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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9월30일 목요일 4 (제177호) 기 획 △박병인(인천시 연수구) △박연 희,박해용(강원 동해시)△박인근(충 북 청주시)△박봉순(충남 서천시)△ 박희중(세종시) △박창균(경북 영천 시) △박종백(경북 포항시 ) △박상철 (경북 예천군) △박종욱(경북 청송 군) △박진하(대구 수성구) △박만순 (부산 연제구) △박영덕(부산 수영 구)△박문호,박성국,박재헌(경남창 원시) △박래수(경남 진주시) △박정 영(경남 밀양시) △박문갑(경남 통영 시) △박갑영(경남 산청군) △박명호 (경남 의령군) △박태식(경남 사천 군) △박철환(전남 장흥군) △박종인 (전남 광양시) △박래호(전남 장성 군) △박형상(전남 고흥군) △박영희 (제주시 애월읍) △박순원(제주 한림 읍) ◎ 서 울 △박민찬(종로구) △박상숙(노원 구) △박재규(중구) △박문두(은평 구) △박문도(강남구) △박기태(관악 구) ◎경기 △박만훈(인천시) △음성박씨종중 사무실(의왕시) △박용호(안성시) △ 박찬모(성남시) △박영선(고양시) △ 박성현(포천시) △박치만. 원경대종 사(평택시) ◎강원 △박동수(강릉시) △박형배(삼척 시)△박순식(원주시) ◎충북 △박영순. 박재훈. 박성균(청주시) △박종웅(보은군) ◎충남 △박미옥(공주시) △박순태(천안 시) △박동화(서산시) △박재호(예산 군)△박종갑(홍성군) ◎경북 △박병학. 박해철(포항시) △박재 로(영덕군) △박원일. 박한진. 박수식 (경산시) △박찬은(예천군) △박금동 (경주시) ◎경남 △박재천. 박동열(밀양시) △박건 춘. 박수남. 박수청(창원시) △박주상. 박기조(진주시) △박주곤(양산시) △ 박종우(거제시) △박동주. 박경태(창 녕군) △박도문. 박우창(산청군) △박 순근(함양군)△박수남(합천군) ◎대구 △박상준(달서구) △박재경. 박치 원(북구) ◎울산 △박경 무(동구) △박인석(북구) △ 박상태(남구) △박경석. 박시형(울주 군) ◎부산 △박정열(영도구) △박도식(강서 구) △박성철(연제구) △박찬훈(서 구) ◎전북 △박창구(고창군) ◎전남 △박종열(여수시) ◎광주 △박영옥(동구) △함양박씨동정공 파(남구) ※밀양박씨도사공파종친회,해백공 파종친회,신라오릉보존회단체구독(2 5名)송금해주셨습니다. ※함양박씨 구소명종중 단체구독(4 4名)송금해주셨습니다.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이함께 만들어가는소중한자산입니다 한빛신문은2007년창간이후선조님의행장과종중의약사집성촌,본관별세거지변천사등 수 많은자료를기록으로남기는방대한 작업을하고 있는‘성손모두가함께만들어가는종보’입 니 다.그역할을충실히하면서선조님의현창사업과후손들에게물려줄박문(朴門)의뿌리를연 구 하고다듬어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 동 뱚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e-mail:parkss1012@han mail.net 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 월3,300원으로종보를함께만들어가는주인이되어주세요. 구독료를가까운금융기관에서자동이체(월3,300원)하여주세요 뱚뱚뱛구독료자동이체계좌453013-55-000691농협한빛신문 [8월21일에서9월20일입금고객명단] 뱚▶자동이체등록해주신분 뱜▶지로납부및송금하여주신분 ※2021년 7월 2일자 E-우리은행 한빛신문구 독료로 입금해주신 고객님과 2021년 4월 13 일자 PC신한은행 3100로 입금해주신 고객 님께서는연락 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TEL: (053)588-7300 충신박사진은임진왜란금산전투에서중봉조헌장군휘하 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公은 충주박씨 관향조 고려부정 휘 영 (英)의 14세(世)이다. 병조참의 휘 진은 5대조이고, 참의공의 셋째 병조참판 휘 제함(悌?)은 고조이고, 충청도병마절도사 휘형무(衡武)는 증조이고,여산부사휘인범(仁範)은조부이 다. 아버지는 선무랑 휘 위(衛)이고 어머니는 남양홍씨인데 공(公)은 3형제 중 셋째로 1544년(甲辰)에 태어났다. 字는 치 용(致用),호(號)는가곡(佳谷)이다. 어려서부터 특출하여 재주가 높고 문예(文藝)를 일찍 닦았 으며행동이법에맞아한고을의망사(望士)가되었다. 중봉 조헌 선생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일 어나자 옥천에 살고 있는 중봉 선생을 따라 의병을 모집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가동(家?)을 거느리고 공주로 가서 대응하 였다.이때 백형 휘 사관(士寬)의 손자 광열(光烈,宗孫)이 용 력(勇力)이 있어 함께 참여했으며 청주 승전에 공이 먼저 올 라가적을파멸하였다.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의 의병은 근왕(勤王: 싸움에 서 군사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일)을 결의하고, 북행 길에 올랐다. 충청도 아산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순찰사 윤국 형(尹國馨)의 권유로, 때마침 금산을 점거하고 이어 호남 지 방을 침범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隆景)의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공주로돌아왔다. 그러나순찰사는조헌의전공을시기해직권으로의병의부 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는 등 갖은 수단으로 방해하였다. 이에 의병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만 700명 가량의 의사(義士)만이 끝까지남아생사를같이하기를원했다. 8 월 1 6 일 에 조 헌 은 할 수 없 이 남 은 의 병 을 이 끌 고 금 산 으 로 떠났다. 이 때 별장 이산겸(李山謙)이 수백명의 군사를 거느 리고 금산에서 패배해 후퇴해오면서 “왜군은 정예대군이라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는 대적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조헌은 “국왕이 당하는 판에 신하가 어찌 목숨을 아끼랴” 하 면서그의만류를거절하였다. 또,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과 공주목사 허욱(許頊)도 조 헌의 위험을 무릅쓴 전투를 말리면서 기일을 정해 함께 협공 하자고제의하였다.그러나조헌은오히려그들의머뭇거림을 분하게 여기며 700명만을 거느리고 고개를 넘었다. 조헌은 승병장 영규에게 글을 보내 다시 승군과 합세해서 8 월 18일 새벽 진군해서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치고 관군 의 지원을 기다렸다. 한편, 성내의 왜군은 우리 군사의 후속 부대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는 복병을 내어 퇴로를 막은 다음, 모든군사를나누어교대로공격해왔다. 조헌은 명령을 내려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義)’에 부 끄 럼 이 없 게 하 라 ” 하 고 힘 껏 싸 워 왜 군 의 세 차 례 공 격 을 모 두 물리쳤으나,온종일의 싸움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 가 없었다. 왜군이 일제공격을 감행해 장막 안으로 돌입하니 의병은 육박전을 벌여 한 명의 도망자도 없이 모두 순절했고, 영규의 승군도 모두 전사하였는데, 이때 종손 광열도 같이 순 사(殉死)했으니 1592년 8월 18일 목숨을 버려 의(義)를 취한 것이다. 그곳에 하나의 의총(義塚)을 만들어 그 앞에 비를 세 워 일군순의비(一軍殉義碑)라 하고 월정 윤근수 선생이 실기 를썼는데공의이름이선비의맨앞에있다. 문열공(조헌)이 의거(義擧)하던 처음에 선비들이 모두 사 모하여 따르자 방백(方伯, 관찰사)이 미워하여 그의 부모와 처자들을 가뒀는데 공의 가족은 금산 산골에 피해 숨었다가 일가 사람들과 함께 공의 시신(屍身)을 시체가 쌓인 속에서 찾아내 보니 칼끝으로 찔려 몸이 잘라져 살이 완전한 곳이 없 었고,끝내 왼쪽 팔을 찾지 못하니 그 용맹으로 힘껏 싸웠음을 알 수 있다. 적이 물러간 뒤에 드디어 본 고을 유포면 사정리 (현대전중구 사정동)묘좌 언덕에 장사지내니 선조(先兆)를 따른 것으로 공의 묘소는 2013년 4월 26일 대전 중구의 향토 문화유산(유형)제2호로지정되었다. 공(公)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환(渙)과 호(浩)이니 덕행이 있었다. 환(渙)의 아들은 정휘(正輝)인데 일찍 죽었고, 정휘 의 아들 민(旻)이 현종(顯宗)이 온천으로 행할 때 상소(上疏) 하여 경술년(1670)4월에 성현도 찰방(省峴道察訪)에 증직되 고, 또 상언(上言)하여 정표(旌表)의 은전(恩典)을 기대했으 나해당조(曹)에서세월이오래되었다하여그만두기를요청 하자 임금께서 명하기를 ‘특별히 정려(旌閭)하여 절의를 포 상하라.’하니 이에 신유년(1681, 숙종7)10월 18일의 일로 이 는특별한예(例)이다. 공(公)의 선세구묘(先世舊墓)가 유성천 내 가장동(佳藏洞, 현 대 전 서 구 가 장 동 )에 있 어 그 마 을 솔 고 개 아 래 에 정 문 (旌 門)을세웠다. 1충신·9효자·3열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삼강문 (三綱門)으로, 정면 3칸·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삼강(三綱)이란 충(忠)·효(孝)·열(烈)을 의미하는 말이다. 전라남도나주시동강면진천리진동마을에있다. 관련된 인물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趙憲)이 이끈 70 0 의병 중 한 명으로 금산 전투에 참전하였던 충신 박사진(朴 士振)과 9명의 효자(박치인·박치도·박문철·박흠수·박검수· 박규택·박한택·박행택·박준택), 3명의 열녀(박문화의 처 진 원박씨·박준택의처김해김씨·박규택의처신안주씨)이다. 충신 박사진은사인(士人,벼슬하지 않는 선비)으로 스승인 중봉 조헌 선생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많은 공헌을 하 였고,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여 신유년(1681, 숙종7)10월 18일 임금의 특별지시로 정려가 내려져 대전 서구 가장동에 정려 각을 세우고 편액을 달아 충신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삼강문에 걸린 편액은 그의 일문(一門)에서 고종조에 9효 자 3열녀의 정려가 내려지면서 1937년 삼강문을 지어 편액을 걸때함께걸었던것이다. 9효자3열녀를보면다음과같다. 충신 가곡공(佳谷公, 휘 사진)의 7대손 휘 치인(致仁)이 아 우 치 도 (致 道 ) 와 더 불 어 형 제 가 함 께 효 도 하 여 양 친 ( 兩 親 )을 섬길제 공경과 사랑을 지성으로 하고, 어머니 상(喪)을 당하 여 함께 여묘(廬墓)3년을 살면서 물길이 멀었는데 문득 신호 (神虎)가 나타나 땅을 파서 맑은 샘을 찾았고, 여막(廬幕) 곁 에 손수 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심은 지 석달만에 지엽(枝 葉)이 쭉쭉 뻗어 그늘이 되니 이는 성효(誠孝)에 감동된 것이 었다.지나는 사람들이 그 정자(亭子)를 가리켜 박정(朴亭)이 라 하고 그 마을을 이름하여 박정리(朴亭里)라 하고 그 샘을 일러 효천(孝天)이라 하였다.공(公)이 상(喪)을 마친 뒤에도 성 묘 (省 墓 )하 고 이 곳 에 서 곡 ( 哭 )하 고 벗 이 오 면 이 곳 에 서 놀 고하니이또한좋은칭송거리가되었다.고종계사(癸巳,189 3 )에 와 서 정 려 (旌 閭 ) 를 명 하 였 다 . 효자 치도(致道)의 부인 광산김씨는 시부모를 지성으로 섬 기고남편을예(禮)로 받들고 자녀를 의(義)로가르치되규문 (閨門)의가르침을토대로하여효자를열어주었으니아름답 다. 내측(內則, 禮記篇名)의 아름다운 일을 모두 적어 후세에 전할진대 오직 광산김씨의 지행순덕(至行純德)은 부인 행실 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불행이도 하늘이 어진이를 돕지 않아 일찍이 남편을 잃고 따라 가려했으나 가족이 서로 지켜 줄 뜻 을이루지못하고종신(終身)하였다. 아들 문철(文喆)이 안으로 자교(滋敎)를 받고 밖으로 선훈 (先訓)을따라극진히효성을다하여어버이병환에손가락을 깨물어 수혈하여 3일의 명을 연장시키니 효(孝)로 좌승지에 증직되고정려가내려졌다. 휘 흠수(欽守)를 낳으니 효(孝)로 가선(嘉善)에 더(贈)해 지고 아우의 휘는 검수(儉守)인데 부모를 섬길제 뜻과 몸의 봉양을 극진히 하고 어버이 병환이 위독하게 되자 형은 두 손 가락을 잘라 수혈하고 아우는 한쪽 다리를 베어 약으로 썼다. 상(喪)을 당하여 수척하여 거의 죽게 되었고, 3년간 시묘(侍 墓)하니 면(面)과 군(郡)과 도(道)에서 효행(孝行)을 추천하 였다. 열부 진원박씨는 효자 문혁(文革)의 부인이다.남편이 염병 (染病)으로 죽게 되어 세 차례나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써도 효 과가 없자 먼저 죽느니만 못하다.하여 강(江)에 몸을 던져 자 절(自絶)하니감탄하지않는이가없었다. 또 규택(奎澤)·한택(漢澤)·준택(俊澤)이 있어 사효(四孝) 가 함께 나오니 대개 하늘이 성품(性稟)을 받고 가정에 뿌리 를둔것이다. 준택(俊澤)의 호는 야은(野隱)이고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형제가 함께 부모 병환을 간호할 제 밤새도록 눈 을 붙이지 않고 음식과 약을 몸소 공양하며 위독하게 되자 손 가를 갈아 수혈하여 3일 동안 더 살게 하였다. 상(喪)을 당하 여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거의 죽게 되었고, 장례(葬禮)와 궤전 (饋奠)을 하나같이 예절대로 하니 향당(鄕黨)이 그의 행실을 보고 효자라고 칭송하며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연명으로 어 사에게추천하여조정에보고하였다. 부인 김해김씨는 집에서 효녀(孝女)로 알려지고 시집가서 열부(烈婦)로 알려졌다. 남편이 기질(奇疾)에 걸리자 단(壇) 을 모 아 대 신 가 게 해 달 라 고 하 늘 에 빌 고 다 리 살 을 베 어 약 에 타서 그리고 하여 위경(危境)을 넘기고 살아나니 한 고을 이 칭송하지 않는 이 없었다. 옛날 전기(傳記)에 기록된 독효 정열(篤孝情熱)이이와같을수있겠는가? 야은공의 손자 규성(奎聲)의 부인 신안주씨 또한 효와 열을 다해 충열당(忠烈堂)으로 하여금 찬양문을 받았으니 한집안 에서 대대로 효자 효부 열녀를 배출하였으니 효자집안에서 효자난다는말이빈말이아님을보여주고있다. 특히 후손들은 삼정문을 세우고 그 뜻을 기리고 효를 본 받 고있어아름답지아니한가? 뱚효열부열전 충주박씨삼강문(三綱門) 충신박사진公가문의효자9명열녀2명의旌閭 충주박씨집성촌나주동강면진천마을전경 삼강문(三綱門) 충신박사진(忠臣朴士振) 충신박사진명정(命旌) 진천리충주박씨삼강문 삼강문(정려각)-1충신·9효자·3열녀의정려편액이 걸려있다. 전남 나주시 동강면 진천리는 충주박씨의오랜 집 성촌이다.임진왜란 금산전투에참전한 충신 박사 진(朴士振) 공이 순절하자 부인 숙인 의성정씨께 서 부군과 교유했던지인의배려로 대전 유성에서 곡창지대인전남나주로이거했다는후문이다. 진천1리와 2리 사이에 위용(威容)을 떨치듯 와가 한채가돌담에쌓여있는데충주박씨삼강문이다. 충신 박사진 일문에 1충신,9효자과 3열녀의정려 로고종조대에이르기까지모두정려를받았기에 이를 기리기 위해 1937년 건립된 정려이다. 효자 집안에서효자가난다고하였듯이를 증명하고 있 어소개해본다. 효자박치인·박치도형제정(旌) 효자박치도의부인열녀광산김씨정(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