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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5월31일 월요일 6 (제173호) 관향조 종친회·기획 충효공·어변당공파는태사공의8대손중랑장휘 이문(利文) 의 아들 충주목사 휘 의번(義蕃)을 기일세로 하고, 조선 세종 조에 한성판윤을 지내고 충효(忠孝)로서 드러난 어변당공(魚 變堂公휘坤)을파조로한다. 충주목사 휘 의번은 공민왕 21년 임자(壬子,1372)에 태어나 통정대부 충주목사를 지내고 아들 어변당공으로 인해 가선대 부호조참판에추증되었다. 충효공·어변당공파는 밀성대군의 후예이다. 밀성대군은 경 명왕의 맏이로서 팔대군의 장자로 밀성대군에 봉해졌고, 아들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 휘 욱(郁)은 고려초 (麗初)에 군도(群盜)를 토벌하여 태조(太祖)의 건국사업에 공(功)이 많았으며, 손자는 요동독포사 휘 난(遼東督捕使 諱 瀾)이다. 밀성대군의 8세에 이르러 태사공(太師公) 휘 언부(彦孚)은 고려 문종(1047년 丁亥)때 문과에 급제하여 최충과 함께 태사 (太師)를 지냈고 중서령 문하시중 도평의사를 역임하였으며 밀성부원군으로피봉되었다. 태사공은 아들을 둘 두었는데 맏이는 효신(孝臣) 차는 의신(義臣)이다. 고려 인종은 양 형제를 효의양신(孝義兩臣) 또는 고려주석(高麗柱石)이라 부르고 동 방대성(東方大姓)이란 어필 넉자를 하사 했다.유지는 경북 청도군 풍각 화산에 있 다고하나확증이없다. 효신(孝臣)은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 중이 되었고 평장사로서 중국에 사신으 로 갔을 때 천자가 예로서 대우하여 치사 하였고 본국에 돌아와 졸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라 사시하고 인종묘에 배향 하였다. 의신은 공부상서로서 종방인 양 신(良臣:彦祥의 아들), 직신(直臣:彦仁의 아들)과 더 불어 세상에서 삼언사신(三 彦四臣)이라알려져있다. 공필(公弼)은 효신의 아들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대장군 도검사 병부상서를 역 임하였다. 공은 문무에 재주가 겸비하여 고려 예종(1107년) 2년에 윤관과 같이 여 진을 쳐서 평정했다. 뒤에 진국공신으로 추존되었고 시호를 충열(忠烈)이라 사시 하였다.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육경·육 화·육권이다. 육경(育慶)은 공필의 아들인데 1130년 인종8년에 대장군과 병부상서를 지냈다. 또 1135년에 김부식과 함께 적(賊) 조광 등을 쳐서 평정하였다. 또, 글을 올려 양 현고(養賢庫)를 세워서 많은 선비를 기 르게 하고 또한 모든 고을에 널리 학사를 설립하였으며 국사를 보살펴 수정하였 다. 후예는 종가인 은산부원군파와 행산 공파로나누어진다. 아우육화(育和)는병부상서요그후는 좌상공 춘(左相公 椿)파 및 규정공 현(糾 正公 鉉)파 이며, 셋째 육권(育權)은 고 려조에 전법정랑(典法正郞)을 지내고, 그의 아들 윤섭(允燮)은 판도총랑, 손자 성극(誠克)은 문림랑, 증손 창수(昌水) 는 영동정을 지냈는데 아들 훤지(萱趾)· 훤정(萱貞)을 두었는데 장자 훤지(萱趾) 는군수를지내고,아들이손(利孫)·이문(利文)으로장자이손 은 후사가 알려지지 않고 차남 이문이 충효공·어변당공파의 기(起)1세조이고아들어변당휘곤을낳았다. 선생의 휘는 곤(坤) 호는 어변당(魚變堂)이다. 1397년(丁 丑) 경남 밀양군 무안면 상당동에서 아버지 휘 의번(義蕃, 충 주목사, 호조참판) 어머니 정부인 탐진유씨(兪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417년(태종17) 21세의 나이에 무과에 초시, 회시, 전시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 첨총제(僉摠制),호조참의(戶曹 參議), 호조참판(戶曹參判),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 使), 강원도순무사(江原道巡撫使),충청도 도순찰사(忠淸道 都巡察使) 등 요직을 거치는 동안 우리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끼친 공적이 컸다. 특히 세종임금 치적의 하나인 두만강의 국경정비와 서북 양면을 개척하는데 직접 참여 하였 으며 각 고을의 성곽을 건설하는 일에 기울여 당시의 장상(將 相)인 최윤덕 장군을 도와 국방에 헌신한 훈공이 혁혁할 뿐 아 니라 한성부 부윤으로서 수도 서울의 치정 에도 크게 이바지하 였으며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 등을 역임한 세종조의 명신 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께서 생선을 즐기 심으로 집 앞에 못을 파고 그 못에 물고기를 길러 술안주도 하 고 반찬도 하는데 삼시로 밥상을 받아 밥을 덜어서 못에 던져 주면 붉은 비늘인 고기가 먼저 먹으며 다른 물고기들은 감히 함께 먹지 않고 앞선 고기가 먹은 뒤에 먹으며, 어족이 번성하 여 부모의 공양(供養)에 풍족하였다. 4년 후 부모님이 세상을 뜨신 뒤 어느 날 꿈에 붉은 옷을 입은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뷺나는 이 못에 있는 물고기다. 여러 해 동안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이제는 내가 있을 곳으로 가야겠는데, 내일 오 전 중에 소나기가 내리며 우레가 치더라도 경동(驚動)하지마 소서,그리고 은덕을 보답하기 위하여 비늘 두 쪽을 남겨 둘 테 니 요긴하게 쓰시오.뷻하고 신인은 나갔다. 깨어보니 꿈이었고 그 이튿날 과연 구름이 짙어 천지가 캄캄하더니 소나기가 내리 며 우레 소리가 강산을 흔든다. 기둥에 기대어 가만히 보니 용 이 못가의 나무에 걸쳤는데 몸통만 보였다. 조금 후에 날이 개 이고 구름이 사라졌는데 그 나무 아래로 가서 보니 금빛이 나 는 비늘 두 쪽이 남아 있기에 주어다 잘 보관 하였다.북변에 여 진족이 침입하므로 나라에서 선생을 부르기에 [무과에 급제하 여 이천(利川)현감을 지내고 물러나와 있는 중] 그 감추어 두 었던 비늘을 말다래에 달고 말을 달려갔는데 비호(飛虎)같이 달리며,산이며 강을 평지(平地)같이 달렸다.적(敵)과 교전할 새 적진 중에 뛰어들어도 적의 화살이나 포탄이 근처에 이르지 못하며 무인지경(無人之境)처럼 횡행할 새 적군이 놀라서 달 아났다. 그 훈공(勳功)으로 삼수부사(三水府使)에 제수됨에 육진(六鎭)을 배설(排設)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명나라 에 사신을 보낼 때 무(武) 종사관으로 공이 수행(隨行)하였는 데 명나라 황제가 먼저 공의 전적을 들었기에 궁전(宮殿)앞에 사장(射場)을 설치하고 시험하거늘 공이 활 세 번을 쏘았는데 모두 관적(貫的)하였다. 명 황제가 기뻐하여 벼슬을 주려하니 공이 사양하며 뷺우리나라가 아직도 남만북구(南蠻北寇)로 평 안치 못하기에 여기에 오래도록 머무를 수 없다.뷻하니 황제가 미녀(美女) 세 사람을 주어 그곳에 영주(永住) 시키려 했다. 3 년을 머무르는 동안에 한 사람이 아들 하나씩 삼형제를 낳으니 황제가 장수 종자를 얻었다 하며 아이 이름을 一걸,二걸,三걸 이라하고 표(瓢)씨의 성(姓)을 내렸다. 방언에 박(朴)을 표 (瓢)라 하기에 지은 것이다. 선생이 귀국할 때 세 아들의 출국 (出國)을 허가치 않는다. 선생이 귀국하여 삼남(三南) 해변에 대마도구(對馬島寇)가 침입하여 변경(邊境)이 불안하거늘 조 정의 명으로 이를 평토(平討)한 공으로 벼슬이 점차 올라 한성 판윤에까지이르렀다.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와 특별히 긴급한 일이 아니면 별로 출입하지 않고 사제(私第)에 돌아와서 거처하고 그 집을 어변 당(魚變堂)이라현판하여여태껏우뚝하게서있다. 선생이 남긴 시와 삼수부 아전들과 조약한 선문, 삼수부 향 교에서 공부하는 조목에 대한 서문,명나라 화·서 승상 두 분에 게 올린 계사 등이 남아있어 이를 문집으로 간행(어변당선생 실기) 후세에 전하고 있다. 밀양시 무안면 연상리 상동동 진산 정좌원에 정경부인 조씨와 쌍분이며, 밀양 덕연서원 충효사에 배향되어있다. 뱚파조별약사 밀성박씨충효공·어변당공파(忠 孝公·魚變堂公派) 덕연서원전경-경남밀양시무안면연산1길29:①충효사②신도비각③덕연서원강당④향토사료관 ⑤어변당⑥몽은귀국이별시 (蒙恩歸國離別詩)등 충효공·어변당공파는 밀성대군의후예로 12중조의 한 분인 태사공(휘 언부)의 후예이다. 경남 밀양을 세거지로 하여청도, 울산, 경남의령, 전남 승주 등 에 세거하는 종중이다.특히 명나라 사신의종사관 으 로 가 명 나 라 황 제 의 명 에 의해 아 들 셋 을 낳 아 지 금의중국표(瓢)씨의시조이기도한어변당박곤선 생의유명한 일화, 임란 원종공신 모우당(휘 몽룡), 높은 학덕으로 사림의추앙을 받았던죽림재(휘 세 용) 공등많은 후손들이 문중을 빛내고 있으며, 밀 양시 무안면 덕연서원을 중심으로 세세손손(世世 孫孫)덕업을이루고있어소개해본다. 뱚충효공·어변당공파연원 충효사 어변당과 적룡지 선원세계 어변당선생의생애(生涯) 덕연서원 뱚▶7면으로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