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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4월30일 토요일 7 (제184호) 관향조 종친회 한학자로 평생을 흠결 없이 완인 (完人)으로 살아온 노강 박래호 선 생의80평생을정리한책‘노강의족 적 ’이 지 난 달 말 전 남 장 성 의 기 양 정사(岐陽精舍)에서출간되었다. 가 난 한 가 정 에 서 태 어 나 서 당 에 서 공부하며학교의문턱을 밟아보 지 못했고, 관절염이라는 평생의 짐을 지고 살면서도 네 명의 자식 모두 대학을 졸업시켰고,후 학들을 위해 호경장학회를 설립하여 그동안 삶에서 얻어진 모든 것을 사회와 종중에 환원했던 노강 선생의 삶은 평범한 우리들의예기보다더욱값지고훌륭하다. 사진과 설명을 모아 1, 2, 3편으로 편집된 노강의 족적은 파 조 부호군 백우당 박상의 선생의 예언탑 사진을 첫 장에 실었 다. 이는 조상 없는 자손이 없는 것으로 숭조심을 엿볼 수 있 다. 그리고 부부를 낳아주신 양가 부모님의 말년 사진을 다음 에 실었고,고(故)청심당 심경순 여사와 혼인 이후 신혼시기, 중년기, 말년기를 차례로 서술하면서 사진으로 생생하게 전 했고, 먼저 떠나보낸 아내의 묘비와 찬양비 등을 모아 1편으 로 하였는데 부인 청심당에 대한 애뜻 한 사랑과 가족애를 드 려 다 볼 수 있 다 . 그리고독서를좋아했던아내청심당의정신을오래도록기 리기 위해 노강 선생의 이름 호(鎬)자와 아내 이름 경(敬)자 를 합하여 호경장학회 창립과정과 필암서원을 비롯 전북대학 교, 장성군의 청렴교육 등 각종 단체에 출강하여 강의해온 기 록 등을 모아 2편으로 하였고, 노강을 비롯한 먼저 떠난 부인 청심당 여사를 추모하는 글과 80평생 사회활동 이모저모를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기록과 사진을 곁들여 모아진 자료를 3 편으로구분하여엮었다. 그리고 큰아들 문학박사 택열 군에게 못난 아비의 마음을 잘이해해주고책을펴내주어고맙다는인사도곁들였다. 큰아들 택열 군은 “아버님이 남기신 삶의 발걸음은 우리 후 손들이나 후학들에게 삶의 나침판이 될 것으로 확신하며 글 한 줄,사진 한 장 남기는 것이 하찮은 것 같을 수도 있지만 그 한 마 디 그 한 장 면 이 우 리 의 인 생 을 바 꾸 는 결 정 적 계 기 가 될 수 있다고 말해 아버님에 대한 무한 신뢰와 사랑을 함께 표현 하고있다. 한편 ‘노강의 족적’은 비매품으로 책이 필요한 독자님들은 본보에 연락을 주시면 소량의 책이 구비되어 있어 받아 보실 수있다. 노강박래호선생의삶을그린‘蘆江(노강)의足跡(족 적)’출간 80평생살아온가족사와유학자로서의삶남겨 충주박씨 강릉공종회(회장 우숙)는 임인년을 맞아 선조 오 촌공의 효행에 함께한 호랑이를 기리고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효심이 지극한 효자, 효부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뜻에서 효행정열(孝行貞烈)의 本이되고 있는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 천리 348-1오촌공의 정문(旌門)정문 옆에 호랑이 동상을 건 립한다. 강능공 박효함(朴孝 )의 3세손인 효자 박응훈(朴應勳) 선생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효자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호 랑이도 감복(感服)하여 효자 박응훈 선생이 옥천읍내에 있는 조약국에 약을 지으러 오고 갈때와 경북 선산 이약국에 약을 지으러 오고 갈 때 선생을 등에 태워 다니고 하였을 뿐만 아니 라 아버지(소촌공 : 청주목사)의 묘 자리를 잡아주고 시묘(侍 墓)에도 곁에서 지켜주었다.범도 명이 있어 무주 덕유산에서 죽으니이에효자응훈선생은호랑이의유해(遺骸)를수습하 여 범이 놀던 자리에 묻어주었다. 그곳이 바로 영동군 황간면 소계리(小溪里) 산49-5번지 소촌공(邵村公)의 무덤 앞이요 소촌공 무덤을 호점산(虎占山)이라하고 범의 무덤을 호총(虎 塚)이라 이름 하여 비석을 세우고 매년 음력 10月11日 소촌공 묘사 후에는 주육(酒肉)등 제수(祭需)를 진설(陳設)하여 소 촌공후손들은범의절덕(切德)을기리고있다. 박응훈 선생은 1601년(선조 34)정려(旌閭)를 받았으며,동 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오르고, 황간(黃 澗)의송계서원(松溪書院)에배향되었다. 선생의 효행은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조선시대의 정치 ·사회·문화를 기사본말체로 서술한 역사서 ‘연려실기술’, 충 청도읍지(1684,숙종10)등에기록되어전해진다. 충 주 박씨 효 자 박응 훈 선 생 정 려 옆 호 랑 이 상 ( 像 ) 건 립 6월예정,온국민이다효심이지극한효자,효부가되기를간절히바라는마 음 오촌공박응훈효자정려 임인년을맞은금년오촌공과함께한호랑이를기리기위한사업의일환으 로정려옆에호랑이상이세워진다. 최근 멧돼지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묘소 피해가 심각 한 상황에 밀성박씨 의재공 종중(회장 근호)의 묘원 또 한심각한피해를입었다. 시제를 몇일 남기고 순산을 통해 발견한 묘원은 처참 했다. 깔끔하게 단장됐던 묘소는 갈기갈기 찢겨 멧돼지 가 휩 쓸 고 간 묘 소 주 위 에 는 고 랑 여 러 개 가 깊 게 패 였 고 주변에서는 발자국과 깊게 파인 흙 등 멧돼지들이 머 물다간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면서 경악을 금치 못한 다. 이에 종중에서는 종원들에게 급히 연락을 취하고 지 난 18일 굴삭기를 동원하여 봉분 수축과 잔디를 심어 사 초하고묘원주변을울타리작업을함께했다. 의재공 묘원은 지난 2019년 멧돼지 피해를 입어 보수 하고 철조망을 쳐 안심하고 있었으나 이를 뚫고 들어올 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이에 이번 울타리 작업에 조금이나마 안도 할 수 있으나 무등산 공원관리 구역으 로 수렵 등이 어려운데다 워낙 개체수가 많다 보니 걱정 이다. 한편 지난 20일 봉행된 시제에는 정규 집례관의 집례 로 현준, 성호, 상현 일가가 각각 헌관으로 잔을 올렸으 며,화석축관의독축으로진행되었다. 의재공은 시조왕의 47세이고 고려 벽상공신 좌 상공 의 증손자이다. 조선 성종사년에 태어나 문과로 문과로 통훈대부 고산현감 겸 전주진영 병마절제도위에 오르 고 증직은 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 부부총관이다. 슬하에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는 참봉공 후 만 령(萬齡),성균진사 휘 희전(希筌),현감 휘 천령(千齡) 으로 후손들은 광주 전남북, 경북 경주, 경산 등에 산재 한다. 밀성박씨의재공묘역사초및시향봉행 의재공박번선생의묘역이지난16일밤멧돼지습격으로심하게훼손되어18일사초와함께울타리작업으로묘소를지키려하고있 다. 멧돼지습격으로심하게훼손 묘역 사초를 마친 후손들이 지난 20일 시향을 봉행하고 있다.(사진 한학자정규현종의집례로현준초헌관이헌작하고있다.) 창평지역 향선생으로 지역의 문풍을 크게 일으킨 수죽헌 조홍립(1588~1640) 선생과 고직당 박영철 선생의 숭모비 건 립을위한작업이한창이다. 창평향교(전교 박문수)는 지난 연초 노강 선생에게 비문을 의뢰하여 비석을 다듬고헌성비와함께세울예정이다. 수죽헌 조홍립 선생의 본관은 창녕으 로 1579년에 진사시에 이어 식년시에 올 라 내직으로 한성부참군을 시작으로 십 여요직을 거쳐 승정원동부승지 가선대 부에이르렀다. 고향에 돌아와 향교에서 많은 후생을 양성하였으며, 사마재(司馬齋)를 건립 하는가 하면 많은 학전(學田)을 기증 면 학(勉學)의 바람을 크게 일으켰으며 제 봉 고경명 선생의 제자로 남기신 수죽집 (數竹集) 2권 1책은 성산유고(聲山遺 稿)를 부록으로하여 담양문화원이 번역 간행하였다. 고직당 박영철 선생은 지극한 효자로 유명하다.어느 날 어머니(계모)가 근심 에 젖어 있어 여쭤보니 남들 자식은 출 세하여 부모를 즐겁게 하는데 우리 집은 누구하나 출사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자 광해 혼정으로 과거를 접었으나 그날로 어머니를 동생 진재공에게 맡기고 계유 년(癸酉, 1633) 式年試(식년은 정기적 인 과거시험)때 나이 67세에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左郞:正六品)으로 재직 시 노모봉양을 위해 사직하고 다시 영춘 현감(永春縣監 :지금의 단양군 영춘면) 에제수되어선정을펼쳤다. 임금을 섬길 때는 네 차례 진언하는 충성이 있었으니 종묘 제례와 위차(位 次)의 차질(差跌)을 바로잡아 라는 상 소문이 첫 번째요. 光海가 계모인 인목 대비를 폐위하는데 항거하는 상소문이 두 번째요. 당시 언론이 임금의 비리를 막아주려 한다는 상소문이 세 번째요. 종묘사직을 위하여 큰 아들을 군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상소문이 네 번째이다. 뱚국가의 현재와 미래를 위하여 신하된 충성을 다하고 향리에 돌아와 기옹 정홍 명(畸翁 鄭弘溟) 명곡 오희도(明谷 吳 希道)와 도의지교로 지내면서 창평향교 에 조수죽헌(數竹軒)과 협력하여 서탁 을 마련하였는가 하면 진사답(進士畓) 300여두락으로 後進 교육에 면려(勉勵) 하였기에 세상 사람들은 忠孝學을 겸한 청결선생 또는 창평향선생이라 칭송하 였다. 선생의 문집은 2卷1冊으로 霧隱 杏巖 三止堂 세분의 遺稿와 편집되어 세상에 전해오고있다. 보국숭록대부행지중추부사 겸 예조 판서판의금부사 세자 좌부빈객을 역임 한 서준보 선생은 묘표에서 “치조(治 朝)에 서서 이름을 펼치기는 쉽고 난세 (亂世)에 당하여 몸을 조절 하기는 어려 우니 이점이 실로 선유(先儒)들의 일컬 어 이 르 던 바 로 서 이 에 능 히 그 몸 을 보 존하여 그 이름을 도망하는 자도 수천고 (數千古)를 걸쳐 손가락이 많이 굽혀지 지 않지만 마침내 신명(身名)을 더럽힘 없이 능히 현명결신(顯名潔身)을 극진 히 하는 이에 이르러는 어려움이 더 심 하는지라. 내가 보는 바로는 박공영철 (朴公英喆)인그사람이라.“하였다. 한편 1398년 창건된 창평향교는 대성 전과 명륜당이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 재 제104호에서 지난해 12월 12월 대성 전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2099호로, 명 륜당이 보물 2100호로 문화재청으로부 터보물로지정되었다. 전남창평향교수죽헌조홍립·고직당박영철양선생숭모 비세운다 창평향교,담양군고서면교촌길43-11 창평향교이건과문풍을일으키는데큰역할 3 월 하 정 (下 丁 ) 을 맞 은 지 난 2 4 일가사문학의선구자이며임진왜 란 때 수군으로 종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이후 해안지방의 만호(萬 戶)를 역임한 노계 박인로(朴仁 老, 1561년~1642년) 선생의 충의 (忠義)와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 한 추모제향이 영천시 북안면 신 평탑골길 93-57 도계서원(道溪書 院) 입덕묘(入德廟)에서 지역 유 림과 후손 등이 참례한 가운데 봉 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오전 10시 개좌를 열어 지난 4월 6일 천거되어 사전 천권(薦券)이 발송된 오집사를 제 외한 집사를 분정한 후 11시 정락 용(鄭洛溶)집례관의 창홀에 따라 윤장환(尹章煥)원장의 분향 및 강신,전폐례,초헌에 이어 이 용환(李瑢煥), 손훈(孫勳) 유학자가 차례로 아헌과 종헌관으 로 헌작하고 김동영(金東英)축관의 독축으로 30여분에 걸쳐 진행되었다. 도계서원은1707년 노계 선생을 숭모하는 유생들의뜻을모 아선생이타계한지65년만에도계사(道溪祠)를세워향화를 받들며 선생이 높은 학덕과 충의정신을 기려왔다. 그러나 창 건 161년만인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 다. 처음 도계사가 세워진 곳은 괘화마을(현 도천1리) 동북쪽 언덕 괴화마을이 보이는 풍덕산 중턱으로 현재의 도계서원은 1970년 후손들의 정성으로 복설하면서 지은 곳으로 서원강당 은 전면 4칸의 비교적 규모가 적은편이고, 강당 뒤에 사당인 입덕묘와 왼편에 선생의 문집 판목(경북 유형문화재 제68호) 이보관되어있다. 노계 선생은 조선시대를 양분하는 임진왜란 시기에 11편의 가사(歌詞/歌辭)와 68수의 시조(時調)와 100여수의 한시(漢 詩)를남겼다.그는60여수밖에전해지지않는조선시대가사 중에 11수를 남겼고,그의 청빈한 삶과 결부돼 ‘가성(歌聖)’이 라일컬어진다. 노계 선생은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한국가사문 학의 3대 시성으로 자는 덕옹(德翁),호는 노계(盧溪)·무하옹 (無何翁)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영천에서 출생하였으 며, 어려서부터 시에 뛰어났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 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 되어 그 막하로 종군하였고, 1598년 왜군이 퇴각할 당시 사졸 (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가사 븮태평사븯(太平司)를 지었다. 선생이 남긴 중요한 작품으로는, 조홍시가, 누항사, 선상탄, 사제곡, 영남가, 노계가, 입암별곡, 소유정가, 노계집 등이있다. 선생은무예에도남달랐다.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수문장(守門將)·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조라포(助羅浦) 수군만호로 부임하여 군사력 배양을 꾀 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뒤에 사직하고, 고향 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심하여 많 은 걸작을 남겼으며, 성리학으로 눈을 돌려 식 음을 전폐하며 사서삼경(四書三經)으로 빠져 들어갔다. 한 번은 성현(聖賢)의 기상을 묵상 하다 꿈을 꾸었다. 이때 꿈속에서 얻은 성·경· 충·효(誠·敬·忠·孝)는 노계 사상의 요체로 이 해되고 있다.노계는 이 네 글자를 좌우명(座右 銘)으로 삼았다. 이후 한음 이덕형(李德馨) 등 과 교류하며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 詞)’ 등을 지으며 말년을 보냈다. 노계 선생은 인조 13(1635)년 75세를 일기로 타계(他界)하 여, 1630년(인조 8) 노인직(老人職)으로 용양 위부호군이되었다. 도계서원춘향봉행 가사문학의선구자노계박인로선생학덕기려븣지역유림과후손등 도계서원전경,①사당입덕묘②노계집판목각③강당④화장실 도계서원의제의(祭儀)는엄격하다경북지역유림향 사로봉행된제례에개 좌를열어분정기를기록하고있다. 노계박인로선생을모시는도계서원춘향이3월하정인지난24일봉행되었다.(사진제관앞줄오른쪽에서 부터축관김동영,집례정락용,종헌관손훈,아헌관이용환,초헌관윤장환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