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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8월31일 화요일 6 (제176호) 특집 밀성박씨충간공파인터넷족보 및족보편찬공고 밀성박씨충간공파대종회는2020년11월15일(음10.1.)정기총회시 족보편찬결의에따라다음과같이세보편찬을추진중에있어 공고하오니종원여러분의관심과성원으로역사에길이남을훌륭한 족보를만들수있도록성원바랍니다. ☆수단접수기간:2021.7.1.~2021.12.31. ☆수단기준및작성요령:세보편찬위원회문의바랍니다.뱚뱚 ☆반 질 :2023년상반기예정 ☆ 수단 접수처 : 수단 유사 명단 참조 -편찬위원회- △고문 박병립 010-3272-3283,박상규 010-3818-3132,박종환 010-2688-3262,박기상 010-3455-7004. △대종회장(위원장)박원환 010-9037-8000 △도유사 박재윤 010-8703-4615 사무실 fax054-652-4615 △부위원장 박형경(고령) 010-3526-8701 박종배(예천) 010-5371-5655 박종보(예천)010-8927-0279 박종 호(고 창)010-3611-5733 △수단유사(편찬위원) ▲박하경(고령)010-3803-4821 ▲박동진(대구) 010-4358-4085 ▲박재희(고령)0 10-3549 -9889 ▲박규돈(고령)010-8579-7042 ▲박일호(예천)010-9505-1551 ▲박규환(예천)010-5219-6296 ▲박 석태(예 천)010-2804-6320 ▲박휘식(예천)010-9898-7411 ▲박수환(안동)010-7545-8747 ▲박용운(충북단양)010- 3419-16 61 ▲박기환(영주 풍기)010-6372-4357 ▲박익환(예천)010-7534-4141 ▲박윤환(서울)010-8949-9460 ▲박 차환(대 구)011-510-2710 ▲박재석(문경)010-2504-8453 ▲박연수(예천)010-8592-3144 ▲박춘기(고창) ▲박이규 (고창)0 10-9453-3238▲박세근(고창)010-3625-5087▲박이기(고창)010-3638-1204 △감사 박원재(예천)010-9355-3509 박생경(고령)010-8579-7042 ※구독자님주변에혹충간공후예를알고계신분은이를적극알려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밀성박씨충간공파족보편찬위원회위원장박원환뱚 평산사는 민재 박임상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후손과 제 자들이모현지성(慕賢之誠)을발휘하여건립한사우이다. 이 사당은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 민재 박임상 등 3명의 유학자를 모신 사우이다. 민재 박임상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제자 수십명을 규합하여 최익현 의진에 참여하였으나 최익현 이 대마도로 잡혀가 순국하자 심상3년(心喪三年, 마음속으로 복을 입는 것)을 마치고 이 나라 선비의 맥을 이어야겠다는 생 각으로 중암 김평묵 선생의 유배지였던 지도 두류(智島頭流) 에 단 (壇 )을 세 우 고 이 항 로 , 기 정 진 , 김 평 묵 , 최 익 현 등 네 스 승 의위패를봉안하고제사를받들게하였다. 그 후 최익현과 기우만 선생의 사우를 건립하고자 부지를 다 듬다가 일본경찰에게 발각 되어 뜻을 못 이루고 1944년 그 아 들 현풍에게 두 선생의 사우를 꼭 세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조 국광복을못본채사망하였다. 이에 박임상의 제자들과 자손이 합심하여 평산사를 건립하 고 최익현·기우만 두 분 선생을 봉안하고 2년후 민재 박공을 추배하여 도내 유림이 음력 3월 10일 제사를 받들고 있으며,국 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물 제53-1-4호, 무안군 향토문화유산 제9호로 지정되어 광복절을 맞은 8월의 현충시설물로서 소개 해본다. 평산사는 민재 박임상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제자들과 후손들이 합심하여 세운 사우이다.민재 선생은 면암 최익현(1 833~1907) 선생과 송사 기우만(1846~1916) 선생의 고족제자 (高足弟子, 학식과 품행이 뛰아나는 제자)로 무안지방에 문풍 을 일으킨 성리학자의 한분으로 사숙(私塾)인 계산재(溪山 齋)에서 50여년을 강학하면서 면암·송사 양 선생의 우국충절 과 도학정신을 흠모(欽慕)하고,두 스승의 혼(魂)을 받들고자 사우(祠宇)를 건립하려고 여러 동지(同志)와 모의(謀議)하여 사우(祠宇)의 부지까지 마련하였으나 일제의 강압(强壓)에 의하여 부득이 뜻을 성취하지 못하고, 사실(私室, 개인의 방) 벽함(壁函)에 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삭망봉향(朔望奉香) 을 하시다가 8·15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甲申) 겨울에 사우 건립의 한(限)을 머금은 체 그 아들 현풍(炫豊)과 문제자(門 弟子)들에게 뒷날 기심(期心)코 두 스승의 사우를 건립하여 현충사모(賢忠思慕)정신(精神)을고양(高揚)하라는유언(遺 言)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하니 그 아들 현풍과 문인들이 사우 건립의 기회를 마련해 고심(苦心)하던 찰나(刹那)에 하늘이 우리를 도우사 일제가 패망하고 이 땅에 해방이 오니 웅크려 못펴던뜻을풀게되었던것이다. 매일같이 구수상합(鳩首相合) 하던 이 지방 유림들이 마침 내 丙戌年인 1946년에 이 집을 완성하고 면암 최익현 선생을 봉안하였고,그 익년(翌年)에 송사 기우만 선생을 봉안하여 제 향을 받들어 오다가 1949년에 사론(士論)에 의하여 민재 선생 을추배하여오늘에이르고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풍마우습(風磨雨濕)으로 기와와 기둥 이 헐어 오래 보존키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중수지책(重修之 策)을 도모하던 중 다행이도 김재웅 군수께서 본 사우 봉심(奉 審)차오시어충신의사우가피폐(疲弊)된것을안타까이여기 고 군비 200만원을 지원하면서 유림 공동책임으로 이 사우를 오래 보존하라는 격려에 의하여 많은 유림이 감동하고 흔연(欣 然)참여(參與)하여300여만원이모금됨과동시에마을주민들 이 몇 일 간씩 노역(勞役)을 제공함으로써 1981년 10월에 중건 역사를 완료하고 동월 11일에 준공식을 가짐으로써 삼선생의 영령(英靈)에게미안(未安)을덜게된것이천만다행이다. 평산사의 제향 진설은 4변4두이고, 무안향교에서 매년 주관 하고있으며도유사는노강박래호선생이다. 平山이란마을이름의유래는두가지가있다. 하나는마을에높은산이 없고 평평한 들판에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平山이라 했다는 설과, 또하나는현재의무안 박씨, 영성정씨가들어오기전에평산신씨가살았 다 해서 평산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실지로 예전에는 마을 주변에 고총이 많이 있었다. 전해오는이야기로는그 고총의일부분이 평산신씨묘였다고한다. 마 을입구에들어서면다른마을에서는느낄수없는조심스러운분위기가느 껴진다. 풍수상으로도 좋은 기운이 넘친다. 마을의 형상이 면소재지 쪽에 서보면마치학(鶴)이 날개를펴고비상하려는형국이어서인지다른마을 에 비해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서삼석 전 군수가 이곳 태생 이고박석무전국회의원(민재선생손자)이 또한 이곳출신이다. 마을의 유래를 전해주는 어르신의 말은 무안의 일류마을이곧 ‘평산’이 라고 하는데주저함이 없다.이 마을에서유독 인물이 많이 배출된이유는 풍수적인이유도있지만 마을을이루고있는두가문즉무안박씨와영성정 씨의혜안에서비롯된다. 두가문은후학들을위하여마을에서당을설치할 것을 협의한 뒤 1888년 공부방인 계산재를 세웠던 것이다. 하여 주변의 유 명한 스승을 초빙하여 주민들을 가르치게 하였던 것이다. 이 공부방 출신 들이 박임상 박석무 정득규 등이다. 또한 무안의 主山이라 일컫는 감방산 의맥이 팔바우를통해이 마을에닿고있으며마을앞을흐르고있는구곡천 의 물길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기류를 형성하고있다. 특히 주민들은 마을 뒤에있는8바위[八巖]의영험스러움이 마을에미치고있다고믿고있다.예 로부터마을에놓여있는큰바위는그냥바위로 보지않고큰산으로 보았 다. 해서8개의큰산이 마을을받치고있어큰인물이 날 수밖에없다고한 다. 실지로 마을에서 현화리로 넘어가는 팔바위등이라는 능선에는 이중개 석과 판석의 석실구조가 있는 지석묘를 비롯하여 대소 13개의 지석묘가 타원형을이루고있다.가장큰돌은길이가6미터가넘는것도있다. 이 마을의 무안박씨 입향조는 박동식(1648-1687. 자-文甫, 호-新齋)과 박동후(1668-1709. 자-益初, 호-敬軒)이다. 신재공은 절암 박정의 손자로 서 청계면 도림리 대암동에서 평산으로 이주했다. 신재공은 여러 경서를 강습하고 격물치지의 학문에진력하였다. 팔바윗등 아래 터를 잡으면서 호 도 암은거사(岩隱居士)라 이름 하였다. 경헌공도 절암공의 손자로서 일로 읍 상신기리에서 이곳 평산으로 이주하였다. 후손으로 민재 박임상과 박 석무전국회의원이 있다.신재공과 경헌공은사촌간이다. 평천정사는 평산사 경내에 있으며, 민재 선생이 일본의 감시 때문에 스승을 위한 사당은 짓지 못하고 대신 노년을 의미 있 게 보내려고 지은 것 이다. 1943년 80세에 지은 것으로 당시에는 사방이 마루이고 중앙에 방이 있어 사시사철 어느 때나 거처하게 했으나 1969년 증축하면서현재의모습으로바뀌어졌다. 크기는 정면 4칸의 측면 2칸 팔작지붕 기와형으로 양호하게 보존되어 오고 있다. 정사를 지은 민재공이 지은 평천정사 원 운에서정사를지은그의미가잘나타나있어소개해본다. 평천일대수(平川一帶水)평천한줄기물이 곡곡포산류(曲曲抱山流)굽이굽이산을안고감도네 유애무허루(惟愛無虛累)오직티없이맑음을사랑해서 기정팔십추(起亭八十秋)80당년에정자를지었네 민재 박임상(朴琳相, 1864-1944) 선 생은 높은 절의정신의 대표적인 인물 애한정(愛閑亭) 박익경(朴益卿)의 13 대손으로 다산 연구소 박석무 이사장 의조부이다. 자는 유옥(孺玉), 호는 민재(敏齋), 본관은 무안으로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 본재에서 1864년(고종1년)에 태어났으며 기준(淇準)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자적 풍모를 가진 조선말 대 유학자로 1960년 양 회갑(梁會甲)선생이지은비명을인용하여더알아본다. 수직으로 동추(同樞)에 오른 북암공(北巖公)휘 기준(淇準) 과 어머니 김해김씨와의 사이에서 홍릉(洪陵) 갑자년(1864) 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성인의 태도[儀度]가 있어 여느 아이들과 놀지 않고, 부모장자(父母長者) 곁에 있으면서 바른 일을 익히고 행하였다. 븮소학(小學)븯을 읽다가 옛사람의 효우 (孝友)한 행실에 이르러서는 반복해서 이해[理會]하고 말하 기를,“이 같이 한 후에 사람이라 할 수 있다.”하였다.북암공이 고질[貞疾]이 있어 심히 빈한하였는데,공이 신을 삼고 땔감을 팔아약을올렸다. 남은 힘으로 책을 읽으니,북암공이 말하기를,“너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니, 내 병이 나을 것 같다.”하고, 순순히 인사에 마 땅히 행할 바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귀함은 학문에 있 고,학문의 귀함은 성숙함에 있다.”하였다.공이 받아들여 회간 (懷簡)으로 삼고, 매번 족숙(族叔) 죽포공(竹圃公)에게 질의 하여 지극한 뜻을 계발(啓發)하여 약관[勝冠]에 문필이 찬란 하였다. 언젠가 과거시험장[場屋]에 들어갔다가 산외(山外)의 족제 (族弟)인 교관(敎官) 순오(舜五)를 만났는데, 서울로 오기를 청하며, “권세가[權要]를 한번 만나보면 청자(靑紫 벼슬)를 쉽게 챙길 수 있다.”하였다. 공이 답하기를, “애걸하여 재물을 얻는 것도 배알이 있는 자라면 부끄러워하는 바이거늘,하물며 명(命)이있음에랴.어찌인력으로이룰수있겠는가.”하였다. 그때에 중옹[重菴]이 척화(斥和)사건으로 지도(智島)에 귀 양 왔는데,따르는 학도들이 심히 많았다.공이 ‘위기지학(爲己 之學)으로 내면을 윤택하게 하리라.’하고,가서 제자의 열에 참 여하여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을 받아들여 실력[腹 솎]을 확충하느라 추위과 배고픔이 몸에 파고드는 것도 문득 잊었다. 안방(安放: 선생의 죽음)을 당해서는 수마적(受麻籍)에 기록 되었다. 예물[禮贄]을 가지고 가서 면옹[勉庵]을 뵈었는데, 뜻이 있 는 선비라 인가[許]해주었다. 븮인심도심정일심법(人心道心精 一心法)븯이라는 글귀를 써 주고, 다시 븮민(敏)븯 이라는 한 글자 의부적(符籍)을주었다. 이어 송옹[松沙 기우만]을 뵈었는데, 송옹이 남녘의 외우 (畏友)라 칭하며 말하기를, “‘민(敏)’을 처신하는 요체로 삼아 야 하네. 면옹이 자신으로부터 체득한 것을 고한 것이니, 그대 는 가슴에 새겨 게을리 말게.”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옛적에 예장(豫章)이 양귀산(楊山)에게 배울 적에 ‘불우하다고 이렇 게일생을헛되이보내랴!’하였는데,오늘날저도 제선생께그 리한다”하였다. 또한 용계(龍溪) 류기일(柳基一), 손지(遜志) 홍재구(洪在 龜),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 제현과 도의를 강마(講磨)하고 훈화(薰化)에 심취하니, 사귐 을 후조(後彫)로써 기하는 이들이 이르러 동학란(東學亂 189 4)에도흔들리지아니하였다. 을미국변(乙未國變)에 송옹이 거의(擧義)하여 토복(討復) 할 때에 공이 몇 사람의 동지들과 회소로 달려가 들으니,“원수 는 한 하늘을 함께 받들 수 없다. 차라리 머리카락을 보존하여 죽을지언정 머리카락을 훼상하여 사는 것은 불가하니, 대의 (大義)에 당당하리라.”하였다. (고종황제가 의병을 파하라는) 선유(宣諭)를 내리자, 발이 부르트도록 달려가 송옹을 문안하 였다. 을사위약(乙巳僞約)이 체결됨에 면옹이 의병을 일으키니, 공이 궐리(闕里)의 회소(會所)로 달려가 참여하였다. 대마도 에서 반친 할 때에 공이 제문으로 전(奠)을 올려 태산이 무너 지는 고통과 나라에 대한 근심을 달래며 심상복(心喪服)을 입 었다. 상(喪)을 마치고,이로부터 계산(溪山)에 자취를 숨기니,좇 는 학도들이 문에 가득하였다. 증세에 따라 처방을 내려 말하 기를, “‘옥중에서 상서(尙書)를 읽고 배안에서 대학(大學)을 공부한다.’하니, 지금이 그때이다. 어찌 세상이 어지럽다하여 오랑캐가 되랴.”하였다. 매일 머리를 빗고 아관(峨冠)과 활수 (闊袖)로써 맑은 창 아래 책상에서 정주(程朱)와 우리 동방 현 인의성리서(性理書)를읽기를고기를즐기는것 같이하였다 경술년(1910)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자 문을 닫아걸어 손님 을 사절하고, 매일 풍천(風泉), 서리(黍離)를 읊조리니, 흐르 는눈물이옷깃을적셨다. 신해년(1911)과 임자년(1912)에 연달아 부모상을 당하였다. 격식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며 고기와 술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 였다. 복(服)을 마치고도 오히려 무덤에 올라 곡하였으며, 제 삿날에는 즐기시던 것을 올렸다. 두 아우와 기꺼이 정을 나누 며 잠자리를 함께하고,위선(爲先)을 지극 정성으로 하여 행적 (行蹟)을기술하며,비석에새겨무덤을꾸몄다. 사우(社友)들과 함께 춘추 회강(會講)에서 남전향약(藍田 鄕約)과 백록동규약(白鹿洞規約)으로 퇴속(頹俗)을 풍려(風 勵)하니, 송옹이 이르기를, “면산(綿山) 백리에 사문(斯文)의 한줄기 양맥(陽脈)이 있다.”하였다. 선생이 역책하자 채식을 하고 가마복(加麻服)을 입었으며, 현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정 과 예 를 두 루 극 진 히 하 였 다 . 학자들이 말하기를, “나이와 덕행이 있는 선배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가니, 성리(性理)의 본원(本源)을 밝히는 공부를 청한다.”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허다한 경전이 성리의 심오 한 것이 아님이 없으니, 숙독하여 정밀히 생각하면 분명히 깨 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구이(口耳)로써 남을 이기는 데에 만 힘써 말한다면 말이 비록 옳더라도 믿는다고 기약할 수 없 거늘, 하물며 옳다고 기약할 수 없음에야! 나는 종이에 나타내 어사람들에게보여주지않겠다.”하였다. 예(禮)를 논할 때는 선유(先儒)의 정설(定說)에 근거하여 질문에 따라 답하고, 책에 드러나지 않은 것은 경우에 맞게 참 작하여행함에잘못되었다는비난이없게하였다. 사진(寫眞)을 청하자 허락지 아니하며, “오늘날의 시의(時 宜)를 돌아보건대, 이 몸은 세상에 있지 않은 것이 가하다. 하 물며 그림자를 남겨 없어야 할 것을 있게 하겠는가?”하고, 모 두 사무사(思無邪)와 무불경(無不敬)을 조석으로 높여 우러 르게하였다. 80세에 평산(平山)과 장천(長川)사이에 정사(精舍)를 세워 “평천(平川)”이라 편액하고, 븮무이도가(武夷櫂歌)븯를 모방하 여 생을 마칠 때까지 은거하였다.갑신년(1944)동짓달 10일에 돌아가니, 장지는 사는 곳 안산의 선영[先兆] 정좌원(丁坐原) 이다.문인 중에 백건(白巾)에 수질(首 풩)을 두르고 뇌문을 올 리는 이가 수십 인이었다. 평산사(平山祠)에 추배(追配)하고, 유고(遺稿)가있어세상에간행하였다. 배(配) 하동정씨(河東鄭氏)는 무현(武鉉)의 따님으로 공보 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묘는 함평 팔왕산 묘좌(卯坐)이다. 아 들 딸 각 1 인 을 두 었 는 데 , 아 들 은 현 풍 이 고 , 딸 은 행 주 ( 幸 州 ) 기우흥(奇宇興)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4인으로 학주(學周), 용규(龍奎),승주(丞周),양규(穰奎)이며,나머지는어리다. 뱚재실탐방 무안평산사 (국가보훈처지정현충시설물제53-1-4호) 평산사전경,전남무안군현경면평산리①평산사(祠宇)②내삼문③강당(講義堂)④협문⑤외삼문⑥평천정사⑦평산사묘정비 뱚평산사연혁및중건사실 평산사제향광경,진설은4변4두이고지역유림들이 봉향(奉香)한다. 뱚사우가자리한평산(平山)마을과무안박씨 뱚평산정사(平山精舍) 뱚민재박임상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