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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3월31일 목요일 6 (제183호) 기 획 군수공파는 검교의정부우의정((檢校議政府右議政)에 이 르고 시호가 정후(靖厚)인 휘 가흥(可興)의 둘째아들로 정종 2년(1400)에 태어나 대흥군수를 지낸 휘 순명(順命)으로부터 문호가 열린다.공은 시서(詩書)에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였 으며,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대흥군수로 있을 때 몇 달 이 안 되는 동안에 공의 정사에 감화되어 백성들이 안정을 되 찾았다. 특히 사리사욕을 멀리하고 깨끗한 정사는 청백리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충분히 영전할 수 있었음 에도 영달을 멀리하고 거문고와 시서(詩書)를 가까이 하려고 낙향하였으니 도연명과 같은 높은 뜻이 있었다고 세인들은 말하였다. 순천박씨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고려 시대 문관의 품계 정1품)으로 승주군(昇州君)에 피봉(被奉) 되고 사후(死後) 해룡산신(海龍山神)이 되어 전남 순천지방 의 수호신으로 받들어 온 삼중대광공 휘 영규(英規, 후백제 견훤의사위)시조공(公)을득관조로하고있다. 그러나 이후 세계(世系)가 실전되었고, 고려 정승 평양군 (平陽君)에 봉해진 휘 난봉(蘭鳳)을 중흥조로 하였으나 다시 世系가 실전(失傳)되어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한 휘 숙정(淑 貞, 號 竹溪)을 기(起) 1세(世, 中祖)로 하여 계대(繼代)되어 지금에이른다. 중흥조 휘 난봉 이후대제학공 휘 숙정(淑貞)에이르기까지 세수(世數) 실전에 대해 먼저 중흥조와 세수 실전에 대해 고 찰해본다. 중흥조 휘 난봉(蘭鳳)은 고려 정승(政丞)이며, 평양군(平 陽君)을 봉작(封爵) 받았으며, 별세한 뒤 인제산신(麟蹄山 神)이 되었다.(여지승람) 순천박씨 을사보(1785년 발행)에 의하면 묘는 순천부 서쪽 3리의 지점인 향교 좌편 분죽 밭에 있는데 봉역(封域)이 지금도 완연하며 영험이 있다하나 다만 고로(故老)들의 전설일 뿐 비지(碑誌)와 같은 증거 할 만한 자취가 없으므로 오래도록 수호하지 못하 였고 그 산 이름을 난봉산이라부르는데공의휘자와동음(同音)이요공을이산 에 장사하였으므로 생긴 이름일 것이다. 1694년(숙종 20)에 후손 치도(致道)가 위원(渭原)의 적소(謫所)에 있을 때 부인 이씨에게 기이한 꿈(夢兆)을 꿨다고 이야기를 하였으므로 당 시 읍재(邑宰) 박두세(朴斗世)와 상의하여 인제산 위에 신사 (神祀)를 건립하였으니 즉 지금의 유지(遺址)가 있다고 평양 구지에 기록되어 있다. 1858(철종9)년에 후손 문현(文鉉)이 순천부사로 재직할 때 호남의 족친 해승(海升) 등이 봉축(封 築)하여 수호하기를 청하므로 모두 이의가 없고 또한 사적이 강남악부(江南樂府)에 실려 있어서 드디어 여러 종친들이 힘 을 합하여 묘를 봉축했다. 그러나 비지(碑誌)같은 믿을만한 증거가 없어서 장차 단(壇)을 모아 비석을 세워 후세에 전하 려 했으나 곧바로 전임(轉任)되어 이루지 못하였다.그후 191 0 년 에 진 사 해 승 ( 海 升 )과 삼 종 손 (三 從 孫 ) 노 정 ( 魯 禎 )이 제 종 에게 순의(詢議)하여 비로소 비석을 세우고 금양(禁養)을 정 하였다.묘소는순천시금곡동산13번지추원단(追遠壇)술좌 (戌座)이다.지금 순천 주민들이 그 산을 박난봉산 그 묘를 박 장군묘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예를 숭상했지 않나 생 각한다. [을사보이하세수(世數)실전(失傳)-을사보(1785)에말하기 를 고려사 백관지를 상고하건데 충렬왕 34 무신(戊申,1308)년 은충선왕의원년인데시중(侍中)중찬(中贊)등의관작을정승 (政丞)으로 고치고 이성(異性) 봉군도 이때부터이라니 정승공 (휘 蘭鳳)의 세대가 고려말기로써 대제학공(휘 숙정)과의 서로 떨어진거리가멀지않은것같다.임술보(1862)에말하기를고 려사를 상고하건데 시중을 정승으로 고치고 이성에게도 봉군 한것은충렬왕34년무신(1308)년인즉정승공(휘난봉)은마땅 이고려말기사람일것이고대제학공이충숙왕12년(을축,132 5)에관동존부사(關東存撫使)가되셨으니무신년(1308)과서로 떨어진 시기가 불과 19년이고 또한 대제학공의 증손 휘 가흥 (可興)공 부인 정씨가 충목왕 병술(丙戌,1346년)에 출생하였으 니이로미루어보면공의생년이또한병술(1346)안팎을지내 지 않을 것이니 병술년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무신(1308)년 까지가불과39년이고휘가흥공이대제학공의증손이된다고 하였으니 정승공이 비록 오래 수(壽)하였다 해도 정승 되고 봉 군된것은반드시충선왕과충숙왕때일것이니대제학공이마 땅히 아들 항열일 것이고 촉대(促代)가 되더라도 손항(孫行)쯤 될 터인즉 두어 대를 실전하지 않았나 짐작되며 대광공(휘 영 규)으로부터 정승공(휘 난봉)까지는 아마도 8~9세는 지냈으 리라] 중시조(1世) 휘 숙정(淑貞)은 고려 보문각대제학이며, 공 이 풍류와 표치가 세상에 뛰어나서 이제현, 안축 등 제현(諸 賢)들과 친교가 있었다. 충숙왕 1년(1314)에 경상도제찰사가 되었고, 충숙왕 12(1325)년 무렵에 국자감 좨주로 전임되어 유생들을훈도하였다.다시1326년 관동존무사가되었고고성 의 사선정(四仙亭)과 강릉의 경호정(鏡湖亭) 및 울진의 취운 루(翠雲褸:사라호 태풍으로 소실))는 모두 공이 창건한 것으 로 이제현, 안축의 기문과 이가정(李稼亭) 한강 정구 선생이 저술한서천부원군정곤수의행장에나타나있다. 부인 여흥민씨 사이에 아들 원룡(元龍, 2세)을 두었으니 고 려겸교이부시랑(檢校吏部侍郞)이다. 3世 휘 천상(원룡의 아들)은 공민왕 조정에 무과로 도첨의 시중(都僉議侍中)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이다. 고려말기 창왕 1년의 역성혁명기에 신흥 권신들이 무구(誣構)한 영흥 군 왕환(永興君 王環)의 진위지변(眞僞之辨) 사건에 내세운 사람을 부인(否認)하다가 무고죄에 좌죄(坐罪)되었고, 공양 왕 2년에 권신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이초(彛初)의 옥(獄)을 탈출한 김종연을 숨겨주다가 발각되었으나 정몽주 선생의 상소로 모면하고 조선이 개국되어 이태조의 징배(徵 拜)를 불복하다가 재산을 몰수당하였으나 태조 7(1397)년에 사유(赦宥)되었다. 4세(世) 휘 가흥(可興, 휘 천상의 아들)의 자(字)는 안중 (安中),충목왕 3년(1347)에 출생 검교의정부우의정((檢校議 政府右議政)에이르고시호는정후(靖厚)이다. 공은 우왕 4년(1378)32세로 경상도안렴사(조선조 관찰사) 로 발탁되고 예의판서(예조)에 오르고 전법판서(형조)와 군 부판서(병조)의 화직(華職)을 두루 거치고 고려말 역성혁명 기간에는 훈구원신들이 신승 권신들의 무함(誣陷)을 당하여 춘천으로 유배되고 영흥군 왕환의 지위지변에서 이를 부인하 다가 유배되었고,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유배 되었다가 정 포은 선생의 상소로 해배되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를 때 문숙공이 좌명한 훈공으로 평양군에 봉하여 정헌대 부 겸교의정부우참찬으로 높이고 망배(亡配) 정씨부인에게 는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을추중하였다. 공은 태종의 지우(知遇)를 받아서 특별히 융숭한 대우로 판 공안부사, 개성유후사, 유후(留后)와 검교의정부좌참찬을 제 수하였다. 세종도 겸교의정부우의정으로 높이어 치사하였고, 세종9년(1427)8월 21일에 고종명하니수(壽)81이다. 세종이 애석해하여 3일간 철조(輟朝)하여 예장하고 정후 (靖厚, 令樂終命靖 思慮不爽厚)라 시호를 내리고 예관을 보 내어치제하였다.그제문에“늙고어진신하로서일찍부터명 망이 높았나니 슬퍼함과 영화롭게 하는 전례를 마땅히 시종 토록 융숭히 할 것이다.경(卿)은 순후(醇厚)하여 부화(浮華) 하지 않았으며 침정(沈靜)하여지조를 지키었다.높은 벼슬에 올라서 드디어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다. 매양 글하는 선비를 쫓아 사귀었고 항상 시(詩) 짓기와 술로서 스스로 즐겼다. 벼 슬하며 처리함에는 작은 일에 구애하지 않았고, 몸가짐과 사 람을 접함에는 오로지 사랑과 은혜 베풀기에 힘썼다. 오로지 소고(昭考,태종을 가르킴)께서 포상하시어 은총을 두터이하 셨고,과인(寡人)도 믿고 중히 여기어 높은 벼슬을 주어 옛 덕 을 빛나게 하였다. 진실로 누대의 원로이며 백성이 우러러보 는 바이다. 어찌하여 하늘이 남겨 두지 아니하여 갑자기 슬픔 을 주었는고, 이에 전례를 명하여 소유(素惟)에 나아가 치전 (致奠)하노라. 아 수명의 길고 짧음은 진실로 이수(理數)에 달렸거니와 은례(恩禮)를 더하는 것이야 어찌 유명(幽明)이 하하여다르리요”하였다. 군수공파는 군수공의 6~7세에 이르러 구례문중, 청남문중, 용화문중,기촌문중,영월문중,유촌문중,신석문중,죽전문중 으로세파(世派)를이룬다. 군수공은 숙부인 경주김씨와의 사이에 환(桓) 흥손(興孫)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환(桓)은 개성유수이고 차자 흥손(興 孫)은훈련원첨정이다.군수공파를소개하기 전 그 집 안 에 퍼 진암울한시기를먼저헤아려보아야할것같다.가까운친척 으로 사육신의 한분이신 충정공 박팽년 선생을 빼놓을 수 없 다. 단종을 복위하려다 참화를 피하지 못했는데 군수공의 장 자 환(桓)과 차자 흥손의 아들 원영(元榮)또한 화변(禍變)의 가운데 있었기에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만 하다. 1452년 어 린 조카인 단종이 즉위하자 금성대군은 형인 수양대군과 함 께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동에 반 대 해 단종을 복위하려는 움직임에 금성대군이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개성유수공의 아들 한성판윤 휘 근양, 손자 통훈 대부 용궁현감 휘 포(苞), 증손 감찰 숭문(崇文) 등 4대에 걸 쳐묘소가실전되기에이른다. 현손 란(欄)의 자(字)는 언백(彦伯)이다. 효성이 지극하였 고,충절의 가문 후예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명윤,송방조, 이춘기,박규,손충,정연,박정훈,남경성,박몽열 등 40여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곳곳에서 적을 무찌르면서 왜놈들의 간 담을 써늘하게 하였으니 이 같은 사실은 우암선생이 쓴 송자 대전제148권발문에생생하게전해진다. 얼마 뒤에 읍재 한명윤이 상주목사로 배수되었다가 적에게 죽게 됨에 따라 여러 장수들이 공이 장수의 지략이 있다고 추 천하여 임시로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왜놈들의 약진이 두드러져 한양을 수성하기 위해 수많은 난관을 헤쳐 임금에 게도달하니가상하게여겨갑오방관(甲午傍官)으로주부(主 簿)가되었다. 뱚파조별 약사 순천박씨군수공파 순천박씨는 고려의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고려시대 문관의품계 정1품)으로 승주군(昇州君)에 피 봉(被 奉)되고 사후(死後)해룡산신(海龍山神)이 되어 전남 순천지방의수호신으로 받들어 온 휘 영규(英規,후백제 견훤 의사위로 태조 왕건이 877년생,장인견훤이867년생,태조께서큰 형님으로모셨으며시조공의장녀가 태조 의17 비인동산원부인으로시조공은870년초출생으로학계에서는보고있다.)공(公)을득관조로하고있다.순천 박씨 대동보인을사보(乙巳譜,1785년간행)에는시조공후8·9세실전되었고,고려정승평양군(平陽君)에봉해진 휘난 봉(蘭鳳)을 중흥조로 하였으나 다시 數世가 실전(失傳)되어 보문각 대제학,관동존무사를 역임하신 휘 숙정( 淑貞, 號竹溪)을기(起)1세(世,中祖)로하여계대(繼代)되어지금에이른다. 그리고 5세(世)에 이르러 문숙공파(文肅公派,휘 석명),군수공파(郡守公派,휘 순명),문목공파(文穆公派,휘 안 명), 의주목사공파(義州牧使公派,휘류성),진사공파(進士公派,휘두성),승지공파(承旨公派,휘수년),경력공파(經 歷公 派,휘 의번),생원공파(生員公派,휘 배원),제주목사공파(濟州牧使公派,휘 증원),판관공파(判官公派,휘 견원 ),감 사공파(監司公派,휘 성),충정공파(忠正公派,휘 팽년),교리공파(校理公派,휘 인년),수찬공파(修撰公派,휘 기 년), 박사공파(博士公派,휘대년),검열공파(檢閱公派,휘영년),전직공파(殿直公派,휘사제),인의공파(引儀公派, 휘득 금),부위공파(副尉公派,휘성금)등19지파로분파되어지난2015년인구조사기준105,208명으로남자53,0 34명, 여자 52,174명이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이번호에는 대흥군수를 역임한 박순명 선생을 파조로 하고 있는 군수 공파 를소개해본다. 군수공파연원 군수공(휘순명)제단,군수공파보에의하면양주서해랑리선조하에있다 고 전해지는데 후손들이 사화로 은거하면서 찾지 못해 실전되어 2019년 초혼하여제단을영동읍남전리산45-3에설단하여제향을받들고있다. 군수공의선원세계 고려정승평양군(平陽君)에봉해진휘난봉(蘭鳳)을비롯한 선조제단(전 남순천시) 군수공이하세계(世系) 감모재(경북 김천시조마면신곡리603 재사앞에도은공을비롯한 후손들의효자비가세워져있다. 상춘재(충북 영동군용화면용화리492 주부 공 휘 난 을 비롯 한 齋舍 주부공신도비와후손해관,승동의공적비가있다. 뱚▶7면으로계속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