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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3월31일 수요일 8 (제171호) 특 집 효자 박응훈 선생은 조선 선조(宣祖)때의 효자이다.효성이 지극하여 호랑이도 감복(感服), 함께하며 지켜주고 아버지의 묘 자리를 잡아주었다.이에 효자는 호랑이의 유해(遺骸)를 수 습하여 묘소를 만들어주어 후손들은 매년 호총에 주과포와 술 잔을 올린다.1601년(선조 34)정려(旌閭)를 받았으며,동국신 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오르고, 황간(黃澗)의 송계서원(松溪書院)에배향되었다. 효자집안에 효자 난다라는 말이 있다. 효자 박응훈 선생 소 개에 앞서 청백리이자 효자이고, 타고난 애민정신으로 선정을 베풀어 일세의 사표가 된 강릉공을 비롯한 선대를 함께 소개해 본다. 선생의 본관은 충주이다. 대전지역의 토호 성씨로 조선조에 사헌부 감찰과 진해, 직산 감무를 지내고 병조참의에 추증 된 휘 진(秦)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분이 바로 청백리 휘효함(孝咸)으로효자박응훈선생의고조부가된다. 청백리 휘 효함(孝咸)의 호는 청간재(廳澗齋)이다. 어려서 부터 제주가 뛰어났고 독서를 할 줄 알면서부터는 자기 이름의 뜻을 돌이켜 생각하여 나아가고 물러섬을 오직 부모의 명에 따 랐고, 미루어 아우들에게 우애하니 주변에서 모두 그의 효제 (孝悌)에 감복(感服)하였다.성품이 또 청렴 강직하여 처음 근 위병(近衛兵)에 발탁되어 해풍(海豊, 경기도 개풍지역의 옛 지 명 ) 의 관 원 으 로 나 가 백 성 다 스 림 을 한 결 같 이 옛 사 람 으 로 법을 삼아 추호(秋毫)라도 녹봉 밖에는 취하지 않으니 청백한 명성이경내(境內)에넘쳤다. 세종경술년(1430년)가을에 보령에 해구(海寇)가 침입하여 걱정거리임에도 적임자가 없었으나 청백함으로 선발되어 부 임즉시 순찰사 최윤덕과 감사 박안신(밀양인 규정공 后)으로 더불어 함께 성 동쪽 일리(一里)지점 당산(唐山)남쪽을 살펴 면밀한 계획으로 몇 달 되지 않아 축성을 마치니 백성이 별로 힘들이지않고도적이자취를감췄다. 이듬해에 통정(通政)에 올라 청주목사가 되었는데 치적이 많아성적이으뜸으로얼마안되어청백리에올랐다. 이후 첨추(僉樞)가 되었고 또 얼마 후 나아가서 강릉대도호 부사(江陵大都護府使)가 되니 강릉은 관동(關東)의 큰 도시 로 창고가 가득차고 집들이 즐비한데 주민이 실화하여 불길이 매섭고 바람도 억세어 불길이 부근의 다른 곳까지 번져나가고 있어 공(公)이 머리를 치면서 불을 향하여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해 말하기를 “내가 덕정(德政)을 이루지 못하여 이런 재 난이 일어나니 백성은 무슨 죄인고? 옛날 강릉은 역(逆)으로 불어 불길을 잡았는데 지금의 강릉은 바람이 불을 재촉하니 내 가 유곤(劉昆,후한 동혼의 인물)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하고 말을 마치자 바람이 그치고 불이 꺼져 다시 강릉의 고사(古事) 하나가 되었으니 또한 기이(奇異)한 일이다. 공(公)이 청백한 정치로 네 고을을 역임하면서 모두 양초(梁楚)의 명예를 얻었 는데 강릉에서 더욱 높았으니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애(仁愛) 가 길이 심어져서 하늘을 감동케 한 것이다. 사실이 조정에 알 려져서세종26년(1444년)5월2일임금이친히옷한벌을하사 하시고 더욱 권장하여 재상의 인물로 기대되었으나 세상과 어 긋남이 되어 충분히 등용치 못하였으니 옛 사람이 이른바 하늘 에게는능히하면서도사람에게불능하다는것이아니겠는가? 공이 1387년(우왕13)에 태어나 1454년(단종2)에 관아(官 衙)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8세이다. 청백으로 이조 참판에 증 직되고 예장(禮葬)을 특사(特賜)했다. 공의 신도비는 당대 최 고의 문장가 서거정(徐居正)이 지었으며, 대전시 비지정문화 재로 등록되어 충주호 둘레 길의 명소로 자리한다. 아들 원직 (原直)과원창(原昌)을두었으며강릉공파파조이기도하다. 장남 원직(증조부)은 사헌부 감찰과 사복시 주부를 거쳐 영 동현감으로 영동에 출수하여 크게 치적이 있어 그 사적이 영동 읍지에 실려 있으며,아들 도( 떳), 인(쵸), 규(圭), 지(址)를 두 었다. 넷째아들인 조부 휘 지(址)는 장사랑을 역임하였다. 1454년 (단종2년 甲戌) 3월 5일에 태어난 장사랑공은 어릴 때부터 효 우가 돈독하고 정대한 의리와 명랑한 자태가 성인과 같아 일찍 이 가정교훈을 잘 받아 학업을 조성했는데, 12세에 친상을 당 하여 호곡 망극하였다. 황간 내동에 거주하는 한성부(漢城府) 참군(參軍,정7품) 견계달(甄季達)이 공(公)을 맞아 사위를 삼 으니 이때 장사랑공은 15세요 세조13년(서기 1468년)으로 543 년 전이다. 춘궁기에는 매년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많은 양곡 을 나누어 주니 원근 주민들이 송덕을 아니 하는 사람이 없었 으나불행하게도향년32세로조졸(早卒)하셨다. 아버지 휘는 성건(成楗, 호 邵村)으로 문과에 올라 옥천군 수, 영천부사, 청주목사를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 되셨으며 7남 2녀를 두어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으니 후손들은 아마도호랑이가잡아준묘(墓)자리덕분이라여긴다. 하늘이 내린 효자이다 공(公)의 휘는 응훈(應勳) 字는 공윤 (功允) 호는 오촌(梧村)이다. 송당 박영 선생에게 사숙(私淑) 했는데 학문이 뛰어나고 행실을 도탑게 하며 재예(才藝)가 초 월하여 시는 성당(盛唐, 李白, 杜甫, 王維, 孟澔然 같은 위대한 시인이 배출된 시기)을 사모하고 글씨는 왕희지(王羲之)를 본 받으며 그림에도 공부하여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 일컬었 다. 아버지 소촌공이 병석에 누워 백방팔방으로 알아보아도 차 도가 없자 공(公)은 가족들에게 소상히 말하고 지금 당장 약을 구하러 떠난다고 일렀다. 하지만 모두가 내일 아침 일찍 떠나 라고 말렸으나 그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약 을 구하러 100리가 넘는 험한 밤길을 떠났다.온갖 동물들의 울 음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지만 그는 무서움보다 아버지의 병을 고친다는효성스런마음으로기쁨과소망으로가득하였다. 밤새껏 달려 옥천고을 입구에 닿았을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 타나 길을 막으니 선생은 호랑이에게 “내가 너의 등에 타라는 것이냐?”라고 물었다.이에 호랑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효자의깊은심성에호랑이도감복(感服)한것이다. 선생은 호랑이 등을 타고 옥천읍내에 있는 조약국에 가서 아 버지의 약을 지어 기쁜 마음으로 약국을 나왔다. 호랑이를 타 고 삽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니 가족들은 꿈인가 생시인가를 확 인하면서 다 같이 기뻐했다. 아버지께 정성껏 약을 달여 드리 니곧병환이완치되었다. 이후에도 선산 등지에 약을 지으러 다닐 때 항상 호랑이와 함께동행하였는데사람들이혼비백산하는등놀림이잦았다. 선생은 계속해서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한 겨울에도 꽁꽁 얼어붙은 강을 깨고 얼음 속에 있는 잉어를 구하여 아버지 밥 상에 올려 드렸다. 그가 있는 정성을 다하여 부모님을 모셔 오 던중 1583년 아버지 소촌공은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세하게 되었다. 형제 7인이 지관을 데리고 장지(葬地)를 정하기 위해 가던 중 선생을 태워주었던 호랑이가 나타나서 상복을 이끌면서 인 도하는 것이었다.호랑이를 계속 따라가니 어떤 장소에 이르러 그 호랑이는 발톱으로 땅을 파기 시작하여 이를 본 선생이 “이 곳이 장지가 되겠느냐?”라고 물으니 호랑이는 고개를 끄덕였 고, 선생을 비롯한 형제분들은 그곳에 아버지를 정성껏 모셨 다. 이에 산소를 쓰게 되니 바로 ‘호점산소’라 불리어지는데 동 행한 지관 또한 이 터는 자손이 번성할 곳이라 하였다. 이후 과 연 소촌공의 형제분 중 백형 휘 성량(운련도정 안주목사), 중 형 성간은 무후(无后)이고 동생 성권은 조졸하는 등 형제분들 이 무후 또는 조졸하여 그 수가 많지 않으나 소촌공의 후손들 은 크게 번성하여 현재 장사랑공파 후예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 다. 효자 박응훈 선생은 아버지 묘소 바로 아래에 노막(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 할때에 호랑이도 자주 찾아와 그와 같이 밤 을 새우기가 일쑤였고, 수시로 토끼나 노루 등을 잡아와 아버 지조석상에재물로올리기도했다. 엄동설한에는 호랑이가 선생을 안아 따뜻하게 해주고, 여름 장마 때에는 습하여 종기가 나게 되면 인정 많은 호랑이는 혀 로핥아서고쳐주기도하였다. 또한 아침저녁으로 성묘할 때에도 호랑이는 앞장서서 이슬 도 털어주고 꼬리로 하얀 눈을 쓸어주기도 하는 등 함께 시묘 살이를한것이다. 이후 선생은 3년 동안 작은 정성을 다해 시묘 살이를 마치고, 아버지 곁은 떠나 집으로 내려올 때 같이 있었던 호랑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호랑이는 고개만 끄덕이면서 깊은 산 속 으로유유히사라졌다. 이후 옥천에서 호랑이가 구덩이 덫에 걸려 있다는 소리를 듣 고 말을 타고 달려가 후한 사례후 풀어주었다. 또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꿈속에서 호랑이가 산을 달려가다 커다란 함정에 빠져 눈물을 흘리면서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다.꿈에서 깨어보니 한 밤중이었다.수소문한 결과 덕유산 줄기 무주에서 호랑이가 잡 혔는데 호랑이는 죽었다고 했다.이에 선생은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면서 달려가 호랑이를 잡은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예기 했 지만 모두들 믿지를 않아 실랑이가 벌어지고 급기야는 무주고 을 원에게 호랑이와 관계된 사실을 고하게 되고, 고을 원은 황 간 고을 원에게 사람을 보내 자초지종을 들은 후 사실임을 알 게 되었다. 이에 무주 원님은 ‘출천지효’라고 말하면서 관군을 동원하여 호랑이를 운반 선생이 살고 있는 영동군 황간면 소계 리의 뒷산 넘어 아버지 소촌공 산소 맞은편 200미터 지점에 매 장하니그곳이그유명한‘호총’인것이다. 선생은 아버지 소촌공 상사에 시묘 중 어머니(인동장씨)의 상사를 당해 5년의 시묘를 하면서 죽만 먹으며 슬픔을 다하다 돌아가시어 호총 위에 장사하니 매년 향사에 후손들은 호총에 도주과포에술을따르며음덕을기리고있다. 선조조에 이 사실이 알려져 1601년(선조 34) 정려(旌閭)가 내려지고,사림들은 황간의 송계사에 배향하니 우암 송시열 선 생이 정향축문을 지었으니, ‘앙유(仰惟)하니 지성(至誠)은 옛 날도 짝을 못해 효(孝)가 범에 감화되어 종(僕)처럼 따랐도 다.’하였다. 풍부한 물질과 변화하는 세태에 가정폭력과 흉악한 범죄가 늘어나면서 많은 분들은 청소년들의 인성부재에 의한 것이라 지적한다.부모는 나를 낳으면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오직 자녀들잘되길바라고있다. 오촌 박응훈 선생은 하늘이 내린 효자이다. 선생이 5년간 시 묘하였던 터와 호총 그리고 호랑이가 잡아 준 묘 자 리 는 청 소 년들의 효 체험공간으로 충분하다다. 특히 동국신속삼강행실 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오르고 정려가 내려져 있으니 더 할 나위 없을 것 같다.특히 선생의 효성에 호랑이도 함께 하였 으니 전해져 오는 호총실기 일부를 인용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조 중종 때 옥천군수(沃川郡守)와 영천부사(永川府使) 를 지낸 소촌(邵村) 박성건(朴成健, 忠州人)은 문간공(文簡 公) 눌재 박상(訥齊 朴祥)에게 사사(師事)하고 송당 박영(松 堂 朴英)과 교우(交友)하며 고봉 기대승 선생과 삼종조(三從 祖) 문충공(文忠公) 박순(朴淳, 선조때 領相)과 도의지교(道 義之敎)를 강론(講論)하며 지낼 때 장씨부인 꿈속에 한 노인 으로부터 잉어 일곱 마리를 얻어 첫째는 봉황새(以鳳) 둘째는 황룡(黃龍, 以龍 義兵將) 셋째는 기린(以麟) 넷째는 범(以虎) 다섯째는 오색구름(以雲) 여섯째는 선동(仙童, 應勳 - 孝子) 일곱째는 청조(靑鳥,以鸞)가 되는 꿈으로 얻은 칠형제를 거느 리고 살았다. 소촌공(邵村公)의 노모(老母)가 80이 넘으니 봉 양(奉養)을 위하여 영천부사를 사임(辭任)하고 황간(黃澗)땅 내동(內洞)에정주(定住)하였다. 이후 농부와 어흡(漁翕)으로 한가하게 지내던 경오년(庚午 年, 90세)가을에 우연히 득병(得病)하여 환후(患候)가 위중 (危重)하시니 칠형제가 사방으로 구약시탕(求藥侍湯)하였으 나 효험(效驗)이 없고 잉어 드시기를 원하므로 엄동(嚴冬)에 얼음을 깨고 잉어 구하기에 며칠을 헤매던 어느 날 새벽 오촌 응훈(梧村 應勳)이 냇가로 나가 잉어를 잡기를 지성(至誠)으 로 기도(祈禱)하고 얼음을 깨는 찰라 난데없이 얼음 깨지는 소 리가 나더니 잉어 한 마리가 뛰어 올랐다. 소원(所願)하던 잉 어를드리니환후(患候)가쾌유(快愉)하셨다. 그런후오래되어소촌공이대소변(大小便)이불통(不通)하 는 환후(患候)로 형제 칠인이 태산(泰山)같은 걱정을 하던 중 상주읍내(尙州邑內) 조약국이 의술(醫術)이 고명(高明)하고 이런 병에 특효약을 제조한다는 소문을 듣고 오촌(梧村)이 약 을 구하러 가기를 앞장서 서둘러 등촉(燈燭)을 밝히고 술시 초 (戌時初,저녁 일곱시경)에 출발하니 초겨울 날씨가 이미 어두 워 졌 다 . 방 단 이 강 변 ( 江 邊 )에 이 르 니 큰 범 이 가 는 길 을 가 로 막고 꼬리를 치며 눈에서는 불빛이 환하다 梧村은뷺나는 지금 친환(親患)이 위중(危重)하여 약을 구하러 가는 길인데 네가 어찌 길을 막느냐 빨리 비켜라뷻고 호통을 치니 호랑이는 꼬리 로 제등을 두드리면서 타라는 시늉을 하므로 梧村이 뷺네 등에 타라는 말이냐뷻하니 머리를 끄덕끄덕하므로 호랑이를 타고 양 손으로 범의 갈기를 단단히 붙잡고 달려가니 비룡비호(飛龍飛 虎)란 말대로 순식간에 상주읍내에 당도하여 조약국을 찾으니 깜짝 놀라며 뷺황간(黃澗)이 거리가 백리가 넘은데 밤중에 어 떻게 왔으며 도저히 못가니 자고 가시오뷻라고 勸한다. 梧村이 범을 타고 온 사실을 이야기하니 뷺출천지대효자(出天之大孝 者)뷻라 천신이 감응(感應)하고 금수가 감동하였으니 고금천 하(古今天下)에 처음 보는 일이라고 칭찬(稱讚)을 아끼지 않 았다. 길가에서 기다리던 범을 타고 돌아오니 날도 새지 않은 이른 새벽이라 집안 상하가 영문도 모르고 놀라며 시탕진음 (侍湯進飮)하여邵村公을소생(蘇生)시켰다.-중간생략- 또 몇 년후 부친(父親)이 노령(老齡)으로 고생 하실 제 이번 에는 선산(善山) 이 약국 약이 효험(이 있을 거라는 공론(公 論)에 이른 새벽에 출발하려하니 마을 앞 숲에서 범이 기다리 고 있다가 꼬리를 흔들며 타라는 시늉을 하므로 타고서 약을 구 해 오 니 혹 그 모 습 을 본 사 람 들 중 어 떤 이 는 놀 라 서 기 절 하 고 어 떤 이 는 감 탄 하 며 칭 송 아 니 하 는 사 람 이 없 으 며 이 소 문 은호서(湖西)영남으로퍼져서공의효행을탄복하였다한다. 얼마 후 운명(殞命)에 다 달았을 때 오촌이 마지막으로 왼손 무명지(無名指) 피를 드렸으나 백약이 무효로 선조사년 신미 10월 14일 午時에 소촌공(邵村公)이 별세하니 때에 92세(歲) 였다. 兄弟 7인이 초상범절(初喪凡節)을 극진히 하고 장지(葬 地)를 구하는데 수 십일을 지관(地官)과 더불어 헤매던 어느 날 소계리(小溪里) 재에 도달하니 갑자기 범이 나타나서 앞장 서더니 산중에 이르러 앞발로 땅을 파고 꼬리로 땅을 가리키며 梧村의 옷자락을 물고 가므로 뷺이곳이 장지(葬地)란 말이냐 뷻고 물으니 끄덕끄덕하므로 지관(地官)이 산 형세를 살펴보니 오공입지형(蜈蚣入地形)이라 앞에는 소계(小鷄) 금계(金鷄) 가 십리 내에 있으니 대명산 이로다. 지네가 닭이 없으면 무슨 힘을 쓰리오 천작(天作)으로 두 마리의 닭이 있으니 백자천손 (百子千孫)에 만대봉사지지(萬代奉祀之地)가 분명하다하므 로 그 자리에 장례(葬禮)를 지내고 墓아래 여막(廬幕)을 짓고 梧村이 시묘(侍墓)를 살았다. 밤에는 범이 와서 같이 자고 추 우면 범이 따스한 털로 감싸주고 몸에 종기(腫氣)가 나면 혀끝 으로 핥아서 낫게 하며 조석상식(朝夕上食)때는 범이 같이 주 선하고 꼬리로 아침이슬을 털고 눈을 치우고 낮에는 산중에 들 어가 사슴과 노루며 토끼 꿩 등을 잡아다 제수(祭需)에 쓰게 하니 마치 종을 부리는 것 같이 하였다. 맏 상주 간은공(澗隱 公)은 집에서 혼전(魂殿)을 모시고 주문공의 가례(家禮)를 따 라 집상(執喪)하며 농사와 가축을 길러 매월 두 마리씩 개를 범의 먹이로 주며 범에게 뷺너는 아우의 효성에 감동하고 정성 이 지극하니 너 보기가 부끄럽다뷻며 범을 위로하였다. 시묘 3 년을 마치고 하산하니 머리는 장발이요 온몸은 쇠약(衰弱)해 져서말이아니었다. 이 때 황간(黃澗)고을 신관(新官)이 도임(到任)하여 고을 안 사정을 물을 적에 朴 梧村의 효행을 세세히 듣고 감탄하며 범 구경하기를 원하고 梧村을 청첩(請牒)하므로 범을 타고 가 서 문밖에 세우고 사또(使徒)께 인사하고 좌정(坐定)하니 梧 村을 극구칭찬(極口稱讚)한 후 범을 구경하고자 한다. 梧村이 뷺범아 범아뷻부르니 꼬리를 흔들며 동헌(東軒)마당에 들어왔 다. 사또는 뷺착한 범 이로고 어디 짐승 잡는 시늉을 한번 해 보 아라뷻하니 별안간 아우성 소리를 지르고 곤두박질을 넘고서는 으르렁 거리며 달려드는지라 신관사또 방문을 닫고 방구석에 쓸어져 기절하여 숨도 못 쉬고 말도 못하고 손만 허우적거리며 부들부들 떨므로 범을 물리쳤다. 한 시간 후에 정신을 진정하 더니 뷺십년감수는 했소뷻하면서 농물( 物)을 선사하며 효행 을칭찬하고조정에장계(狀啓)를올렸다한다.-중간생략- 범도 명(命)이 있어 몇 달 후 梧村의 꿈속에서 뷺지금 무주덕 유(茂朱德裕) 산하를 지나다가 함정에 빠졌소뷻하므로 형제 칠 인과 하솔(下率)을 거느리고 말로 달려도 길이 백 여리라 도착 했을 때는 이미 범은 죽은 후였다. 고위(固 酬)에는 빽빽이 사 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다가 梧村이 범을 어루만지며 무한히 슬 퍼하며 범 주인이란 내력을 이야기하고 범을 사겠다고 하니 뷺범의 주인이 있다는 말은 고금에 못 들어 본일뷻이라며 가서 판결을 내리자고 하였다. 하는 수 없어 무주 원님께 고발되어 원님 앞에 조사(調査)를 받았다. 원님은 사람을 시켜 황간 고 을에서 자세한 내력을 조사한 후 뷺황간 박 선생은 양호(養虎) 하며 범을 타고 약을 구하고 묘지를 선(選)하여 조석상식에도 같이하며 종과 같이 부렸다는 말은 들은 지 오래이나 오늘날 비로소 만나 보게 되어 기쁘오뷻라며 무한히 찬양하고 범을 내 어주라 명하므로 공은 값을 厚하게 치르고 범을 운반(運搬)할 때 무 주 원 님 은 역 졸 (驛 卒 ) 을 시 켜 황 간 까 지 운 반 하 여 주 었 으 므로 범이 놀던 자리에 묻어주었다. 그곳이 바로 소촌공(邵村 公)의 무덤 앞이요 소촌공 무덤을 호점산(虎占山)이라하고 범 의 무덤을 호총(虎塚)이라 이름하여 비석을 세우고 매년 음력 10月11日 소촌공 묘사 후에는 주육(酒肉)등 제수(祭需)를 진 설(陳設)하여범의절덕(切德)을기리고있다. 梧村은 오직 평생을 부모만을 위하고 시묘육년(侍墓六年) 동 안 하 루 도 집 에 내 려 오 는 일 없 이 묘 를 떠 나 지 않 고 한 서 (寒 暑)를 견뎌서 몸이 쇄약해진 결과 향년 三十六세로 卒하니 호 서사림(湖西士林)이 조정에 상소(上疏)하여 선조 二十一年 경인(庚寅)에 선조대왕이 특명하시어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고 친필로 븮효자오촌박응훈지려븯(孝子梧村朴應勳之閭)의 판액(板額)을 하사하셨으니 지금 매곡면 내동 도로변에 열녀 朴守玄의 妻 선산김씨의 열녀문과 쌍정문(雙旌門)으로 세워 져이고장효행정열(孝行貞烈)의본이되고있다. /글정리·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효열부열전 호랑이도감복(感服)한효자박응훈 뱚효자박응훈선생의선원세계 강릉공묘역전경-왼쪽의신도비가대전시비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있으 며충주호둘레길에자리하고있어뭇사람들의발길을잡는다. 소촌공 묘, 오공입지형(蜈蚣入地形)이라 앞에는 소계(小鷄) 금계(金鷄)가 십리 내에 있는 대명산으로 지네가 닭이 없으면 무슨 힘을 쓰리오 천작(天 作)으로 두 마리의 닭이 있으니 백자천손(百子千孫)에 만대봉사지지(萬代 奉祀之地)라일컬어진다. 뱚효자오촌공박응훈 오촌공효자정려(영동군향토유적제54호),영동군매곡면내동리 뱚맺음말 뱚호총실기(虎塚實記) 호총-오촌공묘아래있으며,호총실기비가세워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