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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6월30일 수요일 12 (제174호) 기획 고택은마루에앉아있는것만으로도힐링을느낄수있다.그리고그고택의내력과사람들의삶을이해하고 실천한다면금상첨화일것이다.고성청광 리 박진사 고택은 입구의 담장에서부터조선시대로의타임머신을타고간듯하다.대문은효자정려가걸려있는 정려문이다.사대부가옥의전통양식의고 택은대를이어효자가태어났고,조손에이르러성균진사가배출되었다.그리고집안의사람들은높은도덕정신 으로헐벗고굶주리는지역민을구휼하였으 니사회적지위에상응하는도덕적의무를다했다할것이다.고택을지키는종손과종부는선조의유지를받들 며현창사업에매진하고있다. 2001년경상남도문화재자료제292호로지정된박진사고택은매년고택음악회가열리고,고성군전통한옥펜 션고택민박체험장(우수숙박시설)으로지 정되어문화와역사를체험하고힐링과여유를즐기기에안성맞춤이다.집안대대로전통차를즐겨,종부최정 임(소운예다원장)의소운다회(素雲茶會) 는우리전통차를맛볼수있으며차와곁들인시(詩)감상과고가와함께하는찰나의순간은오래도록기억될 것이다. 박진사 고택은 밀성박씨 충헌공 후예의 옛집으 로 조 선 시 대 사 대 부 가 옥 의 형 태 를 잘 갖 추 고 있 다. 특히 대대로 진사와 효자가 태어난 것으로 유 명한데, 이 집에서 효자 박효근이 출생하였고, 그 의 아들 박한회와 손자 박돈병이 진사를 지냈다. 밀성(밀양)박씨 집안이 고성에 터를 잡은 때는 3 00년 전으로, 선조들은 대대로 한양과 인접한 경 기도에 살았으나 기묘사화 때 화를 피하기 위하 여 함안으로 내려와 숨어 살다가 고성군 개천면 라동에 정착하게 됐었다. 그러나 협소한 관계로 청광리로이주하여집을짓고지금에이른다. 조선 후기에 지어져 일제강점기 때 대규모로 고 쳐 지 은 이 가 옥은 안채 와 사랑 채 2동, 곳 간채 2동, 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담장이 잘 보존되어 있어고택의품위를잘보여준다.방문객이제일먼 저접하는집대문위에는이가문의효자박효근을 칭송하고자 내린 효자정려 현판이 붙어 있어 집안 의 내력을 보여준다. 정려는 국가에서 효자·충신· 열녀등이살던동네에붉은칠을한정문을세워표 창하는 것으로 신라 때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로 이 어졌 다. 이 정려 를 받은 가문 은 이를 대 대로 집 안의 영광으로 여겼고 마을의 자랑으로 칭송받았 다.효자박효근의효행은다음과같이전해져온다. 박효근의 어머니는 병든 남편을 살리려고 단지 (斷 指 )를 해 서 피 를 입 에 넣 는 등 극 진 히 남 편 을 섬겼으나 젊은 나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어머 니는슬픔에산소에가서울다가지쳐기절했다.박 효 근은 산 소에 기 절해 누 워 있는 어머 니를 발 견하 여 살리려 애를 썼고 이때 산삼을 발견한 박효근이 씹 어 어머 니에 게 먹여 살 렸다 고 한다 . 이 사실이 동네와 조정에 알려져서 효자로 인 정받았다고 한다. 집안 안주인의 거처인 안채는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부엌, 방, 대청, 갓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를 중심으로 동쪽에 담장을 둘러 별당처럼 안사랑채를 배치하였고 중문간채 를바깥사랑채로이용하였다. 중문에서 안채가 직접 보이지 않도록 담장을 둘렀다. 집 주위로는 전체적으로 높은 담장을 두 르고 있는데 기와조각을 섞어 모양을 내었다. 일 제 강 점 기 때 다 시 고 쳐 실 용 성 과 전 통 성 이 잘 조 화된 전통한옥인 이 가옥은 조선 후기 건축의 변 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고택의 터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집안의 선조가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라가는데 누군 가한강나루에서죽으려하고있었다한다. 선조가그연유를물으니‘집안에빚이있는데그 빚을갚을여력이안되니빚대신딸을내놓으라고 해서 죽음으로 그 수모를 면하려 한다’ 하였다. 선 조는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과거를 보기위해 지니 고 있 던 노잣 돈을 다 내 어주 고 진주 (당시 고 성은 진 주 목에 해당 )에 사 는 박 생원 이라 는 것만 밝히 고 내 려왔다한다.후에그집안의자손이풍수지리를공 부하였는데, 물어물어 이곳까지 내려와 지세가 좋 은지금의위치에집터를잡아주었다한다. 그리 고 고 택 밖 에 위 치한 마을 우물 은 진 해 천 자 봉 의 지하 수맥 과 연결 되어 있 어 수량 이 풍부 하고 우 물의 물맛 이 좋다 는 이 야기 가 전한 다. 과거 이 고 택 에는 많 은 고 서 등 이 있었 는데 몇 번 도 난을 당하 고 현재는 지정문화재를 비롯해 대부분의 고서 등 을 경상 대에 기 증했 다고 한다 . 또 한, 이 집안 에서 는 대대로차를즐겼다고 하는데,현재는 중사랑채를 개조해 다실로 꾸며놓고 숙박하거나 방문하는 이 들에게차를대접하는장소로활용하고있다. 박진사 고택에서 고문서 3000여점과 박효근 관 련 고문서 18점(경남도 문화재자료 350호)을 경 상대도서관 문천각에 기증하였다. 평소 부모에 대한 효행이 뛰어난 박효근(1855-1853)의 정려 를 요청한 고문서들인데, 인근지역 유생들이 관 찰사와 암행어사 등에게 정려해 줄 것을 요청한 내용인데 당시의 향촌과 지방관아의 민원처리를 비롯한사회상을연구하는데중요한사료이다. 박진사고가는 2001년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 92호로 지정된 고택으로 고택을 들어서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간 것 처럼 곳 곳에 베어 있는 세월의 흔적들을 볼수 있으며 옛 선비들의 글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대문을 들어 서며 볼 수 있는 고풍스런 정원과 족히 100년은 되었을 소나무들 그리고 집안 어디서나 볼 수 있 는문밖풍경이그대로한폭의동양화다. △효자박효근(朴孝根) 자(字)는 성 겸(聖謙), 호 (號)는 경송 (景松)으로 고 성입향조 완천 당공(휘 덕손) 의 10세 손으 로 정조 경신(1800년)에 태어났다. 문학을 숭상하고 향리 사람에게 순하게 했으며,어버이 섬김을 지극 한효도로하여성효의감동으로산신이약을주니, 모친이 죽었다가 다시 났다. 고종 을유(1885년)에 동몽교관 조봉대부의 증직과 정려(旌閭)가 내려져 공의효행을알리는청원문일부를드려다본다. 「효근은 어려서부터 회귤(어린아이의 효성)의 행 실이 있어서 사람들이 효동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이 12세에부친상을당하여서는안색이초췌함과곡읍 (哭泣)의 슬퍼함이 길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 을흘리게하였습니다.염을하고빈소를모시는절 차에 한결 상례의 제도를 준수하였습니다.저의 할 머니 또한 열부(烈夫)의 행실이 있어 따라 죽을 뜻 을 결정하여 여러차례 자살하려고 하였지만 저의 아버지 지성의 효도로 인하여 실행하지 못하다가 졸곡(卒哭) 뒤에 때를 타고 묘소에 달려가 죽어 기 절하 였습 니다 . 저 의 아버 지가 당황 하여 달 려가 묀 을안고울면서말하기를“아버지께돌아가시고어 머니마저 가신다면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하면 서엄엄(奄奄,끊어질듯한모습)하게기운이막혀인 사불성이되었는데,문득무덤섬돌아래한큰호랑이 가 자초(紫草, 지치라는 약초)를 던져주고는 가버렸 습니다.급히가져다생즙을내어입에대기를오래하 자 저의 할머니가 소생하였고, 몇 년 뒤에 천명으로 마쳤습니다.」 △효자박영회(朴瑛會) 자(字)는 익 첨(益瞻) 호는 죽 포 ( 竹 圃 ) , 효자 박효근의 아들이다. 순 조 정해(1827 년) 태어났다. 문학으로 명망 이 무거웠고, 효우가 매우 두터웠다. 어버이 병에 약을 구하려 가는길에 눈 속에 백화사(百花蛇)를 얻어 약으로 쓰자 신기한 효험의 응답이 있었다. 고종 임진(1892년)에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 되고정려가내려졌다. △진사박한회(朴瀚會) 효자 경성공 박효근의 장남으로 효자 영회의 백형(伯兄)이다.자(字)는 국섬(國贍),호는국포 (菊圃), 순조 임오(壬午, 1822년) 태어났다. 자질 이 법도가 있고 후덕했다. 11세에 고을 수령이 실 시한향시에뽑혔다. 학문을 함에 비록 사우(師友) 연원(淵源)은 없 지만, 가정에서 스스로 얻은 것은 매우 많아서 평 소 생활에 혼정신성(昏定晨省)과 맛있는 음식을 받드는 일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한가한 때에 나 아가 독서하고 연구 사색하여, 만약에 터득한 것 이 있으면 혹 밤이 되어도 잠자리에 나가지 않고 정신 모아 묵묵히 앉으셨다.앎을 다하고 함양(涵 養)을 하는 두 가지 모습이 수레 바퀴와 같이 하 여 세월과 함께 쌓아가고 마음에 두어서 일신(一 身)의주재(主宰)로하고밖에드러내어만가지변 화에 응수함을 삼았으니 하나도 공경에서 관섭(管 攝·兼官)되지 않음이 없었다. 어버이를 섬김은 뜻 을 따 르고 안 색을 기 쁘게 하 여 반드 시 그의 정 성을 다 했다 . 약 관(弱冠)에 기 침과 종기 를 앓아 여러 가 지 방편으로 치료하였지만 효과를 얻지 못하여 낮 에 는 걷지 못 하고 밤 이면 잠 들지 못 하여 일 년 이나 오래되었다.하루밤에는꿈인듯아닌듯한어떤노 인 이 와서 말하 기를 “너의 병은 만 약 침 과 약을 아 울러치료하면쾌차할수있을것이다.”라고하고는 침통과의감해유(醫鑑解諭)를주고는갔다.다음날 순천에 산다고 하는 어떤 노인이 서실에 와서 묵으 면서말하기를“어제길가다가암석위에한묶음의 의감과 침통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해가 저물었는 데도 와서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가지고 왔 다.”하고하였다.공이값을의논하여사려고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이미 사람이 버려둔 것을 얻은 것인데 거기에 어찌 값이 있을 수 있나?” 하고는 그것을 두고 가버렸다. 공이 스스로 헤아려 침과 약을 시험하니 몇 달이 되지 않아 과연 평상이 회 복되었으니 진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로 인하 여 의약의 여러 처방도 또한 널리 활용되어 구제 하는일도많아졌다. 불행이도 중년에 자부(子婦)의 상을 당하더니 또 얼마 되지 않아 자식 초상에 곡하게 되었으되, 이치로 스스로 달랠 수 있었다. 고손(孤孫) 돈병 을 가르켜 말하기를 “십년 뒤에 네가 진실로 자약 (自若)하리라”하였다. 고종19년 임오(壬午, 1882) 즉 회갑이 되는 해 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해 6월에 군란(軍亂)이 일어나 서울이 소란하 여 심히 위태로워 공포의 분위기였다. 친구인 재 상이 시험 삼아 같이 치란(治亂)의 대책을 논의 하였는데 그의 변화에 응하고 어지러움을 극복하 는 도량에 깊이 감복했다. 일이 안정된 후에 표를 올려 밝히고자 하였으나 공이 고사하며 말하기를 “이제 늙었다. 또한 먼 땅에서 미세한 발자취로 나라 학교에 올랐으니 분수에 충분하다. 이렇게 쇠약하고 썩은 몸으로 다시 벼슬길을 달리랴?”라 고 말 하 고 는 곧 고 향 으 로 돌 아 왔 다 . △성균진사박돈병(朴敦秉) 자(字)는 덕응(德應), 호는 청강(晴崗)이다. 은안공(隱安公)휘 승팔 (承八)의 아들이자 진사 휘 한회(瀚會)의 손자이 다. 철종 말년 계해(癸 亥, 1863년)에 출생하였 는데 지혜로움과 깨달음 이 범상치 아니했다.5세 에 모 친 상 을 당 함 에 능 히 슬 피 부 르 짖 는 절 도 (節 度 )를 알 았 고 , 9 세 에 부 친상을 당했을 적에 곡하고 제전(祭奠)을 드림에 집례하기를성인과같이했다.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섬김에 혼전신성(昏定晨 省, 날이저물면 잠자리를 정해드리고, 새벽이 되 면 안부를 묻는 일)과 동온하정(冬溫夏 , 겨 울이 되면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 리 는 일 )을 한 결 아 비 섬 기 는 도 리 와 같 이 하 고,계모를섬김에친모와다름없이하였다. 23세가 되는 을유(乙酉, 1885년)에 성균진사시 에합격했다. 이미 귀향하여서는 조부모아 모친을 봉양하여 모시는 것을 당연한 직분으로 삼아 다시는 나가 서 벼슬하는 것으로 일삼지 아니했다. 더욱 스스 로 옛 학문에 부지런히 힘써 널리 선비 벗들을 모 아 문학과 역사 다스림을 강구하여 충분히 쓸 수 가있기를기대하였다. 동배들 가운데 가난하여 취학을 못하는 자 및 집안 무리가운데 궁핍하여 자급이 불가능한 자 에게는 한결 모두 밑천을 대주어 구휼했다. 조부와 조모의 상 및 계모의 상을 당해서는 모두 예를 따르고 제도를 지켰다. 한 시집간 누 나를 가까운 이웃에 이사를 와서 살았는데 그 누나가 죽도록 돌봐주고 후대를 보호하여 모두 그 성심을 다했다. 완천당(고성 입향조)공의 묘소가 함안에 있 었는데 세대가 멀어져 묘소를 실전하게 되었다. 인근의 종족들에게 묻고 꾀하여 제단을 설치하 고 비석을 세워서 해마다 한번 제사를 올렸다. 이 또한 의리를 말미암아 일으킨 일이다. 이미 청광리에 거주하고는 그 시내물이 나동 (羅洞)으로부터 흘러나왔으면서 맑고 운치가 있음을 사랑했다. 그리하여 날마다 소요하고 시 를 읊조리는 것으로 취미를 삼았다. 그 아 들 이 그 뜻 을 따 라 정 자 를 지 어 서 토 구 (후 세에 퇴직 뒤나 노후의 은거처로 일컬어짐)에 이 바지 하니 공이 비로소 호를 청강(晴崗)이라 하 였다. 이에 이르러 편액하기를 청류정(廳流亭)이 라고 하니 소눌 노상직 공이 거기에 기문을 지었 다. 평소에 의관과 띠를 갖추고 행동은 가지런하고 삼갔다. 언어는 맑은 소리를 울렸으며, 내외를 두 루보되 일찍 게으른 낯빛을 지음이 없었다. 신묘 (辛卯, 1951년)에 정침에서 고종(考終)하니 진주 시 이반성면 대천리 후산 곤좌 언덕에 안장하였 다. 슬하에 아들 3남 1녀를 두었는데 용하(容夏)· 용만(容萬)·용보(容甫)인데 장자 용하(容夏) 는 민족학숙인 보성전문 3회 법학부 5회, 상업 부를 졸업한 지식인이었으나 일제 치하에서 관 직생활을 싫어하여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추 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성파 하동주와 추사체 연 구로 교유했다. 차남 용만(容萬)은 면장이고, 셋째 용보(容甫) 는 ㈜유성 등 기업인으로 크게 성공하였으며, 청 도의 화산재에 대재학공 단비를 세웠다. 오릉보 존회 총본부 이사장,밀성박씨대종회장을 역임하 였으며, 밀성재 건립당시 거액을 출연하였으며, 고향발전에도 크게 기여하는 등 종중사에 큰 족 적을남겼다. △종손박상호(朴商祜) 고성 청광리박진사고가에 는 수천여점의 고문헌이 전 해진다. 이에 종손은 유실을 염려하여 지난 2005년 진주 경상대학교 도서관에 기증 하여 ‘청강문고(晴崗文庫)’ 를 설치했다. 그리고 조부 나 산 박용하 선생의 보성전문 졸업앨범, 졸업증서 등 많은 자료를 고려대학교 박물관, 국립국악원 국악발물관 등에 기증하는 등 역사기록 보존과 계승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 다. 또한 문중의 역사가 깃든 ‘박진사댁 고가’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한옥체험공간으로 조성하 고, 선조 박효근 효행관련 문서를 문화재로 지 정 관리하는 등 문중의 전통보존화 선양에도 각 별한 정성을 쏟고 있다. 그리고 이제 집안대대 로 내려온 고문헌과 시문(詩文), 훈계문(訓戒 文) 등을 국역하여 ‘청강유집(晴崗遺集)’ 발간 을 위해 수년째 발품을 팔고 다녀 조만간 발간 될 예정이다. △종부최정임(崔丁任) 고성의 명문가 규수(閨秀) 이다. 성균관예절지도사 자 격증을 취득하였으며, 다도 (茶道)에조예가깊다. 1983년 진주여성차인회원 으로 차 생활을 시작한 종부 는 석용운 스님의 통신강좌 를 수강하면서 전문 차도의 세계로 입문하였고, 한국차인연합회의 다도대학 원과 다도정사 과정,부산여자대학교 사회교육원 전통다도 과정 수료, 부산 숙우회 선차공부 등 20 여년을 차를 마시며 배웠다. 그리고 2000년부터 각급학교와 단체에서 예절과 다도교육을 맡아 청 소년을 비롯하여 성인에 이르기까지 인성함양에 크게기여하고있다. 그리고 1993년 전국 어머니 시낭송대회에서 금 상을 수상하는 등 시(詩)와 낭송에도 탁월한 재 주를 지녔으며, 종부로 살아온 이력인지 동방예 의지국답게 차를 통하여 이 시대에 맞는 예절을 정립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고가에 ‘소운 예다원’을운영중이다. /글 사진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 il.net) 고성청광리박진사고가와사람들 선조 유지를찾아븣 청광리박진사고가(固城淸光里朴進士古家) 고성청광리박진사고가전경(①안채②장독대③잔고방④곡간채(현소운예다원) ⑤사랑채⑥중사랑채⑦마구간⑧사랑채정원 ⑨대문간채(정려) ⑩차종손주택⑪박돈병진사차자용 만(容萬家) 안채와잔고방 사랑채 문간채 흙담 소운예다원, 고택의곳간채를 개조하여다도체험장으로활 용하고있다. 고택의사람들(후예) 효자박효근정려(旌閭) 효자박영회정려(창효각) 진사박돈병존영 청류정 종손박상호 종부최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