 우암 선생의 유배지까지 찾아다니며 스승의 예를 다하 였고,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서거한 스승에 대한 예를 다했다. 그리고 우암 선생 사후 4년 후인 1693년 정읍에 노양서원(魯 陽書院)을 세우고 선생의 높은 학덕을 기렸다. 이후 노양서원 에는현암박재선생과그의아들두남박세경을추배했다. 이후현암문중의후손들은누대에걸쳐고위직을이어왔으 며 행산공 17세손 두원(斗元-戶判公)의 손자이면서 현암공 9세손인 창암 만환(蒼岩 晩煥,字.景瑞 西紀1849~1926年, 父 -원휴 原休)의 子이며 행산공 19세손)공(公)께서는 간재 전 우,연재 송병선,심석 송병순,우당 김용승,지은 최전구 등 교 우와 종유하여 학문과 도의가 세상에 추앙하는바 되었고, 과 거시험(西紀1881年,(32세)을 거쳐 통정대부 의금부도사 행 삼례도찰방(西紀1886~1890年, 37세~41세)직을 역임하시고 영광군수직을 명받았으나 사양하시고 낙향 54세에 영주정사 (瀛州精舍-西紀1903年)와 60세에 영양사(瀛陽祠-西紀1909 年)를 創建하여 영주정사에 고서 일만권 및 고서목판을 보유 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冊을 發刊하여 無料支給 學習 하였 음) 영양사에는 기자 및 중국의 오성(五聖-孔夫子,孟子,曾子, 顔子,子思) 육현(六賢-程伊川,程明道,邵康節,周濂溪,朱子,張 橫渠)의 초상영정(人物畵家崔容辛作品)을봉안한사당으로 향사하였다. 영주정사(사진)및 영양사는 대한민국 문화재관리청 제212 호로 등록된 문화재이고 서기2008年 영양사는 1차보 수 하였 으며 간재 전우 ,연재 송병선,심석 송병순 석촌 윤용우 등 유 학자의 친필현판 이 판각보존 되고 있으며, 위 선생들의 친필 서찰및현판원본(瀛州精舍百千齋淸諷軒瀛楊祠)또는존화 계첩(尊華契帖-艮齋 外 儒學者265名의 名簿), 간재선생의 함 훈재강회도(銜訓齋講繪圖)삼례도체등중기(參禮道遞登重記 -引受引繼書) 영주정사상량문(田艮齋 書) 여사서언해(女四 書諺解) 도청집(陶請集) 주역 대학 중용 서전 기타 많은 자 료를 杏山公 21세손 송하 용호(松下 龍鎬)의 차자 창운 박 철 (蒼 雲 朴 哲 ) 이 소 장 관 리 하 고 있 다 . 창암 박만환 선생의 아들 금둔(金遯)박승규(朴升奎,1894~ 1925)는 일제강점기 독립자금(獨立資金) 지원(志願)과 구파 (鷗波) 백정기(白貞基) 선생에게 육혈포(권총)와 실탄(實 彈 )을 구 입 (購 入 )하 여 주 셨 으 며 수 배 중 피 신 처 (避 身 處 )제 공 (提供)과 도피(逃避)알선(斡旋)또는 인맥연결(人脈連結)을 하며 국권회복운동에 몸 바쳤고, 승동학교를 세웠다. 손자 송 하(松下) 박용호(朴龍鎬, 1918~2002)는 現,정일초등학교 설 립추진위원장으로 학교부지를 기증하여 설립하는 등 3대에 걸쳐 국권상실의 위기 속에서 유학의 정통을 지키려는 움직 임이강했고후학양성(後學養成)에크게 기여했다. 현암문중의 회장을 역임하고 현 정읍시종친회장을 맡고 있 는 박광의 현종은 군에서 예편후 종사에 뛰어들어 종중의 기 둥역할을하고있다. 노양서원은 우 암(尤菴) 송시열 ( 宋 時 烈 ) 선 생 이 숙종(肅宗) 15년 (1689년)에 정읍 에서 사약(賜藥) 으로 사사(賜死) 한후 숙종(肅宗) 19년(1693년)에 고암서원(考巖書院)을 창건하여 175년간 향사(享祀)하여 오 던중 고종(高宗)5년(1868년)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 령(書院撤廢令)으로 당초의 사우(祠宇) 및 서원(書院)이 철 폐되었다. 철폐된지 85년후인 1953년에 유림(儒林)들의 발의추진(發 議推進)으로 성균관(成均館)과 호남(湖南)의 향교(鄕校)들 의 결집(結集)하여 서원(書院)을 창건하고 우암(尤菴) 송시 열(宋時烈)선생을 주벽(主壁)으로 위패(位牌)와 영정(影幀) 을, 두남(斗南) 박세경(朴世經)선생을 배향(配享)으로 위패 (位牌)를 봉안하여 노양서원(魯陽書院)이라 하고 매년 음력 (陰曆)3월1일에 향사(享祀) 하여오다가 2002년에 유림(儒 林)들의 발의로 성균관(成均館)을 비롯하여 호남사대향교 (湖南四大鄕校)와 全羅北道 24개 향교(鄕校)의 협의로 현암 공(玄巖公)박 재(朴 載)선생을 추배향(推配享)으로 위패(位 牌)를봉안(奉安)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영주정사는 서 기 1 9 0 3 년 건 립 (建立)하고 찰방 박만환 선생에 의 해건립되었다.고 책(古冊) 일만권 서 ( 一 萬 卷 書 ) 와 고책목판(古冊木 板)등을 소장(所 藏)하고 문소(聞韶) 김형재(金衡載, 1843-?)선생에게 영주 정사(瀛洲精舍) 운영권(運營權)을 주고 학감(學監)을 응원 (應元) 고인주(高鱗柱 1873-1927)선생으로 하고 매년(每年) 운영비(運營費)로 삼백석(參百石)을 자비출연(自費出捐)하 여 학동(學童)들에게 지·필·묵(紙븡筆·墨)은 물론 숙식(宿食) 도 무료제공(無料提供) 하게하여 후학양성(後學養成)하던 곳이다. 특히 영주정사 강당은 주거형 평면을 도입하여 난방 의 효율성과 공간이용의 합리성을 추구하여 근대기 한옥(韓 屋)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건축사적(建築史的) 역사적 (歷史的)가치가있는곳이다. 간재(艮齋)전 우(田 愚 1841-1922)선생께서 1902년10월-1 908년10월(약6년간) 거숙(居宿)하시며 영주정사기문(瀛洲 精舍記文)과 상량문(上樑文) 그리고 영주정사(瀛洲精舍) 백 천재(百千齋) 청풍헌(淸風軒)등의 친필(親筆) 현판(懸板)과 심석(心石)송병순(宋秉珣1839-1912)선생의 백천재기문(百 千齋記文)과 석촌(石邨)윤용구(尹用求1853-1939)선생의 봉 서루(鳳棲樓) 재월정(齋月亭) 영향정(永香亭)친필과 병암 (丙菴)김준영(金駿榮 1842-)선생의 영주정사기문(瀛洲精舍 記文)등판각(版刻)이현존하고있다,(원본소장) 서기1910년 한일합방후(韓日合邦後)서기1916년부터 학동 (學童)의수가 점차감소(漸次減少) 하여 서기1955년 까지는 그래도명맥(命脈)을이였다고한다, 1972년 창암(蒼巖) 박만환(朴晩煥)의 차손자(次孫子) 송 하(松下) 박용호(朴龍鎬1918-2002)께서 유지관리(維持管理) 가 어려워지자 일만권서(一萬券書)의 고책(古冊)과 목판(木 板)등을 서울大學校 규장각(奎章閣)에 기증(寄贈) 사료연구 (史料硏究)케하여현존되고있다,(서울대학교규장각소장) 영주정사에서 수학한 인물을 보면 일여 박승규(朴升奎 유 학자븡독립운동) 가인 김병로(金炳魯 초대 대법원장) 근촌 백 관수(白寬洙 독립운동가븡전국회의원) 현곡 유영선(柳永善 유학자) 인촌 김성수(金性洙 고려대학교븡동아일보 설립자븡2 대부통령) 수당 김년수(金秊洙 삼양사 설립자) 응원 고인주 (高鱗柱 유학자,독립운동) 운재 고응중(高應中 유학자) 치관 박봉규(朴鳳奎 유학자) 익중 김기홍(金基弘 유학자븡독립운 동) 구파 백정기(白貞基 독립운동가,의사) 민식 최동규(崔東 奎 유학자.독립운동) 자천 박방원(朴方源 유학자) 양재 권순 명(權純命 유학자) 삼농 한성수(韓誠洙 유학자븡독립운동) 고재일(高在一 유학자) 라용균(羅容均 보사부장관,국회부의 장) 윤재술(尹載述 국회부의장)先生 외 一百三十(130)여명 등우리나라를이끌어가는명현들이줄줄이다. 함 훈 재 ( 銜 訓 齋)는 정읍시 두 승산(斗升山 해발 443) 동남부 중턱 의 천암동(天巖 洞) 밀성박씨(密 城朴氏) 행산공파 (杏山公派) 현암 문 중 ( 玄 巖 門 中 ) 의 선산(先山)에 있는 제각(祭閣)으로 심산수려(深山秀麗) 하고 정읍시가(井邑市街)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광(風 光 )이 좋 은 곳 에 위 치 하 고 있 다 , 두승산(斗升山)은 옛 이름이 영주산(瀛洲山)이며 부안군 의 변산(邊山)과 고창군의 방장산(方丈山)과 더불어 호남(湖 南)의 삼신산(三神山 < 神仙이 산다는 瀛山 >)으로 일컬어왔 으며 두승산(斗升山)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고부(古阜)도 옛 이름이 영주(瀛洲)이다. 과거에는 학문(學文)을 닦는 서당 (書堂) 역활도 하였으며 대학자이신 간재(艮齋) 전 우(田 愚 1841-1922)선생께서후학을강학(講學)하던곳이기도하다, 전간재(田艮齋)선생의 함훈재(銜訓齋)와 함훈재기문(銜 訓齋記文)이 친필현판(親筆懸板)이 현존하며 선생께서 후학 (後學)들에게 강학(講學)하시는 모습을 그린그림으로 영주 함훈재강회도(瀛洲銜訓齋講會圖 1904년5월작)가 현존하고 있다.(원본박철소장) 효자정문(孝子 旌門)은 현암공 (玄巖公) 박 재 (朴 載)선생의 7 世로 박두원(朴斗 元 1789-1873)선 생의 효행 정려이 다.창암(蒼菴)박 만 환 ( 朴 晩 煥 ) 의 조부(祖父)로서 근검순실(勤儉純實)하고 효행독후(孝行篤 厚)하여 암행어사(暗行御史) 심상학(沈相學 1845-?)선생이 장계상소(狀啓上疏)하여 사후(死後) 고종 정해년(서기1887 년) 효자정문(孝子旌門)의 명려(命閭)를 받아 정문(旌門)을 세우게 되었고, 증 가의대부(嘉儀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 요,증직(贈職)자헌대부(資憲大夫)호조판서(戶曹判書)이다. 현암다원(玄岩茶園)은 밀성박씨(密城朴氏) 행산공파(杏 山公派) 현암문중(玄巖門中)에서 井邑 두승산(斗升山) 동남 부 자락 일원 함훈재(銜訓齋) 아래 선산(先山)에 2004년부터 정부보조와 자부담금으로 조성한 다원(茶園)으로서 산을 개 간하여 식재한 면적이 7㏊(21.000평)과 산을 개간하지 않고 임간식재(林間植栽)한 면적이 10㏊(30.000평)으로 전체합계 17㏊(51,000여평)이며 녹차가공공장을 보유하고 녹차를 생 산,판매하고있다, 정읍지역은 녹차나무 생육의 최북방한계로서 녹차의 품질 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500여년 전(前)부터 이지역에서녹차를생산하여임금에게진상한기록이있다, 전통적으로생산하여왔던덖음녹차뿐만아니라녹차와관 련된 여러 가지 제품개발하고 생산하여 상품시장에 공급할 계획하고 있으며, 이 지역은 井邑 시가지에서 3㎞ 정도의 거 리로서 녹차 체험학습장과 시민 휴식공간을 마련하고 더 나 아가 井邑 사계절관광 사업과 더불어 야생화단지 조성과 등 산로가 개설되어 시민들의 힐링의 공간이다. 특히 현재 현암 다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봉호 현암문중 회장은 지난해 대한 민국 차(茶) 품평회에서 발효차부문 대상을 수상한바 있다. 녹차 외에도 직접 생산한 직두콩, 우엉차 등도 일품이다.(063 -532-1956) 뱚집성촌 탐방 전북정읍시현암마을(밀성박씨행산 공파) 현암마을은 행정구역상 전북 정읍시 흑암동으 로 상흑과 하흑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후기 성 리학자 우암 송시열선생의영향으로 문풍을 크 게일으켰으며일제강점기에는호남인재의산 실이자 민족교육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여온 영 주정사가 있다.이렇듯 밀성박씨 행산공후예들 은 입향 이후 정읍지역의토호성씨고 자리하고 있어찾아가본다. 입향약사(略史) 세천비-마을입구도로변에세워졌다. 거먹바위유래 현남마을의후손들 선대의유적 노양서원 △노양서원(魯陽書院) △영주정사(瀛洲精舍) 영주정사 △함훈재(銜訓齋) 함훈재 △효자정문(孝子旌門) △현암다원(玄岩茶園) 다원에서 박봉호 회장이 박광희 전 회장에게 발효차를 따르고 있다. 현암 다원은지난해대한민국차품평회에서발효차부문대상을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