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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5월31일 화요일 11 (제185호) 독자마당 다산 학문의 근본은 경학(經學) 연구에 있었습니다. 다산의 500여 권이 넘는 저서 의 232권 이상은 경학연구에 관한 저서임 을 알게 되면 금방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그래서아들에게보낸편지에서도“반드시 처음에는 경학공부로 밑바탕을 다진 뒤에 옛날의역사책을섭렵하여 옛날정치의득 실과 치란의 이유를 캐보아야 한다 (「寄二 兒」)”라고말하여학문은경학공부부터시 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산은 경 (經)의 뜻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서야 인 간의일이나국가의일이절대로바르게갈 수없다고확언하고있습니다. “경전의 뜻이 밝아진 뒤에야 도의 실체 가 드러나고, 그 도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마음가짐(心術)이 바르게 되고, 마음가짐 이바르게 된뒤라야덕을 이룰 수있다.그 러므로경학에힘쓰지않으면안된다.(「丁 修七에게 주는 글」)”라고 말했으며, “폐법 (弊法) 학정(虐政)이 행해짐은 모두 경의 뜻이밝혀지지못한이유입니다.그래서저 는나라를다스리는요체는경을밝히는일 보다 앞서는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弊法 虐政之作 皆由於經旨不明 臣故曰治國之 要 莫先於明經也 : 『경세유표』 地官修制 賦貢制二)”라고 경학의중요함이어느정 도인가를강조하였습니다. 공자와 맹자이후 수많은 경학자들이나 타나서모두가자신이해석한경의뜻이가 장 바른 해석이라고 당파로 나뉘어 싸우기 까지 했지만, 다산이 확인해 본 경학은 결 코 공자와 맹자의 본뜻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여겨서,다산은생을걸고사서육경 (四書六經)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공 맹의본뜻에가장 근접하는 논리라는확신 을 피력하기에 이르렀습니다.특히 송나라 학자들에 이르러 성(性)을 이(理)라고 해 석하여 성리학(性理學)의 체계가 새롭게 세워지면서 이른바 이학(理學)이라는 학 문으로 정립되어 성(性)븡인(仁)븡덕(德)등 모든 유학의 중심사상을 이(理)로 해석하 여관념적인체계로굳어졌습니다.이런논 리에근본적인반기를들고 다산은 새로운 행위개념을 찾아내 실학적 경학인 다산경 학을이룩하기에이르렀습니다. 맹자의 ‘성선설’에 대하여 하나만 살펴 보겠습니다. “인간 영체(靈體)의 안에는 세가지이치가있다.그성(性)으로말하면 착함을좋아하고악함을부끄러워한다.이 래서맹자는인간의 성품은 착하다는성선 설을 주장했다. 권형(權衡)으로 말하면 선 할수도악할수도있다.이래서양웅(揚雄) 은 선악혼재설(善惡混在說)을 주장했다. 행사(行事)로 말하면 선을 하기는 어렵고 악을하기는쉽다.이래서순자(荀子)의성 악설이나왔다.순자나양웅은성이라는글 자에인식이잘못되어맹 자의주장과차이 가나지만우리인간영체안에는본래부터 세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심경밀험, 심성총의) 라고 말하여 맹자의 성선설이 옳고나머지는그르다는판단을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산은 부연설명을 합니다.하 늘이사람에게착할수도악할수도있는권 형을주어 아래로 내려가면 착하기는어렵 고 악하기는 쉽게 해주지만, 위로 향하면 착함을 좋아하고 악함을 싫어하는 성품을 주어자신의노력여하에따라착함을행할 수있기때문에성은착하다는맹자의학설 이 나오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그러면서 『맹자(孟子)』의 해석에서는 인간에게는 ‘자주지권(自主之權)’이 있어 자기의 결단 에의해착하기도악하기도한다는큰진리 를발견하기에이릅니다. 성악설이나 선악혼재설이 부정되면서 착 한 성품을 자신의 의지에 의해 계속 이끌고 갈때만역사는발전하고인류문명은진화한 다는능동적인 인간론을 찾아낸 다산의 경 학이론이 바로 공맹의 성론임을 그런데서 알게해줍니다.인간의성품은본래부터악 하다, 인간의 성품에는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다고했을때,그결과가낳을폐해를생각 해보면다산의경학이론이얼마나탁월한이 론인가를알아보기어렵지않습니다. 성선설(性善說)의올바른해석 박석무 다산연구소이사장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야 하는 정부 고 위직책이 많아졌다. 국무총리, 감사원장, 장 관,대법관,헌법재판관,중앙선관위원,경찰 청장, 국세청장, 검찰총장 등이 대표적이다. 언제부터인가 국회청문회는 직책수행역량 평가보다는개인의신상털기위주로가고있 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상을 살펴보니 거의 대부분이개인적으로富를축적하는경제적 활동은왕성하였으나믿음이나신뢰같은사 회적자산을축적하는사회공헌활동은거의 없었다. 지도자 반열이 있는 분들이 공동체 의 발전과 더불어 사는 활동에 거의 관심이 없다는것이다.그러다보니야당에서는공직 자로서부적합하다며사퇴하라고압력을넣 는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봐야할까? 한국사회가격변이심했기에눈높이에미흡 하더라도정상참작하여공직에서역량발휘 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문제 는 그들이 정상 참작할 사항들을 거의 갖춰 놓지못했다는것이다.국가사회발전을위한 자원봉사와재능나눔,청소년지도,기부후원 등노블레스오블리제와사회적자산형성활 동이거의없기때문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식민지를 경험한 나 라 중 유일하게 선진국 반열에 올랐고, 경제규모는 세계 235개 국가 중 수출 세 계 7위, 수입 세계 9위에 자리매김 되어 있다. 세계 1등 상품이 무려 200여개 가 까이 되고, 5년 후에는 500개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적으로 경제적으 로 일본, 프랑스, 영국과도 버금간다. 이 것만 봐도한국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내적으로 경제성장주의에 치중 하고, 대외적 여건도 지난 70여 년간 한 국에유리하였기때문이다. 반면에 지금 한국이 대내외적으로 처한 상황은녹록치가않다.우선내적으로는지 도층들이 지도자 분수를 모르고 도덕성이 상당히 결핍되어 있기에 제정신이 아니다. 비하 언어 중에 “정신 나간 놈, 정신없는 놈”이라는말이있는데,혼(정신)이몸밖으 로나가몸속에없으면말과행동이정교하 지 못한 경우가 많아 이때 쓰는 말이 정신 나갔다는것이고,더심하게행동이사리에 맞지않거나판단을 제대로 못하면 정신이 없어졌다고 한다. 구한말부터 거의 100년 이상식민지지배와 가난과 전쟁에 시달리 다보니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먹고사 는 문제,즉 경제성이 늘상 앞설 수밖에 없 었다.서양의자본주의를보고배우기에바 빴으며고도의압축 성장기를거치면서경 제지상주의는더심화되었다. 외부의 국제적인 여건도 더이상 우호적 이지 않다.보호무역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사망자가 제2차 세계대전 사망 자에 버금가는 코로나19에 이어 앞으로도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창궐이 예상되고,종 교전쟁과 영토전쟁이 발생하면서 각국이 새롭게 군비증강에 몰두하고 있다.인공지 능과로봇기술을핵심으로하는4차산업혁 명의 발전은 인간 의 역할을 기계로 대체하려고 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개별국가차원에서는해결 이안되고,합의 와 선언에 치중하는 UN시스템으로도 해 결이 어렵다.필연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 이 작동하는세계정부가 출현될수밖에없 다.세계정부가 출현한다면 대한민국의 발 언권은어느정도나될까? 한국은 자본주의 혜택으로 선진국 반 열에 진입하였으나 더 크게 도약하고 또 세계정부라는 자본주의 이후의 시대에 중심국이 되기 위해서는 나눔정신으로의 무장이 필요하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나라만 생각하는 경제성이 아니라 마음 을 나누고 경제를 나누는 여유로움이 일 상화되어야 한다. 혹자는 그것을 홍익정 신으로 표현한다. 서로 서로가 상대에게 이로움을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다. 총리와 장관되고자 국회청문회에 나가려면, 회사를 크게 키우려면, 사람을 바르게 인도하려면 재능을 나누고, 경제 를 나누는 연배분수 역할을 잘 하여야 한 다. 사회지도층 노인이 되었는데도 나눔 은 없 이 경 제성 만 밝히 고, 큰 회사 의 핵 심 경영자가 되었는데도 사회적 자산 형성 에 관심이 없으면 안된다. 老老는 노인이 되 었으 면 마음 과 재 산을 풀 줄 알아 야 한 다는 것이고, 長長은 장년도 사회중심 연 배에맞게처신해야한다는것이다. 연배분수에맞는老老長長역할에관심을갖자 박승주전여성가족부차관 [번역문] 또 아뢰기를,“홍주(洪 州) 노은서원(魯恩書院)의 유생인 유학최건(崔 괜)등의상언(上言)에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의 사 판 (祠 版 )은 그 부 인 이 직 접 쓴 필 적인데,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다행 히 다시 나타났습니다. 다만 제(題) 한 방법이 또 예식(禮式)과 달라 가 묘(家廟)에서 모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차마 다시 묻을 수 도 없어 그대로 노은서원의 위판(位 版) 뒤에 봉안하였으니, 후세의 사 람들이 감회를 일으키는 것은 진실 로 여기에 있고, 선현이 의기(義起) 하여 깊은 뜻을둔 것도 여기에서 벗 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대 신 제사를 지내는 자손이 모시고 갈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선현이 이미 정한 의론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요, 신 주 를 고 쳐 쓰 는 지 경 에 이 르 게 되 는 것 은 너 무 도 놀 랍 고 망 령 된 일 입 니 다 . 비 록 그 의 청 에 따 라 이 미 허 락 한 일 이 라 할 지 라 도 지 금 다 시 바 로잡되, 명령을 번복한다는 것에 구 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습니 다. 충신(忠臣)의 신주를 모시고 제 사를 받드는 것은 살펴서 신중을 기 해야 할 일입니다.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하여,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 를,“대신에게 문의하니 우의정 김재 찬은 ‘성삼문의 신주를 노은서원의 위패 뒤에 옮겨봉안한것은 곧선정 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정론 입니다. 지금 만약 제사를 받들어서 는 안 되는 방손(傍系)에게 옮겨 봉 안하게할경우,충문공이지각이있 다면 어찌 예에맞지않는 제사를 흠 향하려 하겠습니까. 더구나 분칠하 지 않고성명을쓴 것을 혹시라도 멋 대로 고친다면 몹시 놀랍고 한탄스 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충문공의 신 주를 도로 노은서원에 봉안하는 것 이사리에합당할듯합니다.’하였습 니다.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하여, 전교하기를,“대신 의논의대로시행하라.”하였다. [원문] 又啓言: “洪州魯恩書院儒 生幼學崔괜等上言以爲, ‘忠文公成 三問祠版, 卽其夫人親書手蹟, 而幾 年幽晦之餘,幸得復顯.第其所題,又 與禮式有異, 旣不可於家廟, 亦不忍 使還埋, 仍安魯恩之院位版之後, 則 後人興感亶在是矣,先賢義起深意所 存,亦不外此.中間攝祀之孫,請其奉 去, 大違先賢已定之論, 至若改題之 境, 則萬萬駭妄. 雖是依渠請已許之 事, 到今更爲釐正, 不必以銷刻爲拘 云.’ 忠臣妥靈, 所宜審愼, 請問議大 臣處之.” 允之. 又啓言: “問議大臣, 則右議政金載瓚以爲, ‘成三問神主, 移奉于書院位版後,卽先正臣宋時烈 之定論也. 今若移奉於不當祭之旁 孫, 則忠文有知, 其肯就享於非禮之 享乎 況不塗粉而題姓名者, 若或擅 改,大可駭歎.忠文神主,還奉於魯恩 書院, 恐合事宜云.’ 請上裁.” 敎以: “依大臣議施行.” 『일성록(日省錄)』 순조 8년 3월 19일 [해설] 1672년(현종13) 4월, 호조 의 서리 엄의룡(嚴義龍)이 인왕산(仁 王山)의무너진벼랑밑돌무더기사이 에 놓여 있던 자기(磁器) 안에서 성삼 문(成三問)과 그의 외손 박호(朴壕) 부부의 신주를 발견하였다. 이 성삼문 의신주는1456년(세조2)그가단종(端 宗)복위를기도하다발각되어처형되 었을 당시 부인 김씨(金氏)가 손수 마 련한것으로,김씨의사망뒤박호의집 으로 넘어갔다가 그 집안 역시 후사가 끊어지는바람에결국이곳에매안(埋 安)되고만것이라알려졌다.성삼문의 사망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시점 에, 더구 나 단 종 및 사육 신(死六臣) 에 대 한 재 평가 와 현 양 복 권 논의 가 점차 본격화되어 가던 시기에 그의 신주가새로이발견되었다는점에서, 이 사건은 당시 사림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얻었다. 유생들로부터신주봉안문제에대 해문의를 받은 송시열(宋時烈)은 이 일을 두고 하늘이 성삼문의 충심에 감응한 결과라 하며, ‘혼령이 집으로 돌아온다.[神返室堂]’는 『주자가례 (朱子家禮)』 구절에 의거해 홍주(洪 州) 노은동(魯恩洞)에 있는 성삼문 의 옛집에 이를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후 1676년(숙종2) 이곳에 사육신 을 제향하는 노은서원(魯恩書院)이 건립되고 1692년(숙종18) 이에 대한 사액(賜額)조치까지 행해지면서,그 의 신 주는 단종 조 여 러 충 신의 위 패 와 한 곳에 모셔지게 되었다.실로 사 후 216년 만에 이루 어진 충혼 (忠魂) 의안식이었다. 그 렇게 100여 년 동 안 모 셔져 있 던 신주는정조(正祖)연간에이르러 봉 안과 관련한 한 차례 논란에 직면하 게 되었다. 1788년(정조12) 4월, 충청 도 비인(庇仁)의 유학(幼學)이자 박 호의 후손인 박사동(朴師東)이 상언 (上言)하여 자신의 외선조인 성삼문 을 위 해 사 우(祠宇)를 세 우고 서원 에 있는 신주를 그곳으로 이봉(移奉)하 게 해 달 라고 청 한 것이 다. 이 에 대해 정조 는 “이 는 상 언할 일 이 아니 다. 그 에게분부하여즉시제사를주관하게 함으로써충신의굳센혼백이의지하 여 편히 쉴 곳 을 얻 을 수 있게 하라 .” 라고 판하(判下)하여,박사동의 요청 대로 성삼문의 신주를 외예(外裔)쪽 으로옮겨주도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로부터 5개월 이지난뒤,이번에는노은서원이있 는 홍주의 유생 김방언(金邦彦) 등 이 상언하여 박사동의 집안으로 이 봉한 신주를 다시 서원으로 옮겨와 모시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사육신 을 주 배향인으로 삼고 있는 노은서 원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후손의 청 이 있었다 하더라도 오래도록 자신 들이 받들고 있던 신주를 갑작스레 다른 곳으로 이봉한다는 것은 받아 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상언을 접 한 정조는 이것이 가벼이 처리할 사 안이 아니라 여겨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할 것을 명하였고, 이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 좌의정 이 성원(李性源), 우의정 채제공(蔡濟 恭) 등 조정의 중신들이 의견을 제 출하였다. 이들은 모두 과거 선정신 (先正臣)송시열의 주장에 의해 노은 동 봉 안이 결정 된 이래 약 100여 년 동안신주가이곳에모셔져있었다는 점, 그리고 대수(代數)가 멀리 떨어 진 외 가 후 손 에 게 섣 불 리 제 사 를 맡 길 수 는 없 다 는 점 등 을 주 요 한 근 거 로 들며, 신주를 서원으로 환봉(還 奉)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 은 건의가 받아들여져, 수개월 동안 노은서원을 떠나 있던 성삼문의 신 주는 다시 본래 장소로 귀환하게 되 었다. 잠시 신주를 모셔왔다가 곧바 로 반환하게 된 박사동은 1790년(정 조 1 4 ) 에 도 두 차 례 상 언 하 여 신 주 를 받들수있기를바랐으나,판결이또 다시뒤집히지는않았다. 그런데 신주 천봉(遷奉) 논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1804년(순 조4) 상주(尙州)의 유생 성억주(成 億柱) 등의 상언으로 인하여, 성삼 문의 방손(傍孫)으로 하여금 별도 의 사우를 지어 제사를 지내도록 허 락하는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이에 성삼문의 신주는 박사동의 상언 이 후 1 6 년 만 에 다 시 서 원 을 떠 나 방 손 의 집 안 으 로 옮 겨 졌 다 . 그 러 자 이 번 에도 서원 측에서 강한 반발이 일어 났다. 1807년(순조7)에는 홍주의 유 학 조억기(趙億基) 등이, 이듬해에 는 같은 지역의 유학 최건(崔 괜) 등 이 상언하여 신주를 다시 서원에서 모실 수 있기를 청하였다.특히 최건 은 성삼문의 사판(祠版)은 제(題) 한 방 법 이 예 식 ( 禮 式 )과 달 라 가 묘 (家廟)에서 모시기에 적합하지 않 고,또이미오랫동안노은서원에봉 안하여 후세인들의 감회를 일으킨 바가 적지 않으므로, 이곳에 모시는 것이 사리에 마땅함을 주장하였다. 이와같은호소에대해순조는,선정 신 송시열이 의견을 내 결정한 사안 이고 방손(傍孫)에게 제사를 받들 게 하 는 것 도 예 에 맞 지 않 는 일 이 므 로 도로 노은서원에 봉안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우의정 김재찬(金載瓚) 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삼문의 신주 를 또 한번 서원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 결정이 내려진 이후에야 비로소 그의신주는더 이상 이봉논 란을 겪지 않고, 1871년(고종8) 노 은서원이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될 때까지 이곳에 모셔질 수 있었다. 20여 년에 걸쳐 이어진 봉안 논쟁이 마침내종결된것이다. 정조~순조 연간 성삼문의 신주 봉안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와 같은 논 쟁의양상은,조선시대를대표하는충 혼을 자신의 손으로 받들고자 한 후대 인들의성심,또는그러한충절의상징 을 자신의 공간에 모셔둠으로써 그 권 위를높이고자한각주체의치열한노 력들을살필수있게한다. /글쓴이 정용건강원대학교 국어 국문학과BK21사업팀선임연구원 본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메 일링서비스를통해받은것입니다. ●고전산책븣정착하지 못한 충혼(忠魂)-성삼문(成三問)신주 봉안 논 쟁- 2009년 2월 3 일 경 주 교 육 문 화회관에서 개최 한 경주나정 정 비 기 본 계 획 학 술대회 논문집을 보면 경주대학교 이강근 교수는 2 002년부터 2005년 11월까지 4차에 걸쳐 나정비각 주변을 발굴한 바, 청동기 시 대부터 통일신라기에 조성된 다양한건 축유적을 여러 가지 확인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여 출간했다고 했다. 이 조사에 서 팔각형건물지가 나타났다. 이 팔각 형 건물지는 분황사지, 안압지 유적 등 에서 확인된 기단초석 등과 비교하여 삼국통일 직후에 조성됐을 것이라 주장 했다.그러나 조선 전~후기에관한 지리 지 모두가 양산나정(陽山蘿井)은 경주 부 남쪽7리에 있다고 만 했을 뿐 유지 (遺址)나 관련시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 기록이 없는 채 신화(神話)만을 게재하고있을뿐이다. 그런 데 조선 왕조 말 기인 순 조 3년 (180 3) 나정 앞에 처음으로 비석이 세워졌다 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나정유지”로 인정했다.그 당시 경상도 관찰사 남공철 (南公轍1760~1840)이 비명을 짓고 박씨 문중에서 비석을 건립하므로 나정은 비 로소 신화(神話)의 미로를 벗어나 박혁 거세시조왕의 탄강정(誕降井)으로 역사 속에 등장했다.이 비석은 가경 7년(1802) 2월에 비각기가 쓰여 졌다. 그런데 1760년 2월경주나정을찾은김상정(金相定1722~ 1788)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나정의 경관과 우물을 덮고 있는 돌과 네 귀퉁이 의 평평한 돌,그리고 주변지형보다 높은 위치 등 비 석의 건립 하기 전 의 상 황을 눈 에 선할 정도 로 잘 묘사 하고 있 다. 그리고 가운데 돌 한 개와 이를 중심으 로네모퉁이에배치된돌은1802년에세워 진 비석보호각의 초석(礎石)으로 제 자리 를 지켜온 듯 하다고 지적 했다. 나정은 신 라시조박혁거세의탄강지로 신라역사의 서막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웅장한 나 을신궁(奈乙神宮)이 세워진 뒤 법흥왕 때에 왕이 친히 신궁(神宮)에서 제사 드 릴 때 용이 나타났던 양산정(陽山井)으 로 두 번 째 등 장하 는 장소 이다 . 나을 (奈 乙)은 신라 왕조 내 내 역대 왕 이 신 궁에 친히 제 사할 때 마 다 행차 했던 장소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 위치나 나정의 관계 에 대 하여 기 록을 남긴 사 서(史書)는 안 타깝게도 전해오지 않는다. 2008년 10월 나정 발굴조사 보고서에서는 나정관련 시설 이 네 차 례에 걸 쳐 조 사된 것 으로 제 시하고 있다. 또한 나정에 선대유구(先 代遺口)로청동기시대 주거지와초기철 기시대 및 삼국시대 수혈유구(水穴遺 口)가존재하였음을분명히하고있다. 그리고 나정에는 8각형 건물지가 있 었던 것으로 조사됐다.나정의 9각형 건 물지는 신화적(神話的) 공간의 미로 (迷路)속에 갇혀 있다가 이제 막 세상 으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 속에 건축되어 신화를 담아내는 그릇으 로 사용되었던 건축 시설물로서 나정이 라는 현실의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다 . 이 8각 형의 건 물 중 심부 에는 성 물(聖 物)을 보장하고그 둘레에 4각형대좌,사 각형난간, 4각형기단을 두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고대 건축가들은 동서양 을막론하고신성한대상을설계할때 조 화로운 비례이론(比例理論)에 입각하 여목표를달성코자하였다. 나정 유적에서 발견된 8각형 건물지 는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원의 조화 속 에 설 계 되 어 있 다 는 것 이 이 번 조 사 에 서 처음 밝혀졌다. 그것이 당대인들이 이상(理想)으로 생각했던 조화라고 생 각된다. 나정유적의 8각형 건물지는 한 국 건축사의 한 획을 긋는 대상임에 분 명하다 8각과 4각의 조화 속에 신라인 들이 담아내려고 한 상징성이 하늘과 땅의 조화로움을 상징한것처럼 추측된 다. 나정이 신라시조왕 혁거세의 탄강 지임을 감안하면 그분에게 신성(神聖) 을 부여하는 시설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의심의여지가없다. 그를 하늘의 자손으로 여겨 그분의 숭배(崇拜)는 바로 하늘의 숭배와 같이 제사로 연결되었을 것은추리가 가능하 다. 법흥왕이 이 신궁(神宮)에 행차하 여 제사를 드리는 동안 이 우물에서 용 이 나타났다는 기록은 그저 신화적(神 話的 )표현에 불과한 것인지는 알 수 가 없다. 어쨌든 나정은 신성(神聖)하게 보 이 도 록 하 기 위 하여 적 어도 세 차 례 구 조물이 건설되었음이 조사 확인됐다. 역 사 기록에 나정과 관련된 시설물로는 나 을신궁(奈乙神宮)이 있다. 나정이 곧 나 을(奈乙)이라는 주석이 있고 보면 8각형 건물이곧나을신궁으로판단된다. 신라 역대 왕들은 즉위한 후 이 신궁 에 행차하여 제사를 드렸다는 내용은 곧 하늘에 제사 드림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보면서 문헌으로 본 나정에 대한소고(小考)를맺는다. 한빛의메아리 박 희 학 븣숭덕전前참봉 (40)나정(蘿井)유적에대한역사(歷史) 뱚발뱞뱞행뱞뱞인:박순구 뱚취재편집:박상섭 뱚경영지원:박영일 기사제보븡광고신청븡구독안내 대표전화(053)588-7300 FAX(053)581-0067 뱚구독료년40,000 입금계좌:농협453013-55-000691 예금주:한빛신문 뱚뱜 42612 대구달서구달구벌대로1221(이곡동538-2)성창B/D5층 뱚뱜 본지는신문윤리강령및그실천요강을준수합니다 (2007년1월12일등록번호대구다-01225) 500만박씨성손의대변지 2007년1월24일창간(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