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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1월31일 월요일 10 (제181호) 기획 謹 賀 新 年 임 인 년 새 해 선 조 님 의 음 덕 이 충 만 하 시 어 가 정 이 화 목 하 고 소 원 성 취 하 시 길 축 원 하 오 며 、 지 난 해 어 려 운 여 건 에 서 도 성 원 하 여 주 신 은 혜 에 감 사 드 립 니 다 。 코 로 나 이 길 수 있 어 요 우 리 는 할 수 있 습 니 다 。 성 손 여 러 분 힘 내 세 요 密 城 朴 氏 銀 山 府 院 君 派 大 宗 會 顧 問 박 병 립 박 율 교 박 도 문 박 재 술 박 한 기 박 병 식 박 희 학 박 순 엽 박 상 규 박 용 권 박 홍 기 會 長 박 신 재 副 會 長 박 영 광 박 영 태 박 해 원 박 종 도 박 동 근 박 원 환 監 事 박 원 목 박 재 윤 總 務 박 홍 제 財 務 박 승 제 축한빛신문창간15주년을축하합니다 추원재전경,은산부원군파齋舍(창녕계성면광계리) 2022년 임인년은 검은 호랑이의 해이다. 호랑 이는 용맹과 기개의 대명사로 불리면서도 우리 민화에 자주 등장한다. 그 중에서 효(孝)와 의리 (義理)를 빼놓을 수 없다. 효자 박응훈에 대해서 는 지난해 3월호 8면에 소개한바 있으나 호랑이 해를 맞이하여 재구성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번 취재에는 그동안 효자 박응훈 선조에 대해 많 은 기록을 더듬어 온 충주박씨 강릉공파 종친회 박우숙회장이동행하여보충해주었다. 효자 박응훈 선생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효 자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호랑이도 감복(感服)하 여 함께하며 지켜주고 아버지의 묘 자리를 잡아 주고 시묘(侍墓)에도 곁에서 지켜주었다. 이에 효자는 호랑이의 유해(遺骸)를 수습하여 묘소를 만들어주어 후손들은 매년 호총에 주과포와 술잔 을 올린다. 1601년(선조 34) 정려(旌閭)를 받았 으며,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 圖)에 오르고, 황간(黃澗)의 송계서원(松溪書 院)에 배향되었다. 선생의 효행은 조선후기 실학 자 이긍익이 조선시대의 정치·사회·문화를 기사 본말체로 서술한 역사서 ‘연려실기술’, 충청도읍 지(1684,숙종10)등에 전해진다. 효자집안에 효자 난다라는 말이 있다. 효자 박 응훈 선생 소개에 앞서 청백리이자 효자이고, 타 고난 애민정신으로 선정을 베풀어 일세의 사표가 된강릉공박효함선생을소개하지않을수없다. 선생의 본관은 충주이다. 대전지역의 토호 성 씨로 조선조에 사헌부 감찰과 진해, 직산 감무를 지내고 병조참의에 추증 된 휘 진(秦)의 아들 4형 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분이 바로 청백리 휘 효함 (孝咸)으로효자박응훈선생의고조부가된다. 청백리 휘 효함(孝咸)의 호는 청간재(廳澗齋) 이다. 어려서부터 제주가 뛰어났고 독서를 할 줄 알면서부터는 자기 이름의 뜻을 돌이켜 생각하여 나아가고 물러섬을 오직 부모의 명에 따랐고, 미 루어 아우들에게 우애하니 주변에서 모두 그의 효제(孝悌)에 감복(感服)하였다. 성품이 또 청렴 강직하여 처음 근위병(近衛兵)에 발탁되어 해풍 (海豊,경기도 개풍지역의 옛 지명)의 관원으로 나가 백성 다스림을 한 결 같이 옛 사람으로 법을 삼아 추호(秋毫)라도 녹봉 밖에는 취하지 않으니 청백한명성이경내(境內)에넘쳤다. 세종 경술년(1430년) 가을에 보령에 해구(海寇) 가 침입하여 걱정거리임에도 적임자가 없었으나 청백함으로 선발되어 부임즉시 순찰사 최윤덕과 감사 박안신(밀양인 규정공 后)으로 더불어 함께 성 동 쪽 일 리(一里) 지 점 당 산(唐山) 남 쪽을 살펴 면 밀한 계 획으 로 몇 달 되지 않아 축성 을 마치 니 백 성이별로힘들이지않고도적이자취를감췄다. 이듬해에 통정(通政)에 올라 청주목사가 되었 는데 치적이 많아 성적이 으뜸으로 얼마 안 되어 청백리에올랐다. 이후 첨추(僉樞)가 되었고 또 얼마 후 나아가 서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가 되니 강 릉은 관동(關東)의 큰 도시로 창고가 가득차고 집들이 즐비한데 주민이 실화하여 불길이 매섭고 바람도 억세어 불길이 부근의 다른 곳까지 번져 나가고 있어 공(公)이 머리를 치면서 불을 향하 여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해 말하기를 “내가 덕 정(德政)을 이루지 못하여 이런 재난이 일어나니 백성은 무슨 죄인고? 옛날 강릉은 역(逆)으로 불 어 불길을 잡았는데 지금의 강릉은 바람이 불을 재촉하니 내가 유곤(劉昆,후한 동혼의 인물)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하고 말을 마치자 바람이 그 치고 불이 꺼져 다시 강릉의 고사(古事)하나가 되었으니 또한 기이(奇異)한 일이다. 공(公)이 청백한 정치로 네 고을을 역임하면서 모두 양초 (梁楚)의 명예를 얻었는데 강릉에서 더욱 높았으 니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애(仁愛)가 길이 심어져 서 하늘을 감동케 한 것이다. 사실이 조정에 알려 져서 세종26년 (1444년) 5월 2일 임금이 친히 옷 한 벌을 하사하시고 더욱 권장(勸 鴉)하여 재상 (宰相)의 인물로 기대되었으나 세상과 어긋남이 되어 충분히 등용치 못하였으니 옛 사람이 이른 바 하늘에게는 능히 하면서도 사람에게 불능하다 는것이아니겠는가? 공이 1387년(우왕13)에 태어나 1454년(단종2)에 관아(官衙)에서돌아가시니향년68세이다.청백으 로 이조 참 판에 증 직되고 예 장(禮葬)을 특사 (特賜) 했다.공의신도비는당대최고의문장가서거정(徐 居正)이 지었으며, 대전시 비지정문화재로 등록되 어충주호둘레길의명소로자리한다. 효자 오촌공 박응훈의 아버지 휘는 성건(成楗, 호 邵村)으로 문과에 올라 옥천군수, 영천부사, 청 주목사를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셨 으며7남2녀를두어가문이크게번성하였다. 공(公)의 휘는 응훈(應勳) 字는 공윤(功允) 호 는 오촌(梧村)이다. 외가인 현 매곡면 내동(안 골 )에 서 소 촌 공 휘 성 건 (成 楗 ) 의 7 형 제 중 여 섯 째로 태어나 당시 영동군수 송당 박영 선생에게 사숙(私淑)했는데 학문이 뛰어나고 행실을 도탑 게 하며 재예(才藝)가 초월하여 시는 성당(盛唐, 李白, 杜甫, 王維, 孟澔然 같은 위대한 시인이 배 출된 시기)을 사모하고 글씨는 왕희지(王羲之) 를 본받으며 그림에도 능하여 사람들로 삼절(三 絶)이란칭송을받으며자랐다. 아버지 소촌공(청주목사)이 병석에 누워 백방팔 방으로 알아보아도 차도가 없자 공(公)은 가족들 에게 소상히 말하고 지금 당장 약을 구하러 떠난다 고 일 렀다 . 하 지만 모 두가 내일 아 침 일 찍 떠나 라고 말렸으나 그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 지의 약을 구하러 100리가 넘는 험한 밤길을 떠났 다.밤새껏달려옥천고을입구에닿았을때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으니 선생은 호랑이에게 “내 가 너 의 등 에 타 라는 것이 냐?”라고 물었 다. 이에 호랑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효자의 깊은 심 성에호랑이도감복(感服)한것이다. 선생은 호랑이 등을 타고 옥천읍내에 있는 조 약국(曺藥局)에 가서 아버지의 약을 지어 기쁜 마음으로 약국을 나왔다. 호랑이를 타고 삽시간 에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정성껏 약을 달여 드 리니곧병환이완치되었다. 또 몇 년 후 부 친 (父 親 )이 노 령 ( 老 齡 )으 로 고 생 하실 제 이번에는 150리 경북 선산(善山) 이약국 (李 藥局) 약이 효험이 있을 거라는 공론(公論) 에 이른 새벽에 출발하려하니 마을 앞 숲에서 범 이 기다리고 있다가 꼬리를 흔들며 타라는 시늉 을 하므로 타고서 약을 구해오니 혹 그 모습을 본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놀라서 기절하고 어떤 이는 감탄하며 칭송을 아니 하는 사람이 없으며 이 소 문은 호서(湖西) 영남으로 퍼져서 공의 효행을 탄복하였다한다. 선생은 계속해서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한 겨울에도 꽁꽁 얼어붙은 강을 깨고 얼음 속에 있 는 잉어를 구하여 아버지 밥상에 올려 드렸다. 그 가 있는 정성을 다하여 부모님을 모셔 오던 중 얼 마 후 운 명 (殞 命 )에 다 달 았 을 때 “응 훈 ”이 마 지 막으로 왼손 무명지(無名指)피를 드렸으나 백약 이 무 효 로 아 버 지 소 촌 공 은 선 조 4 년 신 미 1 0 월 1 4 일午時92世의일기로세상을하세하게되었다. 형제 7人이 초상범절(初喪凡節)을 극진히 하고 장 지(葬地)를 구 하는 데 수 십일 을 지관 (地官)과 더 불 어 헤매 던 어느 날 현 영동 군 황간 면 소계 리(小溪 里)재에 도달하니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앞장 서더니 산중에 이르러 앞발로 땅을 파고 꼬리로 땅 을 가리키며 “응훈”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는지 라 이곳이 장지(葬地)란 말이냐?물으니 끄덕 끄덕 하므로 지관(地官)이 山 형세를 살펴보니 오공입 지형(蜈蚣入地形)이라장지를정하게되었다 그리고 효자 “응훈”은 아버지 묘소 50m아래에 노 막 (움 막 ) 을 짓 고 3 년 동 안 시 묘 할 때 에 도 호 랑 이가 자주 찾아와 그와 같이 밤을 세우기가 일쑤 였고, 수시로 토끼나 노루 등을 잡아와 아버지 조 석상에재물로올리기도했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성묘할 때에도 호랑이는 앞 장서가며 이슬도 털어주고 꼬리로 하얀 눈을 쓸 어주기도하는등함께시묘살이를한것이다. 이후 선생은 3년 동안 정성을 다해 아버지 소촌 공 시묘 중 어머니(인동장씨)의 喪事를 당해 도 합 5 년 의 시 묘 를 하 면 서 한 번 도 집 에 가 지 않 고 산소밑여막에서죽만먹기를하였다 시묘 5년(侍墓五年) 동안 하루도 집에 내려오 는 일 없이 묘를 떠나지 않다가 마지막 下山할 때 에는 머리는 장발이요.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백 두대간 추풍령 골짜기 여막의 한서(寒暑)를 견디 며 쇄약해진 몸 때문 선조8년 1575년 향년 三十 六세로 卒하니 아버지 소촌공 산소 맞은 편에 10 여년을 같이한 호랑이(호총) 무덤 위에 산소를 정하게 되었다. 이후, 이러한 효의 사실들을 호서 사림(湖西士林)이 조정에 상소(上疏)하여 선조 二十一年 경인(庚寅)에 선조대왕이 특명하시어,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고, 친필로 「효자오촌박 응훈지려(孝子梧村朴應勳之閭」의 판액(板額)을 하사하시었고, 또한 황간 송계사에 배향되니 우 암 송시열 선생이 정향 축문을 지었는데 앙유(仰 惟)하니 지성(至誠)은 옛날도 짝을 못해 효(孝) 가범에감화되어종(僕)처럼따랐도다.’하였다. 세워진 정문(旌門)은 現 영동군 매곡면 내동 (영동군 물한리 입구) 도로변에 朴守玄(충주박 일족)의 妻 열녀 선산 김씨의 열녀문과 쌍정문 (雙旌門)으로 세워져있고, 이 고장 효행정열(孝 行貞烈)의本이 되고 있다. 특히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 圖)에 “응훈”효행이 오르게 되고,대원군 서원 철 폐령으로 철폐된 송계서원(황간현)을 1955년 3 월 유허비, 보호비각과 함께 단묘와 상석으로 대 체해 세울 때 문장공 매계 조위와 함께 “응훈”도 모시게되었다. 선생이 기록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 三綱行實圖)에도 다음과같이전해지고있다. 「유땫 박응훈걓 황간현 사굤이니 어버이 셤기 긆 지극히 효로 땪더라 어긐 상낽애 시묘사리땪 야 땬번도 지둀 니굜디 아니땪며 뤁만 먹기굠삼 년을 땪고 너모 슬허 주그니라 쇼경대왕됴애 졍 문땪시니라(원문 應勳居廬 幼學朴應勳黃澗縣人 事親至孝 母喪居廬 一不到家 횻粥三年 過哀而死 昭敬大王朝 門) 응훈거려 -박응훈이 여막에서 살다.유학 박응 훈은 황간현 사람이다. 어버이 섬김을 지극한 효 도로 하였더라. 어미의 상사에 시묘살이하면서 한 번도 집에 가지 아니하며, 죽만 먹기를 삼 년 동안 하고 너무 슬퍼하다 죽었더라. 소경대왕 선 조 때 정 문 을 내 렸 다 . 풍부한 물질과 변화하는 세태에 가정폭력과 흉 악한 범죄가 늘어나면서 많은 분들은 청소년들의 인성부재에 의한 것이라 지적한다. 부모는 나를 낳으면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오직 자녀들 잘 되 길 바 라 고 있 다 . 오촌 박응훈 선생은 하늘이 내린 효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선생의 효성에 호랑이도 함께 하니 선 생은 호랑이의 안타까운 죽음에 호랑이의 유해 (遺骸)를 안장하며 보은하는 과정을 전해져 오는 호총실기일부를인용하면서마무리하고자한다. 『호총실기(虎塚實記) - 황간(黃澗)고을 신관 (新官)이 도임(到任)하여 고을 안 사정을 물을 적에 朴 梧村의 효행을 세세히 듣고 감탄하며 범 구경하기를 원하고 梧村을 청첩(請牒)하므로 범 을 타고 가서 문밖에 세우고 사또(使徒)께 인사 하고 좌정(坐定)하니 梧村을 극구칭찬(極口稱 讚)한 후 범을 구경하고자 한다. 梧村이 뷺범아 범 아뷻 부르니 꼬리를 흔들며 동헌(東軒)마당에 들 어왔다. 사또는 뷺착한 범 이로고 어디 짐승 잡는 시늉을 한번 해 보아라뷻하니 별안간 아우성 소리 를 지르고 곤두박질을 넘고서는 으르렁 거리며 달 려드는지라 신관사또 방문을 닫고 방구석에 쓰러 져 기절하여 숨도 못 쉬고 말도 못하고 손만 허우 적거리며 부들부들 떨므로 범을 물리쳤다. 한 시 간후에 정신을 진정하더니 뷺십년감수 했소뷻하면 서 농 물 ( 物)을 선사하며 효행을 칭찬하고 조정에장계(狀啓)를올렸다한다.-중간생략- 범 도 명 ( 命 )이 있 어 몇 달 후 梧 村 의 꿈속에서 뷺지금 무주덕유(茂朱德裕) 산하를 지나다가 함 정에 빠졌소뷻하므로 형제 칠인과 하솔(下率)을 거느리고 말로 달려도 길이 백 여리라 도착 했을 때는 이미 범은 죽은 후였다. 고위(固 酬)에는 빽 빽이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다가 梧村이 범을 어루만지며 무한히 슬퍼하며 범 주인이란 내력을 이야기하고 범을 사겠다고 하니 뷺범의 주인이 있 다는 말은 고금에 못 들어 본일뷻이라며 가서 판결 을 내리자고 하였다.하는 수 없어 무주 원님께 고 발되어 원님 앞에 조사(調査)를 받았다. 원님은 사람을 시켜 황간 고을에서 자세한 내력을 조사 한 후 뷺황간 박 선생은 양호(養虎)하며 범을 타고 약을 구하고 묘지를 선(選) 하여 조석상식에도 같이하며 종과 같이 부렸다는 말은 들은 지 오래 이나 오늘날 비로소 만나 보게 되어 기쁘오뷻라며 무 한 히 찬 양 하 고 범 을 내 어 주 라 명 하 므 로 공 은 값을 厚하게 치르고 범을 운반(運搬)할 때 무주 원 님 은 역졸 (驛卒)을 시켜 황간 까지 운 반하 여 주었 으므로 범이 놀던 자리에 묻어주었다. 그곳이 바로 소촌공(邵村公)의 무덤 앞이요 소촌공 무덤을 호 점산(虎占山)이라하고 범의 무덤을 호총(虎塚)이 라 이름 하 여 비 석을 세 우고 매년 음 력 10月11日 소 촌공묘사후에는주육(酒肉)등제수(祭需)를진설 (陳設)하여범의절덕(切德)을기리고있다. /글 정리·사진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 anmail.net) ■효열부열전븣븣 호랑이도감복(感服)한충주박씨강 릉공后효자박응훈 역주동국신속삼강행실도2집(東國新續三綱行實圖) 강 릉공묘역전경.왼쪽의신도비가대전시비지정문화재로등록되어있으며충주호둘레길에자리하 고있어뭇사람들의발길을잡는다.(큐알코드를핸드폰으로촬영해보면상세히볼수있다.) 강릉공신도비큐알코드. 오촌박응훈선생묘.충북영동군황간면소계리. 오촌공 효자 정려(영동군 향토유적 제54호),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348-1 취재에동행한박우숙회장이호총에서함께한박희진사무 국의 진설(陳設)을 돕고 있다. 청백리·효자 강릉공 박효함 효자 오촌공 박응훈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