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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6월30일 수요일 8 (제174호) 관향조 종친회 전북 정읍시는 영주정사와 영양 사를 세워 국권 회복을 도모하고 많은 독립운동가 를 길 러 낸 창 암 박만환 선생을 ‘5 월의 인물로 선 정했다. 창암박만환선 생은 1849년(己 酉年 1849.11.16.) 전북 정읍시 고 부군 소정면 현 암리에서 아버지 박원휴(朴源休)와 어머니 평택임씨(平澤林 氏) 사이에서 일남삼녀(一男三女)로 출생(出 生)하여 3세부터 천자문(千字文), 소학(小 學), 중용(中庸), 대학(大學) 등을 수학(受學) 하고 서기1865년3월20일 15세에 婦人 부안김 씨(扶安金氏 金倉洞, 金錫斗 선생 二女)와 결 혼 二男三女를 두었다.(부안김씨의 短命으로 후에울산김씨와재혼하다.) 1867년 선생의 나이 17세에 충남 아산의 전 재(全齋) 임헌회(任憲晦 1811-1876)선생 문 하(門下)로 유학(遊學)하며 연재(淵齋) 송병 선(宋秉璿1836-1905), 심석(心石) 송병순(宋 秉珣1839-1912),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 -1922) 선생 등과 동문수학(同門修學)하고, 그 후 성균관(成均館) 에서도 학문수학(學文 受學)하였다. 문과에 급제(及第) 하여 1886년 2월 26일 통 훈대부(通訓大夫) 行 의금부도사(義禁府都 事)와 1890년 삼례도찰방(參禮道察訪)을 역 임하다 사임 상소를 올렸으나, 조정에서는 다 시 영광군수(靈光郡守)를 제수(除授) 하였다. 어지러운 현실정치에 관여치 않기 위해 관직 (官職)을 사양(辭讓)하고 연재 송병선(宋秉 璿), 심석 송병순(宋秉珣), 간재 전우(田 愚), 면암 최익현(崔益玄), 석촌 윤용구(尹用求), 원파 김기중(金祺中), 백도진(白道鎭), 춘우 정 김영상(金永相), 화계헌 김직술(金直述), 용운 박채환(朴彩煥), 지은 최전구(崔銓九), 우당 김용승(金容承), 병암 김준영(金駿榮), 문소 김형재(金衡載), 지산 김경중(金暻中) 先生 등 많은 유학자(儒學者) 들과 도의종유 (道義從遊)하였다. 선생은 1892년 12월(고종) 53세에 고부군수 조병갑(趙炳甲)의 횡포를 보다 못해 파직상소 (罷職上疏)하였으나 고부군수 조병갑은 탄탄 한 인맥으로 익산군수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 가 다시 고부군수로 재임용된 후 선생을 야유 (揶揄)하며 조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 은 꿋꿋이 대처했으며 훗날 조병갑으로 인한 동학혁명의 단초가 된 고부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선생은 당시 지주이면서도 동학혁명(東學 革命)에 자금지원(資金支援)을 하였으며, 190 3년(고종광무) 선생의 나이 54세에 내장산에 서 개최된호남유림대회참여와부안,고부,고 창의 20문중(二十門中)과 간재 先生 외(外) 2 65명과 존화계(尊華契, 계첩명부 증손자 박철 소장)를 구성 향촌사회의 기틀과 향학을 일으 키기 시작하였다. 또, 영주정사(瀛洲精舍)를 건립 만권서(萬卷書)를 갖추고 후진을 양성하 였으며, 특히 당대의 유학자 간재 전우 선생을 초빙 6년간 후진을 양성토록 하였다. 1905년 (고종광무)56세에 스승이신 전재(全齋) 임헌 회(任憲晦)선생께서 조선의 오현(五賢)으로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 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문집 (文集)에서 명언(名言)을 발췌한 문언(文言) 을 간재 전우(田愚)선생에게 간행(刊行)하여 후학교습자료(後學敎習資料)로 활용하라 하 였으나 비용(費用)이 없어 간행(刊行)하지 못 함을 인지(認知)하고 비용 전액(費用全額)을 자비출연(自費出捐)하여 간재(艮齋) 전우(田 愚)의 서문(序文)으로 오현수언(五賢粹言)을 영주정사에서 간행하였다.(국회도서관 및 규 장각소장) 1906년(고종광무) 57세에 면암(勉庵) 최익 현(崔益鉉1832-1906)선생 둔헌(遯軒)임병찬 (林炳瓚 1851-1906)선생께서 井邑市 칠보면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倡義)함에 정 읍 칠보, 김직술(金直述독립운동가) 고창 무 장 최전구(崔銓九독립운동가),고창읍 고석진 (高石鎭독립운동가) 선생을 통하여 무성창의 (武城倡義)에자금을지원(資金志願)하였다. 1907년(순종원년) 58세에 中國 여사서(女 四書)를 직접언해(直接諺解)하여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선생의 서문(序文)과 간재(艮 齋) 전우(田愚)선생이 발문(跋文)하여 여사 서(女四書)를 쉽게 볼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 영주정사(瀛洲精舍)에서 간행 여성들의 학습 지로 배포 눈을 뜨게 하였다.(청주고인쇄박물 관, 규장각 소장, 원본 븮필사본븯 증손자박철소 장) 1909년(융희 3년) 60세에 영주정사 뒤편에 영양사(瀛陽祠) 사당(祠堂)건립하고 기자조 선(箕子朝鮮))의 大學子이신 기자(箕子)선생 과 中國의 大學子 오성인(五聖人)이신 공부자 (公夫子), 증자(曾子), 안자(顔子), 맹자(孟 子), 자사(子思) 선생 과 육현인(六賢人)이신 정이천(程伊川), 정명도(程明道), 소강절(邵 康節), 주렴계(周濂溪), 주자(朱子), 장횡거 (張橫渠) 선생 등 열두분(12名)의 초상영정 (肖像影幀)을봉안하고향사를받들었다. 1910년(융희 4년) 61세에는 日本의 은사금 을 글 로 써 서 거 절 하 고 외 압 ( 外 壓 )이 심 하 여 지자 中國 북간도(北間道) 창암산(蒼巖山)으 로 피행(被行) 하였다가 익년(翌年) 하절기 (夏節氣)에 귀가(歸家)하였다.(은사금 거부 자 9명의 명단을 담은 븮염재야록븯 독립기념관 소장) 선생은 당시 은사금을 거부하면서 [朝鮮恩 不 可 再 受 日 本 之 恩 ( 조 선 은 불 가 재 수 일 본 지 은)] 朝鮮의 은혜를 받았으니 가히 두 번 다시 日本의은혜를받을수없다하였다. 1919년(己未年)1월21일 고종황제(高宗皇 帝)께서 붕어(崩御)하시자 국상(國喪)에 적 극참여하고 식솔들에게도 상복(喪服)을 착용 께 하셨으며, 同年11월 초순(初旬)경 차남(次 男) 승규(升奎)가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1877-1955)公에게 독립운동(獨立運動) 자금 金參萬원(30,000)의 출연(出捐)을 부자(父 子)간에 사전협의(事前協議)하여 허락(許諾) 하였고, 1925년3월14일 次男 승규(升奎)가 31 세의 나이로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한 독립 운동(獨立運動)을 하다가 경성부(서울) 다옥 정 54번지에서 오후1시경 십여명의 정체불명 (正體不明) 친입괴한(侵入怪漢)들에 의한 타 살(他殺)로 동석자(同席者) 4名과 함께 전원 사망(全員死亡) 하는 슬픔을 안고 1926년(丙 寅年 양.5월28일) 78세의 일기로 흑암동 159번 지 本家에서 염원(念願)하신 조선국(朝鮮國) 재건(再建)을 보지 못하고 과부 며느리(金禮 洞33세)와 어린손자를 남기고 임종(臨終) 이 틀 전 받을 수 있는 채권서류(債權書類)를 남 겨두면 후일(後日)에 손자(孫子)들이 채무자 (債務者)와 송사(訟事)한다며 전부소각(全部 燒却)하시고고종(考終)하였다. 한편 정읍시는 정읍의 인문·역사적 가치와 위상을 높이고, 시민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지난 4월부터 매달 두 명씩 ‘정읍을 빛낸 역사인물’을선정하고있다. 유진섭 정읍시장은 “정읍의 역사적·예술적 으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재조명돼 널리 알 려지길 바란다”면서 “앞으로도 정읍의 역사 정체성을 찾기 위해 지역 곳곳에 숨겨진 역사 인물을 지속적으로 발굴·조명할 것”이라고 밝 혔다. 전북정읍시5월의인물창암박만 환선정 대한제국기정읍에영주정사와영양사를세워국권회복을도모하고많은독 립운동가길러내 박만 환 선생 존영 영주정사-전북 정읍시흑암동189-2.(등록문화재제212호) 영주정사와 뒷편 영양사는 조선후기 정읍 출신 유학자 박만환이 각각 1903년 과 1909년에 건립한 건물로, 영주정 사는 만권서(萬卷書)를 갖추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며, 영양사는 기자와 중국의 오성육현(五聖六賢)을 봉안하던 사당이다. 특히, 영주정사는 강당에 주거형 평면을 도입하여 난방의 효율성과 공간이용의 합리성을 추구하여 근 대기한옥의특징을잘보여주고있어건축사적,역사적가치가있다. 1950년 고려대학교 문과대 학 재 학 중 6 · 2 5 사 변 이 발 발 1951년 공군사관학교 정규 2 기생으로 입교 1953년부터 1 963년까지 10년간 전투기 F- 51, F-86, T-33 교관 및 훈육 관으로 근무하다 1963년 항 공기 추락사고로 구사일생으 로 살아남았던 박재성 현우 개발·소성개발 대표이사 회 장이 지난 9일 향수(享壽) 92 세의일기로영면에들었다. 전투기 추락사고로 1963년 부터 1972년까지 미군 C-121 야전병원, 일본 도쿄 산오병 원, 도쿄 경찰병원, 미공군 중앙의료원, 등에서 10년 간 38회의 대수술을 받았으며 38회의 피부이식과 성 형수술은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고, 선영 관리를 위해 서울에서 경북 고령까지 수시로 찾았기에 갑작스런 비보에 종원들과 지인들 은망연자실하다. 심근경색으로 나타난 사망원인은 점심식사까지 함께 했던 가족과 회사 직원 등은 큰 산을 잃은 듯 허 탈해 하면서도 고인이 평소 남긴 유지를 받들겠다는 각오를다지면서장례준비에만전을기했다. 4일장을 치르는 12일 발인에는 경북 고령군 다산 의 소성원에 아침일찍부터 많은조문객이찾아고인 을기렸다. 특히 대구 성서 와룡윗공원에 있는 아버지 소성공 (휘 광택)의 ‘이곡지수리계장박광택기념비’가 순 한 문으로 되어있어한글 안내판을세운 뒤하루만의영 면이라 고인의 숭조사상과 효정신에 많은 사람들이 탄복(歎服)할뿐이다. 고인은 일제 강점기 인술(仁術)로 지역주민을 구 제하고 사재를 털어 이곡저수지를 확장축조하며 주 민들을 구휼했던 소성 박광택 시조왕릉 참봉의 차남 으로 1929년 밀성박씨 행산공 22세로 태어났다.소학 교시절 6년 개근 6년 1등의 모범생으로 남에게 지기 싫어했던 어린 학생은 일제치하에서도 일본을 배척 하여당시집단도망사건은유명한일화로남는다. 계성중 3년 재학시절에는 해방이후 과도기에 경북 대구 반공학생연맹 설립에 목숨을 걸었다.고려대 국 문과에 재학중 6·25를 만났고,공사에 입교하여 선두 를달렸다. 전투기 조종사로 몇 번 의 죽 을 고 비 를 넘 겼 고 , 교관과 훈육관으로 많은 조종사를양성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는 고인의 인생에 큰 고비를 맞는다. 이에 고인은 ‘하 늘은 나의 제2의 고향’이 라는한편의시를남긴다. “나의 제2 고향은 하늘 이라네, 비행기 사고 그 아찔한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사고가 내 얼굴에 훈장을 찍었다. 참 많은 사고가 있었다. 그러 나 내 목숨을 앗아갈 뻔 한 그 사고는 나에게 38회 의 수술과 말로 표현하지 못할 고통을 주었다. 사실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하늘의 도움이었다. 늘 하늘 에서 살았기에 하늘의 보살핌이지 않은 가 생각한다. 그래서나는 지금은 날지못하는하늘을고향그리듯 올려다본다.” 고인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파도를 수차례 넘긴 다. 4븡19, 5븡16, 12븡12 등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관통하 며 살아왔다. 국회 출마 권유도 수차례 받았다. 권력 을 쥘 수도 있었지만 정치에 뜻이 없었다. 이름만 대 면 알만한 사람들이고인과 인연으로엮었지만그들 의영욕에함께하지않으며험난한파고를넘었다. 1976년 이후 영등포로터리 지하상가,소성빌딩,영 등포뉴타운지하상가를 설립운영하면서 성실한 기업 인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직원들은 아버지처럼 따랐 다. 한편으로는 5대조부터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선 영에 아카시아와 참나무 400여 그루와 잡목을 제거 하고 벚꽃나무, 목련, 라일락, 개나리 등 수백그루의 꽃나무를 심어 소성원(小城園)이라 명명(命名)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쉼터를 만들어 제공하고 지 역 지자체에서는 산책로를 개설하여 철철이 많은 사 람들이찾게되었다. 2000년 서울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여 주옥 같 은 시 (詩 )를 묶 어 시 집 ‘한 국 에 이 런 사 람 하 나 쯤 은븣’을 남겼으며, 자서전 격인 ‘늙은 전투조종사의 가슴은 뜨겁다’를 2007년 11월, ‘누가 박재성을 파깡 으로만들었는가’를지난1월에펴냈다. 이에 1979년 건국훈장 수훈,공군사관학교 총 동창 회장(1994~1995), 2016년 계성창립 110주년 기념 ‘계성의 사람들’ 선정, 2017년 본보 재정 제1회 대한 민국박씨지도자대상에선정되기도했다. 고인은 평소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겼다.‘종친회장 과 자주연락하고 종친회 중책을 잊지 말라, 대를 이 어 산소 잘 보존하고 뒷밭을 사들여 벚꽃을 심어라’ 등 주로 선영과 종중관련으로 평소 보여준 숭조사상 을심어준것이다. 유족으로는 2남 1녀의 자녀가 있다. 장남 종현은 경북고와 고려대법대를 졸업, 국제상사 비서실과 천 마석유 도매업(주유소10개 운영)을 하였으며, 현재 는 소성개발 사장으로 영등포뉴타운지하상가(120 개)를 운영하고 있고, 차남 정현은 고려대와 일본 와 세다대학 경제학부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삼성에 근 무했다.현재는 현우개발 사장으로 청담동 빌딩을 운 영한다. 한편 고인은 직접 쓴 묘비문에 “전투조종사, 기업 인으로 모든 것에 목숨을 걸고 열심히 살았다. 조상 이 도와 운 좋게 오래 살았다. 모든 이들에 감사드린 다!”라고적고있다.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낙생(落生)박재성현종영면 공군사큰족적남겨븣자녀들에게충효와숭조사상깊게심어주어 낙생박재성현종이 지난 9일향수92세의일기로 영면, 고령군다사면선영에마련된묘 지에안장되었다. 고(故) 박재성 회장 흉상과 시비, 지인들이 합심하여 미 리조성된묘역에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