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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9월30일 목요일 7 (제177호) 기 획 또 적거중의 시에 말하기를 “푸른 산 어느 곳에 의로운 배가 있었던가? 나그네는 서풍부는 맑은 수면에 앉았네. 바다는 능 히 하늘이 다한 곳을 알고 구름은 점점 땅 끝으로 흘러가는 구 나.”라고하였는데손자하담·하징형제가차운하였다. 소고공의 아들 승원(承元)의 자(字)는 선부(善夫) 호(號) 는 퇴암(退巖)으로 무과를 통해 입사하여 어모장군(禦侮將 軍, 정3품) 충순위 부사직을 역임하였다. 진주하씨 경절공 하 숙부 딸과의 혼인을 계기로 경제적 배경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고,경절공하숙부는아들이없었다. 이에 아들 삼형제 이름을 하담(河淡)·하청(河淸)·하징(河 澄)으로 지었는데, 이는 외가인 진주하씨를 잊지 말라는 뜻을 담았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이들 3형제를 중심으로 소요당공 파,성와공파,병재공파로각기세계를이룬다. 소고공의 장남 하담(河淡)의 자(字)는 응천(應天) 호(號) 는 소요당(逍遙堂)으로 성종 기해(己亥,1479년) 청도 수야리 집에서태어났다. 글 읽기를 좋아하고 몸가짐이 의젓하여 대인다운 풍모(風 貌)를 지녔으며, 14세인 1492년에는 ‘대학븯(大學), ‘중용븯(中 庸)을 읽었고, 18세인 1496년에는 소학(小學)을 읽고 깊은 감 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생의 지기이자 절친인 삼 족당 김대유(1479~1551)와 함께 운문산의 운문사로 들어가서 맹자(孟子)자를읽었다. 31세인 1509년 심경(心經)을 읽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면 서 과거(科擧)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이는 조부인 소고공께 서 무오사화로 인해 화를 입었고, 또한 계속된 사화는 선생으 로 하여금 관로(官路)로 나가지 않으려는 뜻을 굳혔을 것으로 보인다. 36세가 되던 1514년 사육신의 묘소가 있는 노량진을 지나며 감회를 읊은 시를 지었고, 경기도 파주에 우거하고 있는 청송 (聽松)성수침(成守琛,1493~1564)을예방하였다. 39세이던 1517년 ‘근사록(近思錄, 중국 남송(南宋)의 철학 자 주희와 여조겸이 공동 편찬한 성리학 해설서)을 읽고서 감 명을 받아 이를 인쇄하여 보급하고 아울러 븮심경븯(心經)도 간 행하였다. 41세인 1519년 현량과에 뽑혔으나 나아가지 않고 정암 조광 조(1482~1519) 등 신진사류가 피화한 기묘사화 이후에 그동 안 자신이 지었던 글을 모두 모아 소각하였다.이로 인해 후손 과후생들이선생의글을볼수있는기회가사라지게되었다. 46세와 47세에 사산감역과 사재감봉사에 제수 되었으나 나 아가지 않고 48세에 경재(警齋) 곽순(郭珣, 1501~1545)과 성 리설을강론하였다. 50세이던 1528년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에 제수되자 그동안 누차 벼슬을 받고서 집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상주까지 올라가서 상소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선산 에 들러 송당 박영(1471~1540)을 예방하여 향음주례를 거행 하였다. 58세에 ‘운문구곡가븯(雲門九曲歌)를 지었고, 59세 때 ‘가례 븯(家禮)를강론하고송당박영의방문을받았다. 67세이던 1545년에 남명 조식(1501~1571)이 입암정사(立 巖精舍)를 방문하자 여러 학생들을 위하여 ‘서명븯(西銘)과 사 자서(四子書)의 의문점, ‘하락태극도설븯(河洛太極圖說)의 강 론을청하였다. 69세이던 1547년 송계 신계성(1499~1562)이 방문함에 함께 ‘주역븯(周易)을 토론하였다. 그후 82세가 되던 1560년 11월 19 일에 자손들을 위해 ‘가훈10조’를 남기고 손자 국헌공(휘 경 윤)의입암정사에서서거하였다. 내암 정인홍은 선생에 대해 운문산 아래에 서실을 짓고 소 요당으로 당호 하였고, 공자의 제자 중 자공(子貢)에 비할 만 한인물이라고평가하고내암집에기록하고있다. 소요당의 장남 영(潁)의 호는 성효재(誠孝齋)로 천자가 정 직하고 신채(身彩)가 깨끗하며 정성어린 효성은 무리에서 뛰 어났고충성스럽고미더워서진실함이있었다. 순릉참봉에 천거되었고, 가선대부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여묘(廬墓)에서 소상을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행적 이 군지에 실려 있다. 아들 경연(慶延)·경신(慶新)·경인(慶 因)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경연(慶延)의 자(字)는 유중(裕 仲)이고벼슬은증공조참의,참의공파파조이다. 그는 아들 환( 臟)·찬(璨)·우(瑀)·숙(琡)·규(珪) 오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환은 장사랑 참봉, 차남 찬은 참봉이고 충의장 군으로 첨정우후에 제수되었고 선무원종공신 3등, 셋째 우는 강개한 절의가 있어 중부 삼우정공과 종숙 제우당공을 따라 충의로서 공을 세웠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624년 이 괄의 난을 만나서 진무일등공신에 녹훈되고 남포현감에 제수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필마(匹馬)로 달려가서 충청도 병사 이의배와 함께 순절하니 인조 정축(丁丑, 1637) 호조참 의에추증되었다. 넷째 숙은 군자감 봉사이다. 강개한 충의가 있어 나이 겨우 15세에 여려 부형(父兄)을 따라 창의하여 군진을 돌며 여러 번공을세웠다.선무원종3등에녹공(錄功)되었다. 다섯째규는증호조좌랑이다. 성효재공(휘 영)의 차남 경신(慶新)의 자(字)는 중선(仲 宣)호는삼우정(三友亭)으로삼우정공파의파조이다. 중종 기해(己亥,1539)에 태어났다. 경서를 두루 읽고 무예 를 익히어 지략이 뛰어났다. 1570년 무과 복시에 급제하고, 15 73년 35세에 무과전시(武科殿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함으로 서 적순부위 훈련원 참군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식년시, 복시, 무과전시에 급제 할 때마다 자기 자신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몸을 바르게 하였다. 1574년 여절교위 훈련원주부, 이듬해 현 신교위 훈련원판관에 승진하여 선천 병마첨절제사 종사관,15 79년 정략장군 훈련원 첨정으로 승진하여 안동 병마동첨절제 사, 1589년 선생의 나이 51세에 건공장군 훈련원부정에 승진 하였다. 1592년(임진) 2월에 선생은 경북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의 고향집에 가서 3월에 숙부(휘 이) 소상을 치루고 돌아오는 길 에 동생 경인을 섶마루로 데리고 와서 지병인 창질을 고치려 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등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있던 중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고,밀양도호부사 겸 청도 조전장으로 많은 전투에서 승전하면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 청도를 온전하게 지켰으나 1594년 6월 5일 밀양관아에서 피로 누적으로 순직 안타까움을 자아냈다.가선대부 병조참판 동지 의금부사에추증되고선무원종공신1등에녹훈되었다. 아들 지남(智男)·철남(哲男) 형제를 두었는데 아버지를 따 라 의병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3등에 각각녹훈되었다. 성효재공의 셋째 경인(慶因)의 자(字) 희중(禧仲), 호는 용 연(龍淵)으로 평소 문행으로 이름나고 대의(大義)에 기개(氣 槪)가있었다. 임진란에 창의기병하여 적을 토벌하기를 맹세하였다. 그해 5월 8일 진중에서 순절하니 아들 선(瑄)에게 원수 갚기를 유 언하였다. 순조 임신(壬申,1812)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어 지 평공파의파조이다. 아들 선(瑄)·수(琇)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선(瑄)은 의병에 참여하여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고, 차남 수(琇)는 후 사를잇지못했다. 소요당공의 차남 이( 視)의 자(字)는 정숙(正叔),호는 모재 (慕齋)이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으로 아들 경전(慶傳)·경윤 (慶胤)·경선(慶宣)·경준(慶俊)등4형제를두었다. 장남 경전(慶傳)의 字는 효백(孝伯) 호는 제우당(悌友堂) 으로제우당공파파조이다.명종8년(1553)에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덕기(德器)로 일컬어졌다. 장성하게 되어서는 강개하고 기절이 있었는데 1591년 3월 초8일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고 있었다.그런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우리 집이 대대로 나라 의 은례를 입었으니 어찌 차마 앉아서 보기만 하겠는가.”하고 곧 어머니를 업고 운문산에 들어가서 외진 조용한 곳을 가려 거처하게 하고, 드디어 형제 자질과 더불어 글을 지어 맹약하 고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 되었다. 정유재란에는 곧바로 울산 증성에 나라가 싸워 목 베고 노 획한 것이 많았다.이때 백사 이항복,약포 정탁 등 제공(諸公) 이 충의로 허여(許與)하고 조정에 천거하여 창녕현감에 제수 되었다. 인조1년(1623)에 서거하니 순조16년(1816) 병조판서에 추 증되었다. 아들 정·기 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정은 봉사(奉事) 이고,차남기는아우경준의뒤를이었다. 모재공의 차남 경윤(慶胤)의 자(字)는 효중(孝仲), 호는 국 헌(菊軒)으로국헌공파파조이다. 명종10년(1555)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학업을 원대히 가졌고,무예를배웠다. 임진년에 백형 제우당과 아우 만호공 경선 및 아들 주부 린 과 의병을 모집하고 요해처(要害處)를 점거해서 적의 길을 막 고 적의 목을 벤 것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2등 공신에 녹훈되어 벼슬은 봉사였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에제수되었다. 천성이 소탈하며 문필로 스스로 즐겼다. 대개 무예를 배웠 으나 뜻은 실로 문학을 숭상하였다. 병화(兵火)의 뒤 끝에 공 사(公私)의 서적(書籍)이 남김없이 탕진하였다. 조정에서 경 사(經史)의 각판(刻板)에 급급하여 오직 ‘예부운략븯(禮部韻 略)은 미처 간행하지 못하여 선비들이 그것을 병통으로 여겼 다.공이 개연히 스스로 분발하여 형 제우당공과 더불어 가 가 재(家財)를 다 내어 드디어 인간(印刊)하여 세상에 공전(公 傳)하였다. 아들 린(璘)·구(球)·유(瑜)·이(璃)·관(瓘)·진(璡)을 두었 는데 장남 린(璘)과 차남 구(球)는 아버지를 따라 임란에 의 병으로 참여하여 린(璘)은 선무원종 3등에 녹훈되고 훈련원 첨정에 오르고 가선대부에 가자되었고,차자 구(球)는 선무원 종3등에녹훈되고훈련원판관에이르렀다. 셋째 유(瑜)는 부장(部將)이고 수직으로 통정(通政)에 올 랐고, 넷째 이(璃)는 가선대부, 다섯째 관(瓘)은 어모장군 훈 련원판관,여섯째진(璡)은학생이다. 모재공의 셋째 경선(慶宣)의 자(字)는 효원(孝元)으로 명 종16년(1561)에 태어났다.골격이 비범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선조18년(1585)에 무과에 급제하여 천성 만호에 제수되었다. 종형 경인(제우당),형 경전·경윤 그리고 모든 자질 등을 합하 여14명이운문산가운데에서의병을일으켰다. 많은 공을 세웠으나 임진년 5월 26일에도 힘껏 맞서 싸웠으 나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이 칼로 공의 오른손을 쳐서 자르니 공 은 왼손으로 적을 껴안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순조 갑자(甲子,1804)승정원 좌승지에추증되었다. 모 재 공 의 넷 째 경 준 (慶 俊 ) 의 字 는 효 언 (孝 彦 ), 호 (號 )는 상 우재(尙友齋)이다.효우가 돈독하고 문학이 뛰어나 모두가 우 러러 보았다. 후사가 없어 백형 제우당(휘 경전)의 차남 기 (璣)로하여금후사를이었다. 이와 같이 소요당의 장남 영(潁)의 아들 경신(慶新), 경인 (慶因),손자 찬(璨),우(瑀)숙(琡),지남(智男),철남(哲男), 선(瑄),차남 이( 視)의 호는 모재(慕齋)로 장사랑을 역임하고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아들 경전(慶傳), 경윤(慶胤), 경선(慶 宣)과 손자 린(璘),구(球),성와공 하청(河淸)의 손자 근(瑾) 등 14명이 운문산 일대에서 창의의 깃발을 올려 청도지역 14 의사의가문으로명성을높인것이다. 소고공의 차남 하청(河淸)의 자(字)는 응도(應圖), 호(號) 는 성와(城窩)이다. 성종 신축(辛丑, 1481년)에 태어났다. 벼 슬은 승훈랑 예조정랑이다. 기묘사화에 두 형제가 두문하여 성리학을 강론하고, 삼족당 김대유, 청송 성수침, 남명 조식, 경재곽순등과도의지교하였다. 기묘사화가 있고 2년 후 재차 일어난 신사무옥(辛巳誣獄) 은백형소요당과함께더큰충격이었다. 중종 16년(1521) 안당의 아들 안처겸이 기묘사화를 일으킨 주역 남곤과 심정 등을 숙청하고 경명군(景明君, 숙의홍씨 소 생, 성종의 열째아들) 추대를 모의했다는 역모 죄로 처벌되는 데, 안당이 증조부 우당공(휘 융)의 외손자이니 이들 형제에 겐 외 5촌 되는 셈이다. 따라서 옆동네 김일손이 무오사화로 처형당한 이후 연이어 벌어진 사화 속에서 출사를 포기하고 은거형 처사로 살아간 것이다. 그리고 효행이 뛰어나 통훈대 부사헌부지평에증직되었다. 소고송의셋째이다.휘는하징(河澄),자(字)는성천(聖天), 초의 자(字)는 천문(天文), 호는 병재(甁齋)또는 서암(西巖) 인데, 병재(甁齋)란 호는 남명 조식이 주자(朱子)의 ‘경재잠 븯(敬齋箴)과 이를 인용한 명심보감의 ‘존심븯(存心)편에 나오 는 『‘수구여병(守口如甁) 방의여성(防意如城) [말을 삼가기 를 병(甁)마개와 같게 하고,뜻을 방비(防備)하기를 성(城)과 같게하라.]』에서따서준호이다. 1483년 태어났는데 골상(骨相)이 준수하고 눈동자가 맑았 으며 돌을 갓 지나서 문득 말을 알아듣고 선악(善惡)을 구별 할 줄 알았다. 특히 모부인(母夫人)이 질병으로 앓았을 때에 는 젖을 빨지 않고 엉금엉금 기어서 피하여 집안사람들이 유 효(乳孝)라고일컬었다. 겨우 3,4살이 되었을 때 부형(父兄)들이 ‘천지부모충효븯(天 地父母忠孝) 등의 글자를 입으로 말해주면 한번 듣고 모두 외 워서대답하였다. 11살 이전 소학(小學)을 배웠고, 그 무렵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동강부춘(桐江富春)’을 병풍에 그려백씨인소요당공 이 시 를 짓 고 중 씨 인 성 와 공 도 역 시 시 를 지 으 니 병 재 도 즉 석 에서시를지었는데두형이병재의시를보고깜짝놀랐다. 또한 백씨가 ‘소학븯(小學)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병재도 백 씨의 운자에 화운(和韻)하였고, ‘성력시븯(星曆詩)와 ‘우중만 영븯(雨中 묄詠)같은작품도있다. 그리고 모부인이 병이 들어 한겨울에 꿩고기 구이를 요구함 에 맨발로 밖을 나가 하늘에 백번이나 절을 하고 東山에 가니 눈이 반쯤 녹았는데 마침 꿩 한 마리가 품으로 날아 들어오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탄(驚歎)하였고,이러한 사실은 병재의 아들이지은제문에실려있다. 그리고 백씨를 따라 입암과 눌연으로 가서 날마다 사서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공부하며 학문을 하는 여가에 자 연속에서형제애를나누었다. 항상 말하기를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사람 성품의 벼리이 기 때문이 어찌하여 의를 잊고 이익을 취해 성품을 깡그리 없 애는 곳으로 돌아오는가? 요순(堯舜)을 배우고자 하면 요순 (堯舜)은 멀지 않다. 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공경(恭敬)과 근 신 (謹 愼 ) 은 몸 을 닦 는 요 체 (要 諦 ) 가 되 니 더 욱 소 학 ( 小 學 ) 과 대학(大學)두 책에다 공력(功力)을 쏟아야 하고 일상생활 에서 하는 행위는 반드시 여기에다 준칙(準則)을 삼아야 한 다.라고하였다. 또한 암행어사인 이시백이 조정에다 보고하여 곧 입시(入 侍)를 하였고, 그 후에는 효행으로 팔도에 알려져 교관(敎官) 을 제수 받아 사은(謝恩)하고 두어 달을 봉직하다가 어버이가 늙었으므로사직하고고향으로돌아왔다. 또 일찍이 경기도 파주의 죽우당 성수침 문하에 유학했는데 청송(聽松)은 사사(師事)를 하였고,우계 성혼은 벗으로 사귀 었다. 1515년에 사간원 정언으로 임명되어 부임(赴任)할 적에 절 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그 뒤 벼슬을 그만두고 5년이 지나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군의 북쪽에 있는 귀일곡(歸一谷)에다 별장(別莊)을 짓고 온공가 례(溫公家禮)를 걸어두고 집을 나갈 때와 귀가 했을 때 반드 시 사당에다 보고를 하였다. 1544년에 외직으로 나갔다가 수 구재(守口齋)로 돌아와 금서(琴書)와 화죽(花竹)을 즐기며 늙음이장차이르는것을알지못하였다. 1566년 별세하니 향년이 84세였고, 유현(儒賢)을 포상하는 제도로호조판서가증직되었다. 병재문집과 목판본이 전해지는데 현재는 안동 국학진원에 기탁관리되고있다. 병재공은 아들 적( )을 두었는데 자(字)는 화숙(和叔), 호는 수모재(守慕齋)이다. 도산서원(퇴계)에서 글을 배웠다. 퇴계에 대한 제문이 있으며, 친상을 당하여 여막(廬幕)과 시 묘(侍墓)로 6년을 보냈다.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휘릉(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참봉에 제수되었다. 아들은 경류(慶流)인데 행실이 돈독하고 효행과 우애가 남달랐고,학 문은깊고정묘한경지에이르렀다. 소고공은밀양에서청도에입향한입향조이다. 이는 청도에서 큰 세력을 유지한 이가 병조판서 김철성(金 哲誠)이었는데, 소고공 박건이 그의 딸과 혼인이 계기가 된듯 하다. 조선전기 대대수의 입향 과정을 분석해 보면 처가동네로 이 주한 사례가 많은데, 당시에는 재산상속 자체가 아들과 딸에 게 고루 나누어 주는 균분상속 이었다.따라서 재산을 상속 받 은 처향(妻鄕) 혹은 외가향(外家鄕)으로 이주하는 것이 보편 화된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박건의 경우에도 밀양 삽 포에서 처향이었던 청도 수야로 이주하였다. 김철성은 1남 7 녀를 두었는데,박건은 그 중에서 제6녀와 혼인하였다.이렇듯 8남매의 균분상속이었다면, 박건에게 상속된 재산 역시 큰 규 모는아니었다고보여진다. 현재 청도군 이서면 수야4리에 해당하는 지대(池臺) 일원 을김철성에게상속받았던것으로알려지고있다. 청도 밀양박씨 입향조 박건은 아들 박승원을 두었는데, 그 역시 무과를 통해 입사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정3품) 충순 위 부사직에 이르렀다. 박승원은 밀양에서 이주해 온 아버지 박건의 기반과 또 외가인 판서공 김철성의 사회·경제적 기반 을 물려받았고, 또 진주하씨 경절공 하숙부 딸과의 혼인을 계 기로경제적배경을더욱공고히할수있었다. 당시 청도 수야 지역의 광활한 농장을 소유했던 경절공 하 숙부는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재산이 사위인 박승원에 게 거의 상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승원은 아들 삼형제 이 름을 하담(河淡)·하청(河淸)·하징(河澄)으로 지었는데,이는 외가인진주하씨를잊지말라는뜻을담은것이었다. 이후 소요당공(휘 하담)께서 삼족당 김대유, 남명 조식 선 생등과의 교유를 통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충효와 의리사랑을 펼쳤던 곳으로 학문의 중심이 된 곳이 운문산 아 래입암정사이니금천면신지리섶마루이다. 이에 소요당의 후예들은 신지리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으 며, 이중 삼우정(휘 경신)은 금천면 인당리, 지평공(휘 경인) 은 청도 이서, 상우재(휘 경준)공은 운문면 대천 등으로 각각 이주해 나갔으며 최초 입향지인 수야리에는 병재공 후손들이 남아거주하고있다. /자료제공박남현전(前)남해왕릉참봉 /글·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6면에서이어짐 뱚△소요당공파 선암서원:경북 청도군금천면신지리 삼족당김대유와소요당박하담을향사하기위해건립한 서원이다. 서원에는 14의사판목 등 귀중한 자료가 있으며 주변에는 소요당 선생의 채취가서려있는소요대등이 있다. 임호서원-경북 청도군금천면임당리,서원내경의사에는삼우정선생과 두아들(지남,철남)의위패를봉안하고있다. 입암재(入巖齋)청도군금천면선바위길30-22,국 헌공(휘경윤)墓齋 14의사묘정비(용강서원입구) 1998년8월3일경상북도기념물제129호로지정되었다. 월호재(月湖齋)-청도군금천면신지리 성와박하청선생의묘재(墓齋) 명동서사(明東書社)-이서면 수야리 명동마을, 병재 박하징 선생의 묘재 (墓齋) 뱚 △성와공파 뱚△병재공파 뱚소고공의청도입향과세거지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