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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1월31일 월요일 12 (제181호) 기획 병자호란은 1636년(병자년)12월 청 태종이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다.그리고 이 사건 은 가장 굴욕적인 사건으로 기록 된다.당시전국에서많은선비들은봉기하였고,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평양서윤(庶尹)홍익한(洪翼漢),교 리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등 은화의를반대하고척화의대의를밝히고나라에대한충성과부모에대한효도를더이상못함을안타까워 하면목숨을버렸다.그리고삼전 도의굴욕적인화의를전해들은의병들과선비들은숭정처사를자임하며은거하며절의를지켰다. 특히호남의병은화의소식에싸워보지도못하고돌아서야했기에그충격에또한컸기에이번호에서는병자 호란고부의병도유사박광형선 생과호남의병에대해소개해본다. 고부의병도유사박광형선생묘-전북순창군쌍치면옥산리무동마을입구.이묘는1978년경남양주에서이장되었으며풍수지리상 묘원조성시상석을하지말라는풍수의부탁이구전되 어상석은없으며아래후손의상석설치시천둥번개로한쪽이벼락에피해를보아파손되었다고전해진다.享음력3월3일,사진은 박광형선생의19世진태현종이묘역과선생에대해소개 하고있다. 의병도유사 박광형의 본관은 함양으로 중시조 상서공 휘 선(善)의 19대손으로 자(字)는 술지 (述之)이다. 상계는 속함대군 후손으로 고려조 예부상서를 지낸 휘 선(諱 善)을 중시조로 하여 기세(起世)하고있다. 중시조로부터 그의 10세손에 이르는 약 300년 동안 많은 현관(顯官)과 무장(武將)을 배출하여 명문으로 성장했다. 2세 휘 인정(仁挺, 예부상 서), 3세 휘 신청(信淸, 예부상서, 검교신호위 무 덕장군), 4세 휘 윤정(允禎, 판호부상서, 태부경 치사), 5세 휘 신유(臣 찮)는 은청광록대부(銀靑 光祿大夫), 판리부상서(判吏部尙書)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주국 판삼사사 (上柱國 判三司事)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는충질(忠質)이다. 충질공이 여섯 아들을 둠으로서 오늘날 함양박 씨 6지파(之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장자인 휘 지문(諱 之文)은 군기소감(軍器少監)으로 소감 공파(제1파), 차남 휘 지빈(之彬)은 조청대부 위 위윤(衛尉尹), 시호는 문원(文元)으로 문원공파 (제2파), 삼남 휘 지량(之亮)은 판삼사사(判三司 事) 판삼사사공파(제3파), 사남 휘 지수(之秀)는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밀직부사공파(제4파), 오 남 휘 지온(之溫)은 감찰어사(監察御使) 어사공 파(제5파), 육남 휘 지영(之潁)은 금오위 중랑장 (金吾衛中郞將)중랑장공파(제6파)이다. 밀직부사공(4파)의 6世 판서공 휘 습(習)은 공 민왕16년(1367년)에출생하고문과에급제하여자 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팔도순 찰사 출척사(八道巡察使黜陟使)를 지냈다. 태종15 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김제 벽골제를 수축하고 강 원, 경상도 관찰사, 대사헌, 공조판서를 역임하였 다.태종과동갑이고동방급제(同榜及第)하여태종 의 신임이 두터웠는데 애석하게도 당시 병조판서 강상인이 도성의 금위영군사 이동을 상왕의 재가 없이이동한데연루되어영의정심온,도총관심정, 참판 강상인과 함께 세조즉위년에 화를 입었다.아 들 오 형제 중 장 남 의 건(義乾)은 중추 부사 , 차남 의 곤(義坤)은 참의(參議), 삼남 의보(義甫) 등은 일 찍 낙향하였으나 후사가 없고, 사남 의경(義卿)을 조졸(早卒)하고, 오남 의손(義孫)은 사헌부감찰에 재직중연좌되어화를면치못해다. 이후 세종조에 여러번 신원(伸寃)의 청이 있었 으나 선조(先朝)에 한 일이라 불허하다 문종 원 년(1451년)에 우의정 남지, 좌찬성 김종서, 좌우 참찬 안숭선, 허우 등의 신원(伸寃) 주청(奏請) 으로신원되었다. 감찰공휘의손(義孫)의부인안동권씨(문충공 권근의 손녀)는 남편 감찰공이 아버지와 함께 화 를 면하지 못하고 남해로 유배되어 참화를 당하 고 백중씨(伯仲氏)의 부인들이 고향 함양 안의로 내려가며 동행하기를 권유하나 권씨부인은 “궁 벽한 시골에 가 있으면 박씨 가문을 재흥(再興) 키 어려우니 서울에 남아 기회(機會)를 기다린 다.”하고 따라가지 않고 어린 아들 신동(信童)을 데리고 살면서 가세가 빈약함으로 삯바느질을 해 가며 아들교육에 전념하여 어린 아들 신동은 어 머니의 뜻을 받들어 부지런히 학업에 힘써 마침 내 종사랑에 오르는 등 대성(大成)하여 가문을 부흥시켰다. 이후 증손 대립의 귀(貴)로 가선대 부이조참판에증직되었다. 그의 아들 중검(仲儉)은 성균생원으로 정종대 왕의 외손서(外孫壻)가 되기 때문에 병절사맹 (秉節司猛)을 역임하고 자헌대부 판서에 증직되 고장손대립의귀(貴)로추은(推恩)되었다. 특히 그의 부인 증(贈) 정부인 전의이씨는 정 종의 외손녀로 남편 이판공 사후(死後) 묘하(墓 下)에서 살며 장남 세영(世榮) 19세, 차남 세무 (世茂)는 12세, 삼남 세웅(世죕)은 6세로 철부지 아이들이 학업에 게을리 하면 이판공 묘전(墓前) 의 동자석(童子石)에 손을 매어놓고 종아리를 치 며 훈육하여 마침내 아들 3형제가 대소과에 급제 하여가문의영화(榮華)보게되었다. 장자 세영(世榮)의 호(號)는 구당(九堂)으로 자(字)는 경인(景仁), 성종11년(1480년) 11월 2 9일태어났다. 1504년 진사에 올라 태학(太學)에 유학(遊學) 할 때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1518년 사산감역관 (四山監役官,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 의 성곽과 숲을 지키던 무관)을 시작으로 주부 (主簿), 감찰(監察), 사평(司評), 형·공조(刑·工 曹) 정랑(正郞)을 역임하고 풍덕, 전주, 초계 군 수와 돈녕부정을 지내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에증직되었다. 贈 정경부인 광산김씨와의 사이에 아들 대립 (大立), 사립(思立), 희립(希立)을 두었으며, 셋 째 희립은 증조부인데 자(字)는 양백(養伯)으로 통정대부 길주목사를 역임하고 증직으로 가선대 부예조참판이다. 24세에 생원과 진사를 하고 36세 되는 1558년 (명종13) 문과에 급제하여 곧바로 괴원(槐院,외 교 문서를 담당한 관청)예 뽑혀 예문관 검열과 봉 교, 승정원 주서와 문학,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 언, 헌납을 두루 지내고 명종 21년에 함경도 재상 어사(災傷御使)로 나가 지방관의 불법을 시정 (是正)했다. 사헌부 지평과 장령을 지내면서 요승(妖僧) 보 우(普雨)를 탄핵하고 권신(權臣) 윤원형을 청죄 (請罪)하여사림(士林)의추앙을받았다. 공조, 병조의 좌랑과 예조 병조의 정랑과 사복 시정, 첨지중추부사, 파주, 청주, 길주의 목사를 역임하고 선조 7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이때 종계변무(宗系辨誣)의 功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올라 예조참판에 추증되 었으니 종계변무(宗系辨誣)란 조선 개국 초부터 선조 때까지 약 200년간,중국 명(明)나라 태조실 록 등에 이태조가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실려 정 정(訂正)에어려움이있었다. 조부 지원(知遠)의 字는 진이(進而) 호는 일소 재(一素齋)이다.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고 제 시직(除侍直)에 제수하였 으나 불취하였고, 아버지(考) 휘 유부(由孚)의 호는 눌헌(訥軒)으로 선조 무인(戊寅, 1578)에 태어나 병오(丙午,1606)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성품이 청결하고 강직하다 현달(顯達)하여 세마 (洗馬)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어머 니는 한산이씨 생원 경홍의 따님이고 이조판서 증(增)의 손녀로 공은 두분 사이에 선조 계묘(癸 卯, 1603)에 태어났다. 인조 을유(乙酉, 1645)에 동몽교관으로 천거되었다. 특히 1636년 병자호란 에 창의하였으나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합의로 고 향 정읍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으니 1651년(辛 卯)10월 24일이고,부인은 공인 밀양손씨로 묘는 순창군쌍치면옥산리무동마을입구유좌이다 병자호란은 1636년(병자년) 12월 청 태종이 2 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다. 정묘호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침 략하였으나 실제로는 명을 공격하기 전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우며 버텼으나 식량마저 끊어져 청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 서 청에 항복하는 의식을 치르며 전쟁이 끝났다. 비교적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항복 후 수 많은 전쟁 포로가 발생하면서 조선은 막대한 피 해를받았다. 당시 전국에서 뜻있는 선비들의 봉기(蜂起)하 여 의병으로 나섰다. 이때 호남지역에서는 옥과 현감 이흥발 등 5인이 임금을 돕고자 호남의 조수 생 등 과 여산 에서 만 나 전 참의 정 홍명 을 의병 대장 으로 추대하고 충청공주 청주까지 진격할 때 인조 가 청 나라 에 항복 하고 삼 전도 에서 굴 욕을 당 하며 전 란이 끝 났다 고 하는 소 식을 전 하여 듣고 한 양에 들어가인조임금을알현하고통곡하며돌아갔다는 줄거리로 1708년 ~ 1720년까지 김원행의 서문으로 정읍의 무성서원에서 간행한 병자 호남의병 창의 록이 5권 2책으로 구성되여 목판본으로 출간되여 그때의생생한상황을전하고있다. 당시 고부현 현재의 정읍시 고부면 박광형의 기록을보면다음과같다. 『박광형의 자는 술지이고 함양인으로 고려조 의 예부상서 휘 선의 후손이며, 15세조가 문하성 사 휘 신유 이고 왜군을 토벌한 공으로 응천군에 봉해졌고 11세조는 휘 인계로 병부상서 및 도원 사로 개태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여 함양군 에봉해졌다. 증조는 좌찬성 휘대립으로 증직은 영의정이며 호는 무환당이며 조(祖)휘 지원은 시직익위이고 부는 휘 유부로 생원이며 세자세마를 지냈다 호 는 눌헌이며 세마를 사퇴하고 고부현으로 낙향했 으며, 의병도유사 휘 광형은 이후 동몽교관에 제 수되어 후학양성과 지역에서 유림으로 활동한 기 록이 고문서에 나타나고 있다』배는 공인 밀양손 씨이다. 고부지역에서 의병에 참가한 기록 호남 의병창의록‘실적’에자세하게전해진다. 丙子胡亂 때에도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의병이 조직적으로 구성되기는 후방지역인 湖南 이었다. 청의 침입소식이 전해지자 옥과현감 이 흥발(李興 봉)·대동찰방 李起 봉·순창현감 崔 좋· 전 한 림 梁 曼 容 ·전 찰 방 柳 楫 등 이 자 진 하 여 의 병 모집에 앞장섰다. 丙子년 12월 19일 포위중인 남 한산성에서 위급을 고하며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 무기를 수집하여 청의 침략군을 무찌르라는 敎書 가 전달되자 의병의 움직임은 더욱 박차를 가하 게 되었다.《湖南丙子倡義錄권1,敎文》 이흥발(李興 봉) 등 위의 다섯 사람은 모의청 (募義廳)을 설치하고 이달 25일 도내에 격문(檄 文)을 보내어 列邑에 募義都有司·有司을 나누어 배정하고 일제히 궐기하였다. 曺守誠·曺 잘 등은 和順에서, 柳 은 光州에서, 金璇·羅海鳳 등은 羅州에서 먼저 起義하여 모였으며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다음 해 1월 20일 이들은 礪山에 모여 召募使의 任을 띠고 공주에 있는 鄭 弘溟을 大將으로 정하는 한편, 전라감사 李時昉 과도합세할것을결의하였다. 정홍명은 당시 충청도 의병장으로 공주에서 각 처에서 보내진 의병들을 점검하여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사람만을 선발하였는데 실적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그런데 그가 의병 장이 된 것은 官 에 의한 것이어서 의병장으로 소모사를 겸한 것 인지 아니면 의병장이 되었다가 소모사에 차정된 것인지는확실하지않다. 그러나 湖南의병의 구성은 정홍명을 대장으로 추대하기 전에 이미 갖추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도내列邑制책임자는다음과같다 ○옥과도유사:양산익·허섬·허정량·김홍서·정 운붕 ○창평도유사:남수·조수·류동기·현적·양천운 ·이중겸·안처공·남이녕·오이두 ○광주도유사:류평·신필·정민구·리덕양·고부 립·고부민·박종·박충렴·박충정·박창우·이정태· 이정신·복진빈·기의헌 ○남평도유사:최신헌·서진명·서행·윤검·홍남갑 ○능주도유사:량제용·주엽·문인극·위홍원 ○화순도유사:曺守誠·曺 잘·林時泰·崔鳴海 ○同福都有司:金宗智·丁之雋·河潤九·丁好敏 ○樂安都有司:李淳·柳潟·李純一 ○興陽都有司:丁運隆·宋裕問·丁煥 ○寶城都有司:朴春秀·朴顯仁·任梓·金鐵·安厚 之·李宗臣·李敏臣·廉來立 ○長興都有司:丁南一·金確·魏廷鳴 ○海南都有司 : 白尙 ·白尙賢·尹仁美·金鍊 之·尹惟翼·尹績·尹善繼 ○珍島都有司:校執網·留鄕所(人名未定인듯) ○古阜都有司:趙克納·崔敬行·金地文·金地英· 朴光亨·金地西 ○高敞都有司 :柳東輝·柳鐵堅,齋有司 :朴奇號 ·曺添·柳汝楷·柳之泰 ○順天都有司:安瑢·趙時一·趙時述·金廷斗 ○靈光都有司 : 李喜熊·李敏謙·李坵.李 ·宋軾 · 金 ·姜時億·丁名國·金尙敬·姜時萬·姜時健· 李暉 ○茂長都有司:姜·李,別有司:庾·康·吳·康 ○興德都有司:金·李 ○咸平都有司:鄭·鄭·李·鄭 이들 의병 소모에 활약했던 인사들 중에는 정묘 호란 때 의병幕府의 핵심 幹部로 활약했던 인물들 이 많다. 柳楫·安邦俊·李敏求·申 ·柳 ·朴忠廉· 具瑩·高傅敏·金海壽·金集·李德養·奇義獻·高傅立 ·朴琮·李鼎泰 등이 그러한 인물인데 이들은 위에 서 말한 《丁卯擧義錄》에 들어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호남의 경우 병자의병은 정묘 의병의 인물들이 다수 참여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서주도된듯싶다. 각 고 을 에 하 달 한 通 文 의 주 된 내 용 은 , 前 銜 進 士·忠義·校生·品官으로 싸움터에 임할 수 있는 젊 은이어야하며특히 勇力이 絶倫하고 計慮가 뛰어 난 자를 소출하여 명단을 작성, 一刻을 지체말고 裝束을 갖추어 本廳으로 보낼 것이며 나이 많은 사람들은 종군하는 代價로 노비를 대신 보낸다던 가 아니면 군량·군기·戰馬를 스스로 나서서 모아 서 보내되 列邑의 都有司는 거두어들인 실적을 우 선적으로급히보고할것을요구하고있다. 湖南丙子倡義錄에기재된實績은다음표와같다. 위 표에서 보면 의병조직에 비하여 실적이 너무 저조하다. 호남열읍(湖南列邑)에서 모집한 총계를 보면 의병이 207명, 모속(募粟, 쌀 등 곡식)이 475 石,의포(義布)가 40필,전마(戰馬)1필,長箭 36부, 長槍이 20병에 불 과한 숫자 이다 . 물론 여기 에는 광 주의 예에서 보듯이 이미 보낸 병력의 수와 그들이 가 지고 간 무 기에 대 한 통계 가 표기 되어 있 지 않고 남은 장전(長箭)만 표시하고 있어 확실한 수를 알 수 없 다. 이러 한 예 는 다른 고 을에 도 있을 것 을 감안 한다면 총계 실적보다는 훨씬 상회하리라는 것은 알 수 있 겠으 나 그렇 다고 크 게 기대 를 걸만 한 실적 은올리지못했던것으로보인다. 순천부의 경우 “本府는 본디 호남에서 큰 고을 인데 이렇게 망극한 날을 당하여 싸울 수 있는 의 병을 얻은 것이 30명에 그쳤다.” 금산의 경우 “의 병을 모집하는 일로 有司가 앞장섰으나 서원·향 교·忠義중 자원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 것, 그리고 순창현의 경우 의청(義廳)에서 “의병을 모집하는데 억지로 의병을 정하기가 매우 어렵 다. 의로써 분발하여 응모한 자 12명을 우선 보내 겠다” 한 것 등은 의병 모집의 많은 어려움이 있 었고 응하는 자가 거의 없음을 잘 말해 주고 있으 며타읍도예외는아니었다. 그후 소모사 정홍명은 호소사(號召使)의 직함 을 받 고 호 남 연 해 제 읍 으 로 의 병 소 모 차 길 을 떠 나서 당초 의병을 일으켜 모의청(募義廳)을 설치 한 이흥발·이기발·최온·양만용·류즙 등 5인이 주 축이 되어 여산에 모인 의병을 이끌고 포위된 남 한산성을 향해 출정 길에 올랐으나 청주에 이르 렀을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에 굴 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進軍)을 포기하고 의병을 해산하여 각자 자기 고장으로 돌아감으로 써 湖南의병은무위(無爲)로끝나고말았다. 안방준(安邦俊)은 이흥발(李興 봉) 등 이 설 치 한 모의청(募義廳)에 간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난이 일어나자 이웃 고을에 檄文을보내고수백 명의의병을모집하여싸움터 로 달려가다가 인조가 이미 출성(出城)하였다는 소식을듣자군사를파하고향리로돌아갔다. 의병은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원 종군하는 민군(民軍)이다.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으며, 고려·조선 시 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다. 특유의 의 병 정신이 조성되어, 승패를 가리지 않고 죽음을 결심하고 과감히 전투하는 것을 의병의 본분이라 여기게되었다. 박광형 선생은 세계최초 아동학습지 동몽선습 의 저자 박세무 선생의 후손으로 학문이 뛰어나 동몽교관으로 후학을 가르쳤다.그리고 병자호란 이 발발하자 붓을 잠시 내려놓고 즉시 의병으로 활동하는 등 사대부가의 후손으로 창의는 높은 도덕정신에서비롯되었다할수있을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묘소를 찾았을 땐 미안 함 뿐이 었다.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선현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나라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음에도 우리는 의병을 의병의 날 하루도 생각지 않고 있 을 뿐이다. 최근 각 지자체마다 남도의병공원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지금 이라도 순창군을 비롯한 정읍시에서 지역 의병에 대한 전수조사와 함께 그분의 명예는 물론 현창 사 업 에 매 진 하 길 기 대 해 본 다 . 병자호란고부의병도유사朴光亨 선조 유지를찾아븣 박광형 의병의 선원세계와 생애 박광형자료(병자의병창의록). 湖南丙子倡義錄 맺음말 호남의병(湖南義兵) 병자호란의도유사박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