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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8월31일 화요일 2 (제176호) 기 획 호남인재의 산실이자 민족교육의 선구자적 역할은 정읍의 영주정사(흑암동 189-2/2005년 등록문화재 제212호)와 창평 의 영학숙에서 담당했다 할 수 있다. 구학문을 대표하는 곳이 창암(蒼巖) 박만환(朴晩煥/1849~1926)이 세운 영주정사(瀛 州精舍)라면, 신학문을 대표하는 곳은 춘강(春崗) 고정주(高 鼎柱/1863~1933)가 세운 창평의 영학숙(英學塾)이었다.각각 1903년과 1906년에 세워졌으니 영주정사는 한말 국운이 쇠하 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길 조짐이 보이던 시기에 세워졌고, 영 학숙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이후에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두 학교가 민족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특히 호남지역 부호의 자제 들이 이 두 교육기관을 통하여 교유하고 인맥을 형성했으며 이들이 한국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한국교육사에서우리지역의영주정사와견주어 볼 수 있 는 곳이바로황해도안악이다.우리나라에서선구적인근대교육 이 이뤄졌다고 평가되는 이곳 황해도 안악지역은 일찍부터 신문화와 신교육이 보급된 곳이다. 안악에 설립된 ‘안악면학 회(安岳勉學會)’는 1906년 12월 1일 최광옥·최명식·송종호· 장윤근·안명근(안중근의 사촌동생) 등이 안악지역을 중심으 로교육구국과민중계몽을위해조직한교육계몽단체이다.안 악면학회는 1907년 봄 사범교육과 중등교육에 필요한 교재발 간을 위해 출판서점인 ‘면학서포’를 설립하였다. 면학서포는 안악지역 유지들이 당시 돈 300원의 기금을 마련하여 운영한 것으로 신민회가 운영한 평양의 태극서관과 같은 성격의 서 적출판보급기관이었다. 그런데 영주정사는 이보다 앞선 1903년에 세워졌고매년30 0석을 출연하여 학자금과 숙식을 무료로 제공했을 뿐만 아니 라 천여 권의 책과 출판을 위한 인쇄 목판이 보관되어 있었음 에도 그에 상응하는 학술적인 조명작업이 그간 제대로 이뤄 지지 못했다. 1906년에 근대학문 특히 영어교육을 위해 세워 진 영학숙도 마찬가지였다. 단편적이나마 지역의 향토사가들 이 관심을 가지면서 영주정사 출신 인사들의 민족운동과 그 들의 행적을 정리한 글을 발표했으나 이를 분석하거나 그 의 미를부여하지는않았다. 이에 본문에서는 영주정사의 설립과 교육이 가지는 의의를 부각시키고 구체화 시켜 보려고 한다. 이어서 설립자인 박만 환과 그의 아들 박승규의 민족운동과 교육활동에 대해 살펴 보고, 영주정사를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의 행적을 정리하려 고 한다. 다음으로 근대학문을 개척하고자 했던 창평 영학숙 의 설립자 고정주와 그의 아들 고광일의 교육활동을 서술하 고, 영학숙을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의 행적을 정리할 것이다. 이는 영주정사와 인근에서 근대학문을 익히고자 만나 공부했 던 동학들이 서로 교유하고 인맥을 형성하면서 한국 현대사 회에 큰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에서 본문 내용을 정리하고그의의를부여할것이다. 영주정사가 위치한 현암 마을(속칭 ‘검은 바우’)은 밀성박 씨(密城朴氏)행산공파(杏山公派)와 소감파(小監派)일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영주정사는 사당인 영양사와 함께 바작산을 뒤로 서남쪽[서간방]에자리하면서 두승산(斗 升山)을마주보고있다.전면은비교적넓은마당을두고전체 적으로 개방감을 주기 위해 출입문을 설치하지 않았다. 영주 정사는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 마을과 넓은 들을 한눈 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산자락 주변에는 한때 2,000그루의 전 나무가 빽빽한 숲을 이루었다고 하나 현재는 2~3그루만이 입 구에 남아 있다. 우측에는 은행나무와 염주나무가 식재된 작 은 화단이 조성되어 있다. 영주정사 아래 우측에는 학동들이 음용수로이용했을것으로보이는우물이현재남아있다. 영주정사(1903)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강당을 앞에 두고 뒤쪽 높은 곳에 사당인 영양사(瀛陽祠)를 배치하였다. 전체 구도 상 ‘二’자 형의 구조에서 뒤쪽 사당이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진 형태를 이루고 있다. 들어서면 서당 인 만큼 우선 후학들에게 당부하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이 방 에 들어오는 자,정치적인 일을 이야기하지 말 것이며,시정에 대해서도 말하지 말라. 남의 장단과 이해득실도 논하지 말며 오로지 경사(經史)와 의리(義理), 자연[산수/山水]과 길쌈 [상마/桑麻]만을이야기할따름이니라. 이는공부하는이들에게지침이되는명구로기실은주자의 경구이기도 하고,간재(艮齋)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우암(尤 庵) 송시열(宋時烈)과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출세관 (出世觀)이기도 했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면 (時事에 대해) 말하지 말라.” [身不出 言不出]는 송시열의 말과 임헌회가 김평묵(金平默) 에게 보낸 편지에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산림에 처하는 것 만 못하고, 말하는 것은 침묵하는 것만 못하다.”[出不如處 言 不如默]라는 말을 따른 것이다.또 “그 직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꾀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말과도 상통하는 말이다. (不在其位不涉其政). 영주정사는강학을위한공간으로방과대청을왼쪽과오른 쪽에 배치하여, 왼쪽 방은 스승의 거처와 휴식 공간으로 사용 하고, 오른쪽 대청은 학생과 스승이 강학과 토론을 하는 교육 장으로 사용하였다. 다만 추운 겨울이나 악천 시는 온돌방인 스승의방을강학공간으로사용하기도하였다. 영주정사 뒤쪽 사당인 영양사(1909)를 오르는 계단에는 원 래 중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진 시기를 자세히 알 수 없 다. 영양사 기단에는 1.5m 높이에 공경할 ‘경(敬)’자를 새긴 판석을 왼쪽과 오른쪽에 넣어 사당을 들어가기 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삼가라’는 주의를 주고 있다. ‘경’은 성리학의 수양 론의 한 방법으로 마음에 흐트러짐이 없게 하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간재가 17세에 그의 아버지로부터 훈시로 받은 ‘성경 (誠敬)’이라는 2자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간재는 이때부터 ‘성경’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의 중심이자 학문의 종지로 삼았 다. 영양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당 안 쪽은 가벽을 설치하여 세 칸의 공간으로 나누었다. 서쪽[왼 쪽]에 기자(箕子)를, 동쪽 중앙에는 가운데에 공자(孔子)를 봉안하고,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 등 4성을 배향하면서, 동쪽[오른쪽]에는 주렴계(周濂溪)·정 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장횡거(張橫渠)·소강절(邵康 節)·주자(朱子) 등 6현을 차례로 봉안하였다. 모두 화상으로 한것이었다. 영주정사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긴 했으나 주련 일부가 도 난당했고, 대청마루 보에 걸쳐있던 용 그림도 도난당한 것을 후손들이모사본을붙였다. 뿐만이 아니다.청풍헌(靑風軒)이라는 현판과 방 아랫문 창 틀 위에 붙여 있던 백천재(百千齋) 현판도 2010년 문화재 보 수 이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모두 간재 선생이 직접 쓴 현 판이었다. 설립자인 박만환과 동문수학했던 우암의 9대손 심 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이 쓴 백천재기(百千齋記/190 6)는 편액을 떼 가려던 흔적이 역력하고,어진화가 채용신(蔡 龍臣)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양사(瀛陽祠)의 오성육현 의 초상[화상]과 영양사 현판도 도난당한 지 오래다. 12분의 화상 영정을 모신 사당은 국내는 물론 중국에도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나마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어 이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이다. 화상 영정은 후손들이 추후 복원할 계 획이다. 후손과 당국이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주정 사의 가치를 알기 전에 이미 도난당한 것이다.다행인 것은 영 주정사의 현판과 원본 글씨가 간재 전우의 글씨로 남아 있어 그 가치가 더욱 크다. 글자 아래쪽에 화돈(華遯)이라는 전우 의 별호가 쓰여 있다. 화돈은 간재가 계화도(繼華島)에 은둔 할때사용한호이다. 박만환은매년3,500석을소작료로받는천석꾼으로본관이 밀양, 자 경서(景瑞), 호가 창암(蒼巖)이다. 원휴(源休)의 아 들로 고부 흑암동에서 출생했다.10세 때에 추사 김정희(金正 喜)와 창암 이삼만(李三晩)의 서체를 익히고 충남 아산의 전 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유학하며 간재 전우와 동문수학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관련된 글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후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과거를 거쳐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고 삼례도찰방(參禮道察訪)에 이어영광군수를제수받았으나사양하고낙향하였다.박만환 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도 한때 종유하였으며, 만년 에는 향리에 영양사(瀛陽祠)를 세워 오성육현(六聖五賢)을 봉안하고후진을양성했다.학동들에게지필묵과숙식을무료 로제공하고매년운영자금으로300석을 출연하였다. 1903년 내장사 유림대회에 참여했으나 서명은 하지 않았다. 이는 일제에 대한 투쟁 방법을 학문에서 찾았던 간재 전우의 영향도있었을것이다. 사당인영양사와서당인영주정사의다락방그리고박만환 의 사랑채에는 책 천권과 인쇄 목판이 나누어 보관되어 있었 다(븮호남지븯(湖南誌)).그가 출판한 서적으로 오현[조광조·이 이·이황·김장생·송시열]의 명언을 발췌한 븮오현수언븯(五賢粹 言)/1905과 븮여사서언해븯(女四書諺解)/1907 그리고 븮사례축 식븯(四禮祝式)/1907등이 남아 있다. 밀양박씨 재실[동학로 155-211]로 사용되고 있는 영주산 아래 함훈재(銜訓齋/1904)에는 간재 선생의 현판, 함훈재기, 주련 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다. 간재는 이곳에서 을사오적을 처단하는상소문을작성한것으로전해진다. 간재의 강회(講會)가 있는 날에는 근동에 유학자 1,000여 명이운집하는바람에일제의감시의눈이매서웠다고한다. 간재는 세간에 나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방법과 능 력이 없다면 차라리 세간을 등지고 고요히 숨어 잃어가는 사 문(斯文/유교를 지칭하는 말)을 전수시키는 것이 옳다고 믿 었다. 이 때문에 후세에 지탄을 많이 받았으나 석학으로서 그 의 명성은 이같이 대단했다. 간재가 강학하던 당시의 모습을 그린 영주함훈재강회도(瀛州銜訓齋講會圖/1904)가 현재 남 아 있다.(증손 박철 소장) 간재의 제자 중 훈재 김종희, 양재 권순명과 함께 세 개의 돌기둥이라는 뜻의 ‘삼주석(三柱石)’ 으로 일컬었던 현곡 유영선이 1925년(33세)에 여성윤리 교재 로 븮규범요감븯(閨範要鑑)을 지어 어린 딸을 훈계하고자 했던 것도 스승인 간재와 박만환의 교육활동에 영향을 받은바 컸 을 것이다. 박만환의 스승이었던 연재 송병선은 븮염재야록 븯(念齋野錄)을 쓴 조희제의 스승이기도 했다. 박만환은 을사 늑약이 체결되자 여러 번 자진할 것을 고민했다고 한다. 연재 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나라를 잃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 독자결하였다.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자 박승규(朴升圭)는 영주 정사(瀛州精舍)에서 공부하던 11명의 지사들과 함께 공평동 에 있는이심정(怡心亭)에 모여망국제를지냈다.1919년에는 용계동 용계 마을에 ‘승동간이학교’를 설립하고 신학문을 교 육하였다. 1923년 9월 23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를 참고하면 다음과같다. 전북 정읍군소성면용계리사립승동학교(升東學校)는3년전해면(亥 面) 해리(亥里)에 박승규(朴升奎) 씨가 설립하고 청년을 양성하던 바 금년 춘기(春期)에지(至)하여는경비관계로 비분(悲憤)에함(陷)하였든바금 반 박승규 씨는 종래 가사로 인하여 학교사(學校事)를 등한히 하였으나 금후는일층학교 사무에전력하기로 하고, 음력8월추석후는개교하기 로 하였는데교명은영동학교(永東學校)로 개칭하기로 하였더라. 한때재정문제로학교운영에어려움이있었으나다시운영 비를 마련하여 새 출발 한다는 의미에서 학교 이름도 승동학 교에서영동학교로이름을바꾸고재정비한다는내용이다.그 런데 1923년 10월 12일 자에는 영동학교에서 영주소년단 후 원으로소인극(素人劇)을10일부터12일까지3일간공연했다 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영동학교를 고부를 뜻하는 영주(瀛州) 의 ‘영(瀛)’자로 보도하고 있다. 얼핏 보면 영동학교(永東學 校)는 영동학교(瀛東學校)의 오기였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하다.하지만그해10월21일자에는승동학교가영동학교로 개명한다는 것은 풍문이었다는 기사가 다시 실림으로써 학교 명칭에변동이없음을확인해주고있다. 전북 정읍군소성면용계리에서는3년전부터사립승동학교를설립하 고이래교육에노력하든바설립이래경비문제로 다대한 곤란을받게되 어 필경 폐교의 비운에 조(遭)케 되었는데 금월 상순에 해면 흑암리에 박 승규씨가해교에내방하여 명예교수로 있는곽영동(郭永洞/필자 주: 郭 永河)씨와협의한 후학교 비용을전부 자담하고교실을수선중이며,일 편(一便)으로는 원방(遠方)에서 통학하는 학생을 위하여 기숙사를 건설 중임으로 학생들은물론 일반학부형과 청년들까지박씨의교육열을칭 송하 지 않 을 수 없다 하 며 교 실과 기숙사는 불 일간 준공되리라 하 더라. 박승규는이러한신학문을보급하는것외에도동학인백정 기에게육혈포[권총]를사주고자기집사랑채에식객으로위 장하여 기거케 하였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면 다락이나 이 웃 박씨 문중 재각에 숨겨주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1925년 3 월 14일 오후 1시에 서울 다옥정 54번지에서 갑자기 사망하였 다.박철의 증언에 의하면 탐문 결과 다옥정은 당시 요정집 명 월관이었다.독립운동하던인사들이비밀리에회합을갖기위 해 이러한 고급 요리집을 이용했다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일 이다. 주변에 있던 3~4인의 시신은 박승규와 뜻을 같이 하던 독립운동인사였을것으로추정하고있다. 영주정사를거쳐 간양반자제들이무려 130여 명에 이른다. 1년에 300석을 출연하여 기숙을 제공하는 이곳에 많은 사람 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줄지어 기다렸을 정도라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는 박만환의 남다른 민족의식과 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 문에가능한일이었지만간재(艮齋)의가르침을받기위한일 반인의 열망도 컸을 것이다. 간재는 비록 벼슬에 나아(出仕) 가지는 않았으나 일찍부터 여러 관직이 제수되었고, 후에 산 림직(山林職)이 제수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력과 비례하여 그는 유명인과 교유의 폭이 확대 되면서, 당대 기호학파는 물론 전국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서 기대와 신망이 높아 갔다. 이는 문인들이 전국적으로 확대 되는계기가되었다. 영주정사에서는 여성을 위한 별도의 교재 븮사서븯(四書)를 발간했다. 그것이 바로 븮여사서언해븯(女四書諺解)이다. 구학 문을 교육하면서도 여성들을 위한 교재를 별도로 만들었다는 것은당시로서는획기적인일이다.아직은여성들이대외적인 사회활동에참여하지않던시기였다. 남자들 중에는 아나키스트(Anarchist) 백정기(白貞基)를 비롯한백관수(白寬洙),김성수(金性洙),김연수(金秊洙),박 승규(朴升奎),최동규(崔東奎)등당대호남부호의자제들이 포함되어있었다. 이밖에 간재 전우와 박만환과 직·간접으로 관계가 있었던 인물들이있다.이는1917년 전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존 화계첩(尊華契帖)』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계첩에는 간재를 인연으로 만난 동료와 제자 267명의 명단이 68쪽에 걸쳐 실려 있고, 무려 스무 군데의 문중에서 출연한 내역이 소상하게 기 록되어있다. 제목 ‘존화(尊華)’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는 나 라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존망의 시기에 소중화를 표방하면 서유도(儒道)를사수하고자하는유림의마음이담겨있다. 고부 두승산(斗升山)의 망화대(望華臺)는 이 같은 마음을 담은 간재 전우의 제자들이 새긴 명문(銘文)으로 보인다. 즉 망화대는 ‘소중화를 갈망하는 대’라는 뜻이다. 두승산은 영주 정사를 마주보는 산으로 이곳 유생들이 수시로 올랐을 것이 다. 출연 문중 가운데 부령김씨는 부안읍내에, 여산송씨는 태 인과 칠보, 밀성박씨는 흑암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 고, 시산허씨는 태인, 성주이씨는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모신 북면 남고서원(南皐書院) 주변에 많았으며, 고흥유씨는 정읍의 토반이었다. 따라서 지금의 고부를 중심으로 부안, 정 읍, 북면, 태인 일대에 영향력 있는 성씨 문중들이 간재를 중 심으로대거참여한것으로보인다. 이는특정지역을중심으로하면서도인근지역으로그외연 을 확장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부령김씨 문중에서 가장 많은 후원금을 낸 것은 박만환의 부인이 부령김씨였다는 점과 무 관치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소정면 일대에서 20냥이라는 적 지않은돈을낸것은흑암리에밀성(밀양)박씨들이집성촌을 이루고살고있었기때문일것이다. 근대이행기민족교육의구심점 역할을했던곳이바로정읍 흑암동의영주정사와전남창평의영학숙이다. 영주정사가 호남지역 구학문을 대표하는 곳이라면, 영학숙 은 근대학문을 대표하는 곳이었다.또한 이 두 곳 이 ‘호 남 지 역 인재양성의 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호남 지역 부호의 자제들이 이 두 교육기관을 통하여 인맥을 형성 했으며, 이들이 해방 이후 한국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도의의가있다. 영주정사는 구학문을 교육하면서도 여성교육을 위한 별도 의 교재를 마련했다고 하는 것도 의의가 크다.물론 이러한 교 육이 가능했던 것은 각별한 민족의식을 지녔던 박만환의 높 은교육열과후원이있었기때문이다. 한편, 박만환은 일본 천왕이 내린 은사금 수령을 거부하기 도 했다. 이밖에 고부군수 조병갑의 파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동학농민혁명 직전에는 조병갑 축출 자금을 출연했 으며, 의친왕 이강의 중국 망명자금을 내놓기도 했다고 하나 이는 박만환의 자부인 김예동의 증언일뿐 이를 팩트로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차 검증할만한 사료가 발견되어야 한다. 상소를 했다면 공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 다. 그의 아들 박승규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근대학교인 승 동학교를 흑암동에 설립하고 모든 운영경비를 부담했을 뿐만 아니라 원거리 통학생을 위한 기숙사까지 마련하여 근대교육 을 실시하였다. 한편으로는 면암 최익현에게 자금을 지원하 고, 아나키스트 백정기 의사의 항일무장투쟁을 직간접으로 돕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영주정사를 인연으로 만난 사람 중에는 구파 백정기 의사를 비롯, 인촌 김성수, 근촌 백관수, 정산채용신등이있다. 간재는 영주정사에서 계(契)를 만들어 인근 지역 유생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여기에 참여하였던 인사는 찰방 박 만환을 비롯,권순명,김경중과 김기중,의병 대열에 합류했던 김직술, 김택술, 최영대, 고석진, 고순진, 고예진, 정관원 등이 있다.이 가운데 고석진·고순신·고예진 등은 파리장서에 서명 한고창출신의유학자였다. 간재는 영주정사를 통해서 정읍, 고부, 고창, 김제, 부안 등 지의 유생들에게 정신적 스승으로 추앙을 받았고, 『존화계첩 (尊華契帖)』이라는 명부를 통해서는 사실상 지역 사회를 지 배했다고볼수있다. 구학문을마친백정기의사와김성수가신학문을익히기위 해 간 곳이 담양 창평의 영학숙이었다. 창평갑부 고정주는 근 대학문을 교육하기 위해 영학숙[상월정]을 마련하고 이를 확 대해서 창흥의숙[뒤에 창흥학교]으로 개편한 뒤 국사, 영어, 일어,한문,산술 등 당시로서는 신학문을 가르쳤다.창흥의숙 (영학숙)을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은 고하 송진우를 비롯, 초 대 대법원장 김병로, 무등양말 창업자인 매하 양태승, 호남은 행설립자현준호,학파농장을세운김시중등이있다. 정리하면창암박만환이세운고부의영주정사와그의아들 박승규가 세운 승동학교 그리고 고정주가 창평에 세운 영학 숙은 모두 민족의식이 투철한 설립자가 교육을 통한 실력양 성에 목적을 두고 학교를 운영했다고 하는 공통점이 있다. 굳 이 구별한다면 영주정사 관련 인사는 구학문[위정척사사상] 을 바탕으로 한 의병계열의 민족운동을 했다면, 영학숙 관련 인사는 신학문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중점을 두었다는 차이 가 있다. 박만환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은 근대교육, 1920년 대 백정기, 백관수 그리고 그의 아들 박승규의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영학숙에서 만난 김성수·백관수·김병로·송진우는 동 경유학 시절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까지 관계를 유 지하면서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중추적인 요인으로 성장하 였다. 이로써 영주정사와 영학숙을 인연으로 만난 인사들의 활동은해방이후까지이어지게된것이다. 결론적으로 박만환이 세운 영주정사와 고정주가 설립한 영 학숙은 호남지역의 구학문과 신학문을 대표하는 교육기관으 로서호남인재양성의산실이었다고할수있다. 근대이행기호남인재산실,영주정사와 영학숙 지난 7일학술대회를통해일제강점기영주정사를통해항일운동이 지식함양에있음을밝히고있다. 지난 7일 전북 정읍시청소년수련관에서 ‘한국근 대사에서 영주정사와 영학숙의위상 및역할’의주 제로 학술발표회가 열렸다.영주정사는 국권을 잃 은 국민들의의식 고취와 지식 함양만이 독립을이 룰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출발했다. 이에 자 세히 알아보기 위해 (사)정읍역사연구서 김재영 이사장(문학박사)의연구논문을간략하게줄여소 개해본다. 머리말(연구의필요성) 영주정사설립자,박만환과그의아들박승규 뱚영주정사와영양사의구조 영주정사와영양사전경 설립자박만환의민족의식과교육활동 박승규의교육활동과독립운동 뱚영주정사를인연으로만난사람들 뱚맺음말(정리및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