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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6월30일 목요일 12 (제186호) 기획 낙동강700리중최고의절경을자랑하는경상도함안용화산기슭아래에서옛선현들은강학을통해충과효 를드러내었고,그후손들은계(契)를맺어 300여년동안 선인들의선비정신과의병정신을지금까지이어오고있다.그중심에한강(寒岡)정구선생과망 우당(忘憂堂)곽재우,함안군수박충후,여 헌(旅軒)장현광,무숙공(武肅公)박진영 등 문인과 제자 35현이 있었다.이들 선현들이 서기 1607년 용화산 일 대 낙동강에서 선유(船遊)하고 강회(講會) 를 가졌는데,이 사실을 기록한 것이 ‘용화산하동범록’이다.이후 무숙공의 증손 박상절이 동범(同泛)제현(諸 賢)의 행적을 모아 『기락편방沂洛編芳』을 간행해세상에널리알려지게되었다.그리고지난달함안문화원대회의실에는이들의후손과내·외빈120여 명이모여선조의높은뜻을기리고친목을 도모하는등아름다운향연을펼쳤는데이를소개하면다음과같다. 용화산하동범은 1607년 정월 27~28일 영남 유림의 태두인한강정구선생이함안군대산면도흥나루내 려온 일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리고 다음 날 여헌 장 현광, 망우당 곽재우, 당시 함안군수 순천박씨 박충 후,무숙공 박진영을 비롯한 함안·창녕·성주 등 선비 35인이낙동강용화산아래합강(남강과낙동강이마 주치는 지점)정에서 곽망우당 정자(창암사)까지 동 범을 가졌다. 이들 대부분은 임란 때 왜적과 싸웠던 분들로동범의취지는시문을짓고회포를풀며전란 으로 피폐해진 나라와 백성들의 민심을 전란 이전으 로 되돌리고자 하는 강회(講會) 겸 선유(船遊)였다. 그날 ‘용화산하동범록’이 만들어졌고 여기에 등재된 인물들을기록된순으로나열하면다음과같다.(지면 상대표적인인물만소개한다.) 1.정한강(鄭寒岡) 諱 구(逑) 字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으로 본관은 청주이다. 퇴계와 남명의 문인으로, 성리학·예학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박학하여 후에 근기 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병술년(1586)에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관아에 강당을 열어 유생들 을 훈도하여 지역의 유풍(儒風)을 일신(日新)케 하고 올곧은 선비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들 문 인과 제자들은 임란 때 전국에서 수 백인이 창의 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섰다. 선생은 여러 지 방관을거쳐형조참판·대사헌등을역임하였다. 2.곽우윤(郭右尹)諱재우(再祐)字계수(季綏)號 망우당(忘憂堂)시호는충익(忠翼)으로본관은현풍 이다.임란때창의하여왜적의호남진출을저지하는 데 공을 세운조선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1585년(선 조18)정시문과에뽑혔으나,글의내용이왕의미움 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 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중임란이발발하자 의병을일으켰다.천강홍의 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의깃발을내걸고혼자서말 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적에게두려움을주기도했으 며,함성으로군사가많은것처럼꾸미기도하여적을물리 쳤다.붉은옷을입어홍의장군으로잘알려져있다. 3.박함안(朴咸安)諱충후(忠後)字경술(景述)본 관은 순천(順天)이며, 소격서(昭格署) 참봉 휘 계창 (繼昌)의아들이다.5세조취금헌(翠琴軒,휘팽년)께 서는 형조참판으로 단종(端宗) 때 순절하였으니, 세 상에서일컫는사육신(死六臣)의한분이다. 공은임자년(1552)에태어났다.몸가짐이단정하 고 재능이 뛰어났으며, 선조(先祖)를 받듦에 효성 을다하였고,남을대접함에는정성을다하였다.처 음 음보(蔭補)로 선공감(緯工監) 감역(監役)이 되 었다가함창(咸昌)주수(州首)가되어관리를품에 안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다스리던 중 임진년에 왜 란을만나의병을일으키고,군사를모아앞을막고 뒤를 공격하여 적을 포획함이 많아 원종공신(原從 功臣)에 녹훈(錄動)되었다. 갑오년(1594)에 무과 에오르고병신년(1596)에통정대부에승진되었다. 선조 31년(1598) 중국 사신 급사(給事) 서관란(徐 觀瀾)과어사(御史)진효(陳效)및여러중국의장수 들이서로이어남하(南下)할때공께서영접의노고 가 매우 부지런하였으며,객관에서는 예로서 대접하 고또한쌀과잡곡을옮겨와장졸들을먹이니중국사 신들이 칭찬을 마지않았다. 관반사(館伴使)오봉(五 峯)이호민(李好閔)이명하여시(詩)를지어주었고, 오봉또한시(詩)를남겼는데이르기를,『朴氏忠賢後 (박씨충현후) 박씨의 충성스럽고 어진 후손이요 河 濱舜所陶(하빈순소도) 하빈(河濱)은 순임금이 질그 릇 굽던 곳이로다. 從今天下士(종금천하사) 이제부 터천하의선비들은談勝數江阜(담승수강부)승리를 얘기하며 자주 강 언덕에 오르리라)』했다. 조정(朝 廷)에서 특별히 가선(嘉善)에 승진하였고, 을사년 (1605)에 함안(咸安) 수령으로 나와 정사(政事)를 잘 보살펴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덕(德)을 기 렸으며, 다시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오위도총부 (五衛都摠府)부총관이 되었다.신해년(1611)에 돌 아가시니,향년이60세이다. 4.장여헌(張旅軒)諱현광(顯光)字덕회(德晦)시 호는 문강(文康)으로 아버지는 贈이조판서 열이며, 어머니는경산이씨이다.1576년(선조9)재사로천거 되었고, 1595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보은 현감 을지냈다.그뒤형조좌랑·순천군수에임명되었으나 나가지않았고,광해군때합천군수,인조때지평·집 의·이조참판·대사헌·지중추부사 등에 20여 차례 제 수되었으나모두사퇴하고학문에전념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부름을 받아 인조(仁祖)에게 시정(時政)에 대한 건의를 올렸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군에 격문을 보내 근왕(勤王)의 군사를 일으켰다. 이 듬해 삼전도에서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동해안의 입암산에들어가6개월후에졸하였다. 5. 이길(李佶) 字 여한(汝閒) 무술(戊戍) 號 독 촌(獨村). 6. 성경침(成景琛) 字 중진(仲珍) 계묘 (癸卯) 號 작계(鵲溪). 7. 신초(辛 礎) 字 지수(支 쑴) 기 유(己酉) 영산 (靈山) 諡 충장 (忠將). 8. 조식 (趙埴)字극성(克成)기유(己酉)號입암(立 散).9. 이숙(李潚) 字 여징(汝澄) 경술(庚戌) 號 갈촌(葛 村).10.노극홍(虛克弘)字 의보(毅甫)계축(癸丑) 號 옥촌(沃村). 11. 신방즙(辛邦楫) 字 여제(汝濟) 병진(丙辰)號영모당(永慕堂). 12. 조방(趙 )字 극정(克精)정사(丁巳)號 두 암(斗巖). 13. 이후경(李厚慶) 字 여무(汝懋) 무오 (戊午) 號 외재(畏齋). 14. 나익남(羅翼南) 字 천기 (天紀)무오(戊午)개성부유수,교수號국암(菊菴). 15.이도자(李道孜)字지지(至之)기미(己未)號복 재(復齋).16.유해(兪諧)字 흠재(欽哉)을축(乙丑) 진사(進士). 17. 이명호(李明 ) 字 양초(養初) 을 축(乙丑) 號 매죽헌(梅竹軒) 18. 이도유(李道由)字 명지(明之)병인(丙寅) 號창랑수(滄浪 쑴 ). 19. 박진영(朴震英) 字 실재(實哉), 기사생(己 巳1569), 본관은 밀양(密陽), 고려조 영동정(令 同正) 박원광(朴元光)의 후손으로 號는 광서(匡 西),시호는무숙(武肅)이다. 임란이 발발하자 아버지 동천(휘 旿)공과 조선 최 초로 1592년 4월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여 외숙 부 갈촌 이숙·문암 신초 장군과 김해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맞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 (城)이 함락되어 함안으로 돌아와 재차 창의하여 함 안을 사수하던 중 권율(權慄) 장군의 부름을 받아 행 주산성 전투에 참전하는 등 도원수휘하에서 수많은 전공을세우고종군하여선무원종2등공신에오르고, 1599년 용궁현감으로 출사하였으며, 주로 조선의 서 북방을 방어하는 무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1624년 황해도방어사 재임 시 이괄(李适)의 난을 일으켜 진 압군 별장으로 출전하여 반란군 병졸 3천여 명을 투 항케 하고, 궁궐에 난입한 반란군을 한양 외각(길마 재)으로유인하여괴멸시키고,난을진압하는데결정 적인 공을 세워 아들 임룡과 진무원종1등 공신에 책 록되었다. 그러나 봉작(封爵)의 대열에는 누락 되었 다. 이에 병조판서 김시양(金時讓)이 상소하여 병조 참판에제수되었다. 공은 말하기를,“나는 본디 才德이 부족한 사람 인 데 , 國 恩 을 깊 이 입 어 직 위 가 二 品 에 이 르 고 , 榮 華가 三世에 이르러 이미 臣下분에 넘침을 받았 다. 이제 늙고 병들었으니, 나랏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하고는사양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에 68세의 노구(老軀)에도 불 구하고,향병을 모집하여 근왕(勤王)코자 남한산 성으로 향하던 중 조령(鳥嶺)에서 화의가 성립되 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馬)에서 떨어져 비분 통 곡하고 귀환하여 오랑캐에 짓밟힌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다1641년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1644년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164 9년 숭정대부 판돈녕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에 증직 되고, 정조(正祖) 임금이 직접 편찬한 존 주록(尊周錄)에 기록하기를 “병란 이후 영남에 서 義理를 지키며, 살다 간 사람은 동계 정온(鄭 蘊)과광서박진영뿐이랴”하였다. 1871년 무숙(武肅)의 시호가 내려지고 국불천위(國 不遷位)를 하사하였다.이때7세손만성(휘치복)이선 조의 유고를 모아 『광서실기匡西實記)를 편찬하였으 며,1880년대보단(大報壇)에배향하게하였다. 20. 이명경(李明귁) 字 일초(一初) 기사(己巳) 號 국암(菊庵). 21. 이명념(李明念) 字 이성(而聖) 신미(辛未) 號 영모재(永慕齋). 22. 신응(辛膺) 字 백 희 (伯 )임신(壬申)23.이명각(李明慤)字자 순(子純) 임신(壬申) 24. 이명여(李明 ) 字 경 초(慶初) 계유(癸酉). 25. 안정(安 ) 字 자장(子 長)갑술(甲戍)號 도곡(道谷).26.이시함(李時 ) 字 문원(聞遠) 을해(乙亥). 27. 곽형(郭瀅) 字 청숙 (淸叔) 무인(戊寅). 28. 이도일(李道一) 字 관지(貫 之)신사(辛巳)號소우헌(消憂軒).29.이난귀(李蘭 貴)字몽여(夢與)갑신(甲申)號슬곡(瑟谷).30.유 무룡(柳武龍)字경율(景먀 )갑신(甲申). 31. 조임도(趙任道) 字 치원(致遠) 을유(乙酉) 號 간송당(澗松堂) 본관은 함안으로 1604년(선 조 37) 향시에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인 21세 때 『관규쇄록(管窺鎖錄)』을 저술하였다. 1608년(광 해군 즉위년) 「거상대절(居喪大節)」 10조(條)를 써서 자손들이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또 아 버지의언행록인『추모록(追慕錄)』을지었다. 1614년에는 동당시(東堂試)에 그 이듬해 향해 (鄕解)에 합격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향인(鄕人)들이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신 병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1634년 공릉참봉(恭 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 였고, 1638년 『취정록(就正錄)』을 짓고 그 이듬 해『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편찬하였다. 1644년 『조대소헌유사(趙大笑軒遺事)』를 찬하 였으며, 1647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었으 나 병으 로 부임 하지 못하 였다 . 그 뒤 공조 좌 랑으 로 임명되었으나, 노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아니 하였다.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함안의 송정서원 (松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간송집(澗松 集)』7권4책이있다. 32. 이도보(李道輔) 字 익지(益之) 정해(丁亥) 號 익암(益庵). 33. 이해(李瀣) 字 이호(而浩) 정 해(丁亥). 34. 이충민(李忠民) 字 여직(汝直) 무 자(戊子).35.최문주(崔門柱) 1607년(선조 40) 정월 28일 임란 전후로 의병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의 (義)로운 선비정신을 보여주며 안동지방을 중심 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 유 학의 두 봉우리를 이루며 지리산을 중심으로 경 상 우도인 진주,합천,등지에 모여 살면서 유학을 진흥시킨 남명조식선생의수제자한강정구,여헌 장현광, 망우당 곽재우 등과 교유하였거나 추종하 였 던 35인 이 모여 낙 동강 700리 중 가장 아 름답 다는 용화산 아래서 선유(船遊)하며 학문과 시국을 논 하 였는 데 그 순서 는 임진 왜란 의 의병 첫 승 지인 기 강 나루가 있는 낙동강의 용화산 서쪽인 용화암 합 강정부터 청송사, 도흥보, 내내촌, 경양대, 시우포 (반구정),평사면,망우당 곽재우 장군이만년을 보 낸 청 암사 (망 우정 ) 까지 동 범(同泛)하였 다. 이날의 돈독하고 격조 높은 동범의 의의를 남 기고자 한강 정구 선생이 참여한 사람들에게 정 구, 곽재우, 박충후, 장현광 선생은 휘(諱, 이름), 자(字), 호(號), 시호(諡號)순으로 첫머리에 적 고, 이하는 휘(諱), 자(字), 호(號), 연령순으로 적은 후 모임의 날짜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 록 의 제목도 한강 정구 선생이 직접 ‘용화산하동범 록(龍華山下同泛錄)’이라 칭하였다. 이 록은 당 시 참석한 간송당(澗松堂) 조임도 선생이 1621년 (광해군13) 중수하여 남긴 ‘용화산동범록추서 ((龍華山下同泛錄追書)’와 그림을 토대로 수십 년 간 발굴과 보완을 거듭해 1758년 박상절(朴相 節)공이 ‘용화산수도(龍華山水圖)’를 넣고,조부 완석당(휘 亨龍)공이 스승 동명(東溟) 김세렴 선 생과 문인들 간 현풍의 비슬산(琵瑟山) 유람하 고, 지은 시문을 모아 간행한 것으로 『기락편방 (沂洛編芳』이라 한다. 기락편방을 간행한 박상절 은 무숙공 박진영의 증손으로 자(字)는 성보(成 甫) 호(號)는 자고당(紫皐堂)으로 1700년에 태 어났다. 성호(星湖) 이익 선생 문하에서 종유(從 遊)하였으며 문학(聞學)이 정심(精深, 정세하고 깊음)하고 효우가 순지(純至)하여 고을원으로부 터 표 창과 도 계(道啓)로 서 두 번이 나 재랑 (齋郞)에 천거되었다. 영조(英祖) 무신사변 때 창의하여 역 적을치고,거의토적의격문을지어그죄를성토하 였다.또한,노론과소론의당파싸움이극에달했던 시 기의 영조 즉위 에 일 어난 무신 난(戊申亂)을 지 켜보며,‘조정은병들고도둑의손이하늘을휩쓸고 있다는 내용의 시 『痛矣桐溪老郡之 有賊孫所彼蒼 天』를 지어 충의와 절의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아 버지 충추(휘 昌兆)공과 함원부원군(어유구魚有 龜:경종 임금의 장인) 간에 오고 간 서간(書簡)에 공의 학문을 크게 칭찬하였듯 공의 학문은 대단 한 경지에 오른 듯하다.스승 성호 선생이 쓴 기락 편방의 발문에 공의 학문과 성품 그리고, 조부 완 석당의면면을표현한내용을소개해본다. 【내가 집에서 한가로이 지낼 때 미수(眉 쑴) 허 선 생 (許 先 生 )의 유 집 (遺 集 ) 1 부 를 책 상 위 에 두 고 본 적이 있다.허 선생은 근고(近古)시대의 명 망 있는 인물에 대하여 기술한 것이 많았는데, 실 제 행적들이 모두 눈에 선히 들어올 정도로 실감 나게 묘사하였으니, 한 시대의 훌륭한 역사책이 라 하겠다. 예를 들어 한강(寒岡)과 여헌(旅軒) 등의 노(老) 선생에 대해서는 올바른 출처(出 處), 순정(純正)한 언론, 높은 덕망에 대해 칭송 하였고,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에 대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키고 후세에 영향을 끼친 높은 절개와 풍모에 대해 칭송하였다. 그리고 동 명(東溟) 김공(金公)의 경우, 공이 일찍이 당시 의 권신(權臣)을 비판하다 경상도 현풍 현감(玄 風縣監)으로 좌천되었는데, 수령으로 재직 중 학 교를 세우고 향약법(鄕約法)을 시행하자 조정에 서 그 조례와 제도를 올리게 하고 이를 사방에 반 포하여 시행케 함으로써 백성의 교화에 보탬이 되었음을 칭송하였다. 이번에 박사문 상절(朴斯 文 尙節)이 편집한 기락편방을 보았는데, 만력(萬 曆)정미년(1607,선조40)에한강,여헌두선생과곽 망우당이함안(咸安)의용화산(龍華山)아래에서배 를 띄워 유람한 일이 실려 있었다. 이때 그분들과 종 유한 이로 판돈녕부사에 추증된 박진영(朴震英)이 있다. 그 뒤 28년이 지난 갑술년(1634, 인조 12)에 동명 선생이 현풍(玄風)의 풍영대(風詠臺)를 유람하였는 데,이때종유한이로완석당(浣石堂)박형룡이있다. 허 선생의 문집에 따르면, 완석당은 돈녕공(敦寧公) 의아들이다.돈녕공이비록무인출신이기는하지만 유현(儒賢)들을 가까이하고 예의를 숭상하였으며, 임진년(1592)과갑자년(1624)의전란때에큰공을세 웠으나이를남에게내세우지않았다.임종을맞아자 식들에게훈계하기를“삼가예법을지켜가훈을실추 하지 않도록 하라 謹守法 無墜家訓”하였다. 이에 완 석당이유훈을잘받들어영남의큰인물로훌륭히성 장하였다. 완석당은 세상을 떠난 뒤 그 행실이 더욱 알려져사헌부지평에추증되었는데,이는제자를가 르치고 예법을 지키는 데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자가 말하기를 “그 땅에대해모르면거기에서자라는초목을보고,그 아비 에 대해 모 르면 그 아 들을 보고 , 그 사람 에 대해 모르면 그 벗을 보라.” 하였으니, 이 기락편방이 아 주 좋은 예 라 할 것이 다.】 용화산수도(龍華山水圖)는 동범(同泛)에 함께 한 간송당 조임도 선생이 그날의 기록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다가 14년이 지난 1621년(광해군13) 종매부 도곡 안정(安挺)으로부터 우연히 동범록 초고를 얻어, 그사이 한강과 망우당 등 많은 분들 이 세상을 떠났음을 한탄하면서 다시 정리하여 묶고, 화공을 구하여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서 도록(圖錄)을 만들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훗 날 기락편방을 간행한 자고당(紫皐堂) 박상절(朴 尙節)에의해율시한편과더불어서문을쓰고이전 동범 장면을 상상하면서 용화산 경관과 함께 시로 서기록하여두었다.전체를여덟폭의그림으로그 리고 시를 곁 들인 것은 아마 흔히 승경 (勝景)을 대 할 때 ‘팔경’으로 묘사하는 관습을 따른 듯하다. 그 리고 자 고당 선 생은 다 음과 같 이 덧 붙이 고 있다 . “여러 현인들이 이곳에서 유람한 것이 어슴푸 레 어제의 일 같아 산고수장(山高水長,산은 높이 솟고 강물은 길게 흐른다. 즉 군자의 덕행이 높고 한없이 오래 전해진다는 것)의 풍류를 상상할 수 있도다. 푸른 숲을 머금고, 푸르른 경치 움킬만하 니, 곧 진실로 경치를 전하고 사모를 붙이는 것임 을 알겠도다. 곧 문자가 귀함을 다하는 것이 아니 며 또한 도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대개 이 도(圖) 는 다 만 일 대 의 선 범 (僊 泛 )을 본 떠 그 리 고 십 리 사이에 감상하는 것이 한 가지 물건이 아니므로 이름에따라말하고나누어여덟첩으로하였다. 첫째는 용화산의 훌륭한 모임(龍華勝集)이다. 용화산 우뚝한 곳에 올라 노닐며 한 구역 경치를 두루 감상했는데 당시 유람에 모인 자들은 모두 한시대의이름난선비들이다. 둘째는 청송사의 저녁 종소리(靑松暮聲)이다. 강가 고찰(古刹)에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 가때때로배안에들려온다. 셋째는 도흥에서 돌을 찾음(道興搜石)이다. 한 강 선생께서 비석을 할 만한 돌을 발견했는데 일 찍이 강 언덕에서 잃어버린 곳이 이 도흥보이다. 배를 세우고 혹 장정들에게 명하여 땅을 파고 혹 사람들에게청하여잠수하며그돌을찾았다. 넷째는 내내촌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함 (柰內淸常)이다. 백 길이나 되는 층층의 바위 강 을 따라 벽처럼 둘러있고 왼쪽 모퉁이는 점점 낮 아져 석대(石臺)를 이루었는데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남으로는 이어진 짧은 기슭에는 수목이 울창한데 여덟아홉 되는 어물전 불빛 점점 이어 져 그 사이에 은은히 비쳐 바라보면 신선이 사는 곳같아배를멈추고올라간다. 다섯 째 경 양대 의 뛰어 난 경 치를 지 세히 봄(景釀 奇囑)이다.이어진가파른절벽완연히병풍을펼쳐 놓은 듯하고 한 줄기 강의 광경(光景) 이곳에서 충 분하구나,천천히노저으며강의가운데로흘러이 쪽 저쪽 돌 아보 며 눈을 떼 지 못한 다. 여섯째 우포의 돛단배를 따라감(藕浦追帆)이다. 반 구(伴鷗) 조공 (趙公)이 여러 현 인들 이 거슬 러 이 미 지 나갔 다는 것을 듣 고, 중 씨(仲氏) 입 암 및 조 카 간송당과함께작은배를타고뒤따라갔다. 일곱 째 모래 펄에 기러 기 내려 앉음 (平沙落雁)이 다.넘실대는물을거슬러올라갈때펼쳐진경치를 눈여겨본다. 여덟째창암에서함께배를탐(蒼巖同舟)창암은곧 망우당곽선생의정자이름인데한강여헌두선생께서 이곳에모여묶었다.이에주인과문도여러사람들이비 로소배를타고동범(同泛)한것이다. 매첩(帖)아래에각각시(詩)를이어우리선조를추 모하고현인을우러르는정성을붙였다.지극히참람되 고외람됨을알지만후인들이때가있을때펼쳐이강 산의 진면목(眞面目)을 보고 백세후에도 스승을 우러 러공경하게하는것이반드시이도(圖)에있을것이다. 용화산하동범은 조선의 선비정신과 의병정신을 잘 드 러내 는 영남 의 대표 적 문 화유 산으 로 당시 참 가한선비들이남명선생의제자와후학들이다. 그 후손들이 모현계(慕賢契)를 맺어, 매년 모 현정(함안 칠서 계내 소재)에서 회합을 열어 제 현 추모와친목을도모한지300여년이되었다. 그리 고 이 제 그 모현 정(慕賢亭)은 전 망 좋 고 접 근성이 좋은 곳으로 이건 될 전망이다.모현계에서 지난10여년간이건사업을추진해왔으며,함안군 과 2021년 이 같은 사 업 진행 에 대 해 합의 하고 , 2022 년 5월 모 현정 사 업 계획 을 수립 하여 2023년 부터 2 년 간에 걸 쳐 사업 을 추진 하기 로 하였 다. 지난달 5월 개최된 모현계 정기총회에서 추대 된 박정규 회장은 수 락 인사를 통해 모현정 이건 사업이 완료되면 사당에 제현을 배향할 것이며, 기념관을 열어 일반인들에게 임란 때 선조들의 구국정신을 널리 알리고 함양할 것이며 특히, 자 라나는 청소년들이 선인(先人)들의 얼을 받들어 나라의 동량(棟樑)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체 험관 으로 활 용될 것이 며, 향 후 제 현에 현 창 사업 또한 지 속적 으로 전 개할 것 이라 고 하였 다. 함안군 담당관은 사업 설명을 발표하면서 “동범에 참여한 한강의 문인과 제자들은 임진왜란과 정유 재란때개연히붓을던지고,의병활동을주도하거 나 전란에 참전해 절체절명에 직면한 나라를 구하 기 위 해 멸사 봉공 하신 분 들로 서 낙동 강에 서 선유 하고 강회한 ‘용화산하동범’을 조선의 선비정신과 호국정신이 깃든 경남의 문화유산으로 문학적 소 양을 높이는 재현 행사 등으로 관광 자원화에 지혜 를모아야한다며적극뒷받침할뜻”을밝혔다. 낙동강 700리 중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용화 산 기슭 아래에서 선현들이 애국애민(愛國愛民) 하는 강회(講會)를 열고, 충효를 겸비한 후학을 양성한 선비정신과 의병 정신 을 되살려 지역민들과 청소년 들에게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 는 교육 장소로 거듭날 수 있 도록 모두가 힘을 모아줄 것 을기대해본다. /자료제공 박권곤 모현계 간 사 용화산하동범(龍華山下同泛)과모현 계(慕賢契) 선조 유지를찾아븣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 모현계정기총회가지난달5월23일함안문화원대회의실에서개최된가운데,무숙공박진영장군의후손박정규현종이신임회장 으로추대되어모현정 이건 사업 및 제현 현창과 후손들 의화합을이룰것이라고말하고,참석한회원들은파이팅으로화답한다. 박정규모현계회장 기락편방(沂洛編芳) 용화산하동범지도(龍華山下同泛之圖)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