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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4월30일 토요일 5 (제184호) 관향조 종친회 대표이사박종현(밀성박씨행산공后)拜上 ‘코로나19’우리는이겨낼수있어요 ~~ 소상공인여러분힘내세요^ *^ 조고명공축(祖考命工祝, 할아버지가 축관에게 명해서)하야 승치다복우여효 손(承致多福于汝孝孫, 너희 손자들에게 많은 복을 받게 하노니 오너라)하노니 래여효손(來汝孝孫, 손아)아 사여(使汝, 너로 하여금)로 수록우천(受祿于天, 하 늘에서 복을 받게 하여)하며 의가우전 (宜稼于田, 논밭에 농사를 잘 짓고)하야 미수영년(眉壽永年, 오랜 세월 누리며) 에물체인지(勿替引之,기울어지는일이 없게계속하여라)하라 [해설] 할아버지가 축관에게 명해서 너희 손자들에게 많은 복을 받게 하노니 오너라.효손아너로하여금하늘에서복 을 받 게 하 여 논 밭 에 농 사 를 잘 짓 고 오 랜세월누리며기울어지는일이없게계 속하여라. 이상은 삼송재 제향 의식에서 음복례 를 마치고 제수의 포를 초헌관에게 주면 서 조상이 복을 내리는 말씀인 致告 意詞 (치고하사)이다.삼송재 제향은 율곡 이 이 선생의 가례를 본받고 있다.음력 3월 14일 사문진사공 이하 6대(代)의 단소 와 이조좌랑공, 소부시판사공의 묘제를 봉행하고 다음날인 15일에는 간의대부 공, 정재공 묘, 6위 단소, 신령감무공 묘 제 순으로 각각 봉행한다. 이에 지난 14 일부터 15일까지 봉행된 제향은 수원향 교 전교를 연임하는 등 제례에 박식한 원준 직전회장과 밀성재 대종회장을 맡 고 있는 원주 회장, 성균관 부관장인 흥 식 전 신덕왕릉 참봉이 제례를 지도하면 서전통예절의모범을보여주었다. 삼송재 주변에는 아름다움을 한껏 뽐 내 며 우 뚝 서 있 는 소 나 무 세 그 루 가 있 다. 정재 선생의 평일 행세의 바름에 감 응되어 생긴 것으로 그 수는 윤리의 한 그루와 중국 섬서성 서안시 남전(藍田) 의 두 소나무를 합한 것으로 정재 선생 의 충절과 곧은 선비 정신을 비유한 것 으로보인다.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의 휘(諱)는 원(元)으로 고려조에 사문진사 또는 국 자진사를 역임했다.밀성대군(密城大君 휘 언침)의 10世 支孫(시조 39世孫)으 로 太師公언부(彦孚)의 둘째아들 諱義 臣의 長子다. 유지가 밀양시 하남읍 귀 명동이라 하나 전하지 아니한다.배위는 계림김씨이며 원덕사에 배향하였고 전 북 김제시 상동(삼수동)에 삼송재 주변 에후예6위와함께설단했다. 사문진사공의 후예는 대대로 고려조 에서 그 이름을 떨쳤으며, 6세에 이르러 휘 화 (華 )는 1 2 5 2 년 에 출 생 통 헌 대 부 밀 직부사 상호군에 이르고 삼중대광 우정 승판전리사에 추증되었다. 충효로서 세 인의 칭예를 입었다. 인간(仁幹), 인지 (仁 祉), 인기(仁杞), 인 익 ( 仁 翊 ) , 인 우 (仁宇) 등 5형제를 둠으로서 가문이 크 게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전북 김제 를 중 심 으 로 군 산 , 완주, 전남 함평, 경 북 의성, 울진, 강원 삼척, 횡성, 대구 등 에 큰 집 성 촌 을 이 루 고있다. 한편 이날 제향 전 가진 정기총회에서 원주 대종회장은 코 로나19로 인해 많은 일가분들을 초청하 지 못해 송구스럽다고 말하고 내년부터 는 많은 후손들이 참례하여 축제의 장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회의에서는 효명 감사의 감사보고와 지난해 수입 지출에 대한 결산, 사업계 획,예산안등을원안가결했다. 2022년도 주요 사업계획으로 삼송재 주변 토지 점유자들이 매수를 희망하면 매각키로 하였으며, 인터넷족보 구축, 묘소수목 정비 등으로 이중 인터넷 족보 는 1 9 8 4 년 대 동 보 발 간 이 후 지 면 족 보 가 아닌 젊은 층이선호하는 인터넷 족보로 대신하는것이다. 삼송재춘향봉행 율곡선생가례본받아븣 2022년주요사업인터넷 족보 구축 사문진사공 이사 6위 단소 제향이 지난 14일 봉행되었다. 사진은 제관 오른쪽에서부터 흥식 집례, 현기초헌관,대엽아헌관,전근종헌관,원준축관,원주대종회장順. 삼송재제향신위도 지난해부터 세보편찬을 추진하고 있 는 밀양박씨 규정공 후 참판공파 시향이 지난 7일 오후 2시 전북 완주군 용진면 상삼리관전마을선영에서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코로나19로 인해 경산· 고흥·부안 문중의 임원진이 참석 세종 때에 훈련원관사(訓練院 癩事)와 호조 참판을 지내고 충간(忠簡)의 시호를 받 은 파조 참판공(휘 눌생, 訥生)과 생육 신에 비유된 충양공(忠 웩公) 휘 경신 (諱 景愼)부자(父子)의 높은 학덕과 충 의정신을기렸다. 핫判公(참판공)의 자는 돈지(惇之) 휘는 눌생(訥生) 호는 운수이며 시조왕 의 4 9 세 손 으 로 규 정 공 휘 현 (絃 )이 고 조 가 된다.호조전서 휘 침의 3남으로15세 부터 목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으며 1409년(조선 태종9년) 36세에 문과에 급제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 을 시 작 으 로 두 루 요 직 을 거 쳐 세 종 때 에 훈련원관사와 호조참판을 지냈으며 1449년(세종 31년) 8월 7일에 하세하니 향년 76세였다.배위는 중추부사 허해의 따님이다. 의정부좌찬성에 증직(贈職)되고 시 호는 충간(忠簡)으로 고흥(高興) 숭양 사(崇陽祠), 장흥 세덕사, 경산(慶山) 율산서원(栗山書院)에 배향(配享) 되 었다. 아들 충양공 휘는 경신(諱 景愼)으로 자는 자흠(子欽)이고 호는 둔수(遯 쑴) 로 배위는 정부인 경주이씨이다.1414년 (태종14)에 출생하여 1438년(세종20) 2 5세에 등제(登第), 경주판관(慶州判 官), 1453년(단종) 훈련원사직(訓練院 司直)으로 재직 중 세조의 왕위찬탈에 종형 청재공(諱 審問)과 함께 단종(端 宗) 복위(復位)에 뜻을 같이 하여 곧은 마음과 숨은 절개는 생육신과 비유되었 다. 묘소는 全州 東十二里 소양산 (韶陽 山) 표동(瓢洞) 계좌(癸坐)이나 실전 선고묘하(先考墓下) 설단(設檀)하였 다. 철종(哲宗), 병진(丙辰) 1866에 비 로서 호조판서를 증직을 받고 충양(忠 웩)의 시호(諡 煮)를 받았다. 경산의 율 산서원(栗山書院)배향되었다. 이날 제향후 가진 결산총회는 행정관 청의 장부만큼이나 완벽하게 정리되고 경산문중과 고흥문중 대표자의 지출결 의서 결재 등이 이루어져 종원들의 이해 가 빨라 별다른 이의 없이 원안가결 했 으며, 현재 제복으로 사용하는 관복이 오래되어도포로일신(一新)키로했다. 박종성 회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지 난해부터 추진중인 세보편찬사업에 적 극 협조하여 누보되는 종원이 없도록 하 여 가보로 남을 수 있는 완벽한 족보를 만들자고강조하고협 조를당부했다. 참판공 문중은 지난해 족보전문업체 대보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자손록은 현 재 수단을 접수하고 있으며,선원록은 선 조의 행장과 비문 등을 갖추고 이미지 부 분은 본보에 의뢰하여 드론촬영으로 산 뜻한이미지구현에최선을다하고있다. 한편 참판공의 아버지 전서공을 비롯 한 규 정 공 에 이 르 기 까 지 3 대 의 향 사 를 주관하는 봉서재는 이날 오전 단소와 묘 소에서 전서공 종중(회장 종식) 주관으 로 전국에서 많은 후손들이 참례한 가운 데엄숙봉행되었다. /박방무명예기자(경북경산시지부) 밀양박씨규정공후참판공파원모재세일제 봉행 참판공·충양공높은학덕븡충이정신기려븣세보편찬심혈을기울여길이남을가보(家寶) 로만들자 참판공제관, 왼쪽에서두번째부터축관 창균, 초헌관 종성, 아헌관 순우(적명방무), 종헌관 병우, 집례형상,찬창재균 충양공제관,왼쪽에서두번째부터축관 병목,초헌관 윤균,아헌관 성삼,종헌관 진근순 전주박씨대종회(회장 순영)는 지난 달 27일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산 174-1번지 소재 효자 죽정공 박진 선생 의 묘소가 오랜 세월동안 풍파 속에 봉분 이 내려앉아 사초와 함께 입구 표지석을 세웠다. 순영 회장은 그동안 매양 송구스럽고 죄송할 뿐이었는데 이번 사초로 단정하 게 조성된 묘소를 올려보며 후손된 도리 를 조금이나마 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 하고 후손들의 관심과 숭조사상 고취를 독려했다. 죽정공은 완산대군의 16세손으로 군 수(郡守)의 관직(官職)을 수행(遂行)하 다 부친(父親)의 병환(病患)이 위독(危 篤)하다는 소식을 듣고 부친을 모시기 위해 1395년 관직(官職)을 사직(辭職) 하고 황급히 서둘러 가마를 재촉하여 부 모님이 계시는 전주부(全州府)에 이르 니 장마로 남천이 범람하여 다리가 부수 어져 떠내려가고 길은 끊겨 이미 몇일 동 안 아무도 통행(通行)을 못하는 실정이 었으나 위독한 부친을 생각하면 한시라 도 지체할 수없는 심정인지라 위험을 생 각할 겨를도 없이 말을 채찍질하여 곧바 로 강으로 뛰어들었다.그는 하늘이 감동 (感動)했음인지 이상하게도 강물이 갈 라 져 어 렵 지 않 게 강 을 건 너 고 나 니 강 물 은 다시 합해져 흐르는 것으로 주위사람 들은놀라며탄복해마지않았다. 어렵게 도착 아버지 병구완에 정성을 다하였고 효행으로 지극히 모셨으나 동 지(冬至) 섣달 엄동설한에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누워 계시면서 아버지가 아무 런 음식을 못드시기에 음식 드시기를 간 청하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고 삶은 꽃을 먹고 싶 구나 하셨으나 때가 아닌데 어떻게 한단 말이냐 하고 한탄을 하였으나 선생은 목 욕을 재개하고 하늘에 축원을 하였다.그 리고 양지바른 산을 찾 아 나서니 이상하 게도 몇몇 진달래 나뭇가지에 홀연히 꽃 이 피 어 있 어 그 꽃 을 꺾 어 다 삶 아 서 아 버지에게 올렸으며 수박과 잉어를 구해 음식을 올렸다. 이일로 인하여 그 꽃을 얻은 산(山)을 박모산(朴某山)이라고 이름 붙여 불러졌다.이렇게 정성을 다하 여 부친을 공경하였고 또 다른 효행으로 때가이른 시기에 수박이먹고 싶다는 아 버지의 말씀에 어려운 수박을 구해 아버 지에게 올렸다는 내용이 알려져 그곳을 수박동이라 이름 붙여 부르기도 하였고 잉 어 를 구 한 곳 을 잉 어 소 라 이 름 이 붙 여 져전해지고있다. 병환(病患)을 구완하여 부모에게 효 행을 한 사실과 부친께서 세상(世上)을 뜨시어 그는 통곡(痛哭)하면서 시묘(侍 墓)생활(生活)을 3년간 실시하는 등 효 행이 지극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 당시 금세(今世) 증삼이라 불리었 으며 전주부사 성석용이 선생의 효행을 가상히 여겨 임금님에게 글을 올려 그 후 이조(李朝)초기 태조(太祖)7년 (1398. 무인(戊寅))에 효자비(孝子碑)를 정려 (旌閭)받아 전주시 남문거리에 최초 건 립이 되었으나 도시발전으로 비각은 전 주시(全州市) 교동 전주향교(全州鄕校) 앞에 이축 되어 후손에 의해 보존(保存) 되고있다. 2009년 전주시 향토문화유산 제5호로 지정된 정려비는 전북 전주시 교동 전주 향교 정면 우측에 있으며 순조 5년(180 5)후손 필성이 지은 ‘全州府(전주부)孝 子(효자) 朴晉(박진) 旌閭記(정려기)’ 가 걸려있고 그 아래 자연석의 비석이서 있다. 전면 중앙에 븮孝子郡守朴晉之閭븯라고 새기고 좌측에 븮洪武(홍무) 三十一년 戊 寅立븯 우측에는 븮崇禎後再甲辰十世孫 重 刊立閣李龜靈書븯라 추각하였다.지상높 이 104㎝, 폭은 윗변 58㎝, 뒮변 48㎝, 두 께 17㎝로 홍무31년은 1398년이다. 전주박씨효자죽정공묘역사초 작업마쳐 효자죽정공묘소가지난 달 27일사초되어면모를일신했다. 태조(太祖)7년(1398븡무인(戊寅)에효자정려가내려진효자븣오랜세월견 디지못해봉분 내려앉아 묘역안내표지석 죽정공 효자 정려비각, 전북 전주시 향토문화유 산 제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