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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9월30일 목요일 6 (제177호) 기 획 소고공파는 고려충신으로 불사이군의 충절을 보인 송은 박 익 선생의 손자이고,우당공 박 융의 차자 휘 건(乾)을 파조로 하고있다. 소고(嘯皐)는 호(號)이고 다른 호는 두곡(杜谷)이다. 무과 에 급제하여 벼슬이 어모장군(禦侮將軍, 정3품)으로 훈련원 봉사와 충순위 부사직(忠順衛 副司直, 종5품)을 지냈고, 호 (號)소고(嘯皐)를따소고공파로세계를잇고있다. 소고공파는 신라시조대왕의 적장자 가문으로 밀성대군의 후예이다.밀성대군은 경명왕의 맏이로서 팔대군의 장자로 밀 성대군에 봉해졌는데 지금 밀양부에 이궁대, 풍류현, 세루정 이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왕이 노닐던곳이라한다. 밀성대군의 아드님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 휘 욱(郁)은 고려초(麗初)에 군도(群盜)를 토벌하여 태조(太 祖)의 건국사업에 공(功)이 많았으며, 손자는 요동독포사 휘 난(遼東督捕使諱瀾)이다. 밀성대군의 8세에 이르러 태사공(太師公) 휘 언부(彦孚)은 고려 문종(1047년 丁亥) 때 문과에 급제하여 최충과 함께 태 사(太師)를 지냈고 중서령 문하시중 도평의사를 역임하였으 며밀성부원군으로피봉되었다. 태사공은 아들을 둘 두었는데 맏이는 효신(孝臣)차는 의신 (義臣)이다.고려 인종은 양 형제를 효의양신(孝義兩臣)또는 고려주석(高麗柱石)이라 부르고 동방대성(東方大姓)이란 어 필 넉자를 하사 했다. 유지는 경북 청도군 풍각 화산에 있다고 하나확증이없다. 효신(孝臣)은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 이 되었고 평장사 로서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천자가 예로서 대우하여 치사 하였고 본국에 돌아와 졸하였다.시호는 문익(文翼)이라 사시 하고 인종묘에 배향하였다.의신은 공부상서로서 종방인 양신 (良臣:彦祥의 아들), 직신(直臣:彦仁의 아들)과 더 불어 세상 에서삼언사신(三彦四臣)이라 알려져있다. 공필(公弼)은 효신의 아들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대장군 도 검사 병부상서를 역임하였다. 공은 문무에 재주가 겸비하여 고려 예종(1107년) 2년에 윤관과 같이 여진을 쳐서 평정했다. 뒤에 진국공신으로 추존되었고 시호를 충열(忠烈)이라 사시 하였다. 육경(育慶)은 공필의 아들인데 1130년 인종8년에 대장군과 병부상서를 지냈다. 또 1135년에 김부식과 함께 적(賊) 조광 등을 쳐서 평정하였다. 또, 글을 올려 양현고(養賢庫)를 세워 서 많은 선비를 기르게 하고 또한 모든 고을에 널리 학사를 설 립하였으며국사를보살펴수정하였다. 대화(大和)는 육경의 아들인데 대호군 이부상서였으며 수 문학 대제학으로 문무가 겸전하였다.간(幹)은 대화의 아들인 데 문과급제로서 병부참정(兵部參政)이었고 시호는 양효(良 孝)이다. 배위는 추화군부인(推火郡夫人) 밀성손씨(密城孫 氏)인데 여지승람에 기록 되어 있다.두 아들을 두었는데 영균 (永均),세균(世均)형제이다. 은산부원군 휘 영균(永均~1300)은 양효공 간의 큰아들이 다. 고려조에 익대공신으로 벼슬은 판도판서와 삼제(三帝)를 역임하였고 응천군으로 봉군되었다. 뒤에 또 은산부원군(銀 山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으로 사시되었 고 묘소는 경남 창녕군 계성면 광계 마을(산82번지) 뒤 을좌 (乙坐) 구릉에 있다. 부인은 능성구씨(綾城具氏)로 문하좌정 승(門下左政丞)을 지낸 문정공(文貞公) 의( 陞)의 딸이다. 배 위(配位) 재령이씨(載寧李氏)는 신라 경순왕의 사위인 재령 백(載寧伯)을지낸우칭(禹稱)의5세손이다. 은산부원군 휘 영균은 슬하에 아들 셋 딸 넷을 두었는데 첫 째는 익(翊 :초휘는 天翊)이요,둘째는 천경(天卿),셋째는 문 경(文卿)이다. 은산부원군의 장남 익(翊, 1332~1398)의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이다. 공민조에 급제하여 사재소감, 예부시 랑, 중서령, 예판 등 벼슬을 했다. 이성계와 같이 남정북벌을 했다. 그러나 려말 국정이 쇠퇴하고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 리고 밀주 송계에 돌아와 정포은, 이목은, 길야은 등 여러 선 비들과 시국을 개탄하고 걱정하면서 문학을 즐기고 토론하였 다. 이성계가 등극한 후 송은 선생을 다섯 번이나 불러 공조, 예 조,형조,이조 판서와 좌의정을 제수하려고 해도 끝내 나가지 않았고 세칭 8은이라 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두문동 72 현으로 경기도 파주의 고려 통일대전에 고려 충절신으로 배향 되었고, 그 외 밀양 덕남사 청도 용강서원, 산청 신계서원, 창 원 운암서원 등에 배향되어 있다. 그리고 지난 2000년 9월 경 남 밀양시 고법리 소재 송은선생 고분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2 005년 2월 5일 국가 문화재 사적 제459호로 지정되었으며, 송 은공의 아들은 넷인데 우당공 휘 융(融)븡 인당공 휘 소(昭)븡 아당공휘조(調)븡졸당공휘총(聰)이다. 송은공의 장자 휘 융(融)은 태종8년(1408년) 사마시에 합 격했다. 3월에 지공거(知貢擧=主任試官) 이 직(李稷)이 고적 (考績,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여 정함)하는 의의를 물었는데 공이 대답한 바를 보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문장 포치(布置, 넓게 늘어놓음)가 정연하고 문사(文辭)가 빛나서 과장(科場) 에 영수(領袖)일 뿐 아니라 내가 마땅히 옷자락을 걷어잡고 (지금의 경례) 출척(黜陟, 못 된 사람을 내 보내고 옳은 인재 를 등용)하는 법을 한 차례 물어야겠다’하였다. 드디어 장원 (壯元)으로뽑혔다. 춘정 변계량과 익성공 황의도 서로 이르기를 븮한(漢)나라 동 중 서 도 이 보 다 나 을 것 이 없 겠 다 .븯하 였 다 . 공 이 이 어 과 거 에 올랐으나 벼슬길에 뜻이 없어 향리에 물러나 있으면서 성리학 에 마음을 두어 깊이 생각하고 서적을 가까이 하여 그런 생활 로종신할듯하였다. 벼슬은 성균관 사예,사간원 정언,집협전 수찬·전한을 역임 하였다. 형조좌랑, 이조정랑, 종부시 정을 역임하였으며, 외직 으로는 금산, 함안 두 군을 다스렸는데 정사가 공평하고 백성 이 화목했으며, 손을 씻을 듯 청백하니 기리는 소리가 길에 가 득하였다. 1428년 8월 15일 함안 관아에서 돌아가시니 밀양 덕남서원 에향사하고문집이간행되고다시국역하여간행했다. 우당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는 진(震)으로 감헌공파 의파조가되고,차자휘건(乾)은소고공파의파조이다. 소고공은 우당공(휘 융)의 차남인데 소고(嘯皐)는 호(號) 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어모장군(禦侮將軍, 정3품)으 로 훈련원 봉사와 충순위 부사직(忠順衛 副司直, 종5품)을 지 냈다. 밀양에서청도에처음입향한입향조이기도하다. 사화(史禍)의 일로 적거(謫居, 귀양살이) 할 때 백한시(白 詩)를 지었는데, 뷺너는 본래 강호의 새이거늘 무엇 때문에 내 곁에서 노니는가?날아서 오감은응당뜻이 있어서이고,물 위로 부침함은 혹 가을에 놀람일세. 청백한 마음은 하늘에 닿 아 있고, 천심(淺深)한 물은 달빛에 비치네. 돌아가려 해도 돌 아갈 수 없으니 풍설에 차마 머물고 만다네.뷻라고 하였는데 삼 족당김대유,경재곽순,남명조식이삼가차운시를지었다. 뱚파조별약사 밀성박씨소고공파(嘯皐公派) 뱚▶7면으로계속 밀성박씨 소고공파는 화랑정신의 발상지로 잘 알 려진청도에면면히이어져오는호국충절의가문 으로불린다.고려말불사이군의충절을지킨두문 동8절(節)로꼽히는송은(松隱)박익(朴翊)선생의 후예, 청도에 입향 한 소고공(嘯皐公) 박건(朴乾) 선생이래처사적삶속에서지역백성들을위해애 쓴 소요당(逍遙堂)하담(河談),성와(城窩)하청(河 淸), 병재(甁齋) 하징(河澄) 삼형제, 그리고 임진왜 란 때 집안의존멸위기에도 몸을 아끼지 않은 14의 사에게로,충절의마음은뜨겁게이어져왔다. 특히 형 감헌공의아들 통찬공(휘 문손,호 해루당) 과 치와공(휘 승손), 손자 오려공(휘 성무) 등이 점 필재 김종직과 교우(交友)하고 또는 문인으로 밀 접한 연관이 있어 무오사화와 갑자사와에 큰 화를 입으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은거하면서 후손들은 밀성재를 비롯한 추원재, 보본재 등에서 장손가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전국 밀성인의긍지를 대 내외알리고있어소개해본다. 소고공묘재(墓齋)용강재와용강서원전경:경북 청도군이서면학산동(모산) 수야리전경 .마을에는소공공후예의재사(齋舍)와등유적이 즐비하다. 뱚소고공파연원 뱚소고공파선원세계 뱚소고공의후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