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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월31일 일요일 8 (제169호) 특 집 강릉박씨 삼가공 후손들이 사천면 미노리와 방동리에 언제 부터 거주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한 문헌이 없어 알 수 없다.그 러나 강릉박씨의 연원과 후손들의 행장을 보면 짐작해볼만 하다. 강릉박씨는 신라 제5대 파사왕의 31세손으로 명종17년(118 7년)형부상서 백임지,내시장군 이문중,공부상서 조원정,상 장군 석린, 병마사 석중, 석부, 주적 등 의 모반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워정국공신(靖國功臣)에책록되었으며, 신종2년(11 99년 乙未)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계림군(鷄 林君)에 봉해진 휘 순(諱 純)이 치사(致仕)하여 강릉으로 내 려가 여생을 마치니 후손들이 그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본관을강릉으로삼게되었다. 강릉박씨는 고려조에는 대부분 개성에 거주하였다.이로 인 해 강릉박씨의 문호를 연 휘 순(純)을 비롯한 그의 아들 희 (希),손자 종태(從台)등 6세 지계(之桂)까지의 묘소는 개성 에있다. 강릉에 현존하는 묘소는 지계(之桂)의 아들 5형제 중 1364 년(공민왕13년)에 태어나서 태조원년(1392년)에 문과에 올 랐고 조선 세종 때 단천 군사(端川 郡事) 겸 안렴사(按廉使) 를 지내면서 은혜로운 업적을 높이평가 주민들이 동비(銅碑) 를 세워 기념하고 의주(義州) 구암사에 배향된 넷째 자검(自 儉)의묘소가저동의경양사옆에있다. 단천공 자검(自儉)이 아들 3형제를 두면서 번성하였고 조 선조에 들어와 문과급제자 7명을 배출, 그 후손들은 강릉의 각지역으로흩어져각기집성촌을이루기시작한다. 단천공의 장남 중실(中實)은 무후(无后)이고, 둘째 중신 (中信)은 세종 20년(1438) 문과에 급제하여 영흥판관을 지냈 으며, 부모를 공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향교를중건하는등선행이뛰어나,중종2년(1452)향년62세 로별세하니조정에서는이조참판을증직하였다. 삼남 중경(中敬)은 세종29년(1447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군위현감,영월군수,1499년 승문원참교를 지냈다.아들 영식, 영근,영정 삼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영근의 둘째아들 승휴(承 休)는 교수이고, 그의 아들이 삼가공(휘 수량, 遂良)인데 단 천공부터 교수공(휘 승휴)까지의 묘소는 강릉시 저동 경양사 부근 증산(甑山)에 묘소가 있다. 묘소가 있는 저동은 사천면 미노리에서 약 7.2㎞ 정도 떨어진 곳으로 삼가공이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돌아가신 후에는 3년의 시묘를 했으니 교수공까지는강릉저동에서세거하였음을알수있다. 미노리에는 삼가공이 노닐던 곳으로 유래된 삼가봉과 쌍한 정, 묘소 등이 있고, 삼가공의 행장을 보면 뷺선생의 당숙(堂 叔 ) 이 되 는 사 휴 당 휘 공 달 (公 達 ) 은 청 신 (淸 愼 ) 한 성 품 으 로 - 중략- 은퇴(隱退)하고 고향에 돌아와 선생과 같이 사월촌(沙 越村)에서살았다.시냇물을사이에두고남북에집이있어서 로 븣뷻라 하였으니 사월촌은 남쪽의 미노리와 북쪽의 판교리 사이에 흐르는 사천(沙川)을 이르는 지명으로 보아 미노리는 550여년 이어지는 후손들의 집성촌임에틀림없다할것이다. 그리고 인근 방동리에는 ‘강릉박씨 세장동(江陵朴氏 世藏 洞)’이라는 표식이 돌에 새겨져 있으며, 三可公의 재사(齋舍) 오사재(五思齋)가있다. 조선조에서 단천군사를 지냈으며 재직시 선정으로 백성들 의 칭송을 받아서 거사동비(去思銅碑)가 남아있는 휘 자검 (自儉)의 현손이며, 아버지 휘 승휴(諱 承休) 公은 젊어서 세 상을 떠났으며 어머니 영해이씨는 감찰 이중원(李仲元)의 따 님으로 효자 이양무(李良茂)의 손녀로 정숙유아(貞淑柔雅) 하며부덕(婦德)이높았다. 1475년(성종5)에 태어난 공의 휘는 수량(遂良), 자(字)는 군거(君擧),호는삼가(三可)이다.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학문도 일취월장하여 장성함에 따라 지조(志 操) 또한 고결(高潔)하여 세로(世路)에 뜻이 없고 오직 산수 간(山水間)에풍월(風月)을벗하여락(樂)을삼았다. 하루는 과거에 급제한 향인(鄕人)이방문하니,어머니는 이 를 만나보고 칭찬하며 부러워하였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뷺무 릇 사람의 자식 된 자는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제일 가는 효도(孝道)인데 내 어찌 혼자서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 겠는가뷻하고 마침내 결의(決意)하여 연산주(燕山主) 10년(1 504)에 사마시(司馬試)에 제4인으로 합격하고, 그 후 다시는 과거에응하지않았다. 연산군이 단상법(短喪法)을 제정하여 이를 어기는 자(者) 는 사형에 처한다는 엄한 령(令)을 내렸다. 그러나 선생은 이 때 모친상을 당한지라 우심(憂心) 끝에 개연(慨然)히 말하기 를 「차라리 부월(斧鉞-도끼) 아래 죽을지언정 선왕(先王)의 제도를 어길 수 없다.」하고 여묘(廬墓)하며 3년 상(喪)을 받 들었다. 중종 임금이 등극하여 바른 정치가 돌아오니 나라에 서그효성을가상히여겨정려를내렸다. 1516년 가을 충암 김정(沖菴 金淨) 선생이 금강산을 유람 (遊覽)하고 돌아가는 길에 선생의 집을 방문할 때 선생은 집 이 가난하여 일꾼들 사이에 끼어 새끼를 꼬고 있었으므로 김 정은 처음에 선생이 주인인줄 몰랐다. 서로 인사하니 한번 본 것이 오래 사귄 친구와 같이 친숙해져서 표주박의 술로 대작 (對酌)하며 회포를 풀면서 수일간(數日間) 머물렀다. 이별의 순간을안타까워하며척촉장(철쭉나무지팡이)을선물하면서 시 한수를 읊으니 ‘수많은 옥(玉-봉을 뜻한다.)들이 층층인 절벽에서/늦가을 눈서리 맞은 철쭉가지를/지니고 와 그대에 게 드리노니/ 길이길이 마음에 간직하소서’(萬玉層崖裏/ 九 秋霜雪枝/ 持來贈君子/ 歲晩是心期)였다. 이에 선생이 ‘곧아 서 먼저 찍힐 것 같아/ 고의(故意)로 그 몸 구부렸구려/ 곧은 성품 오히려 그 안에 있거늘/ 어찌 도끼로 찍힘을 면할 손가 (似嫌直先伐/故欲曲其身/直性猶存內/ 那能免斧斤)’라고 화 답하였는데 그 숨은 뜻을 가히 짐작할만하다.(충암년보에 수 록되어있다.) 훗날 김정은 기묘사화 때 제주도로 귀양을 갔으나 결국 죽 음을 당하고 말았다. 선생은 충암과 함께 몇일을 지내는 동안 충암의 사람됨을 간파(看破)하고 충암의 행로로 충고의 말씀 을 대신한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이 번뜻이는 시(詩)로, 충암 의 성품을 척촉장에 비유하며 비록 굽은 철쭉이지만 속에 품 은 뜻 은 곧 아 서 이 목 ( 耳 目 )을 끄 니 화 를 피 할 수 없 다 고 경 고 하고 있어 직목선벌(直木先伐븡곧은 나무는 쓸모가 많아 먼저 베인다)의 교훈을 깨우쳐 준다.(당시 선생의 나이 42세로 충 암보다11살위다) 기묘제현(己卯諸賢)들이 선생의 행장과 우의(友誼)를 높 이 평가하고 천거하니 현량과에 뽑혀 용궁현감을 제수 받았 다. 중종(中宗)이 불러 하문(下問)하시길 “요순(堯舜)의 어진 정치를 다시 할 수 있겠는가?”하니 “소신(小臣)은 초야에서 자라고 살아왔기에초성(草性)을잘 알고있습니다.옛날부터 단 풀은 지금도 달고 옛날에 쓴맛이었던 풀은 지금도 역시 쓴 맛입니다.하잘 것 없는 초목(草木)의 본성(本性)이 이러하거 늘 사람의 본성(本性)이야 어찌 고금(古今)을 통하여 달라지 겠습니까? 만약 지금도 요순(堯舜)의 정사(政事)와 같이 다 스린다면어렵지않게태평성대를이룰수있을것입니다.”하 니임금(중종)이말을듣고가상히여겨칭찬하였다. 중종조당시큰문제였던토지소유의불균등을개혁할것을 선생은 강력히 주장하였다. 1518년(중종13년) 인견하는 자리 에서 “우리나라는 백성의 빈부차이가 너무도 심합니다. 부자 는 그 땅이 한량없이 넘쳐나고 가난한 자는 송곳 세울 곳도 없 습니다.비록 정전법(井田法)이 훌륭하다 하더라도지금은시 행할 수가 없으니 균전법을 시행하면 백성이 실질적인 혜택 을 입을 것입니다”하고 균전법 시행을 촉구하였다.선생의 균 전법 시행에 대해서는 이전에 토지개혁론을 주장한 신용개와 전라도 순천지역의 폐해를 들어 유성춘도 선생의 주장에 동 조하고 적극지지 하였으나 중종은 “균전은 지금 시행할 수 없 는 형편이다. 자기의 소유를 갈라서 남에게 주는 것은 원망스 러울 뿐만 아니라 가난한 백성은 씨를 뿌릴 수가 없어서 부호 들에게 도로 팔아넘기게 될 것이니 이익이 없다.”하여 시행치 않았다. 용궁현(龍宮縣)을 다스릴 때 읍내에서 형제간에 토지 문제 로 다투다 오랫동안 판결이 나지 않은 송사가 있었다. 선생이 성찬(盛饌)을준비해놓고형제를불러술을대접하면서말하 기를 “너희들은 형제간(兄弟間)의 중(重)한 의리(義理)를 모 르고 서로 원수가 되어 다투는구나. 나의 덕(德)이 모자라 너 희들로 하여금 동기간(同氣間)의 싸움이 발단(發端)하게 되 었으니 내가 무슨 면복으로 너희들을 다스리는 주인(主人)이 되겠느냐?이자리는너희들이 태수(太守)를 전별(餞別)하기 위하여만든것으로알아라.”하고고금을통하여형제간의우 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 말하며 타이르기를 “전토(田 土)는 갖추기 쉬우나 형제는 얻기 어려운 것이다.부모로부터 받은 몸이므로 좌우 수족(手足)과 같은 것이 형제인데 어찌 한 짝 팔을 잘라버리려 하는가? 서로 사애(思愛)하며 살아가 는 것이 중(重)한 일인가?”하며 눈물을 흘리니 형제가 감오 (感悟)하며 즉시소송문서를 찢어버리고서로 사양했다.선생 이 칭찬하며 말하기를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 는 허 물 을 고 칠 줄 아 는 것 이 더 욱 착 한 일 이 다 .”하 고 술 잔 을 들어권하니형제가그뜻에탄복하여종신(終身)토록우애가 변하지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 로 돌아오니 행장이 쓸쓸하고 다만 빈 롱(籠)하나뿐이었다. 선생이 용궁현에 부임할 때 암소 한 마리를 타고 갔는데 돌아 올 땐 그 소가 새끼를 낳았다.그래서 그 송아지는 관부(官簿) 에 올려놓고 어미 소만 데리고 오니 옛날 수춘태수 묘씨(壽春 太守 苗氏)의 고사(故事)와 같으니 그 청렴함을 가히 짐작할 수있다. 선생의 당숙(堂叔)이 되는 사휴당 휘공달(公達)은 청신(淸 愼)한 성품으로 학문을 숭상하여 덕행이 선생과 상합(相合) 된다.현량과에 올라 홍문저작(弘文著作)과 병조좌랑(兵曹佐 郞) 역임했다. 역시 은퇴(隱退)하고 고향에 돌아와 선생과 같 이사월촌(沙越村)에서살았다.시냇물을사이에두고 남북에 집이 있어 서로 만나 경학(經學)을 강마(講磨)하면서 지냈다. 혹시 시냇물이 넘쳐 건너지 못할 때는 각각 남북 언덕에 마주 앉아 잔을 들고 권하다가 소요(逍遙) 자적(自適)하니 사람들 이쌍한(雙閒)이라고불렀다. 집 서편에 언덕이 있는데 선생은 삼가정(三可亭)이라고 부 르고 자해(自解)하기를 ‘내가 학술(學術)이 없으면서 사마시 (司馬試)에 올랐으니 가(可)히 욕되지 않고,내가 전지(田地) 가 없으면서도 하루 두끼를 먹을 수 있으니 가히 굶주리지 않 고, 내가 인지(仁智)가 없으면서 산수간(山水間)에 살 수 있 으니가히속(俗)되지않다.’고했다.이와같이초연한기품으 로세상을돌아보며자적(自適)하고여유있게지냈으므로한 시대(時代)의 선비들이 무참히 쓰러져간 사화(士禍) 속에서 도 홀로 그 화(禍)가 미치지 않았다.선생은 흥에 겨우면 반드 시 시를 읊었으나 한점의 속기(俗氣)도 없었다. 그래서 평론 가들은 선생의 시를 ‘마치 고삐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을 힘차 게 나는천마(天馬)와 같은 시풍(詩風)이다’고 했다. 선생이 태어날 때 중국 사신이 와서 “모년모월모일에 동국 땅에 처사성(處士星)이 나타났다”고 하더니 선생이 별세하였 을 때 중국사신이 와서 “동국 땅에 처사성이 떨어졌다”고 하 였다. 날짜를 헤아려보니 그날이 선생께서 별세한 날이었다. 중국 사신이 돌아가서 천자께 아뢰니, 천자는 사관에게 명하 여 “모년 모월 일에 동국처사(東國處士)박수량이 졸하였다.” 고 특별히 기록하게 하였다. 명종 원년(1546년) 2월 5일 향년 72세의 일기로 영면하니 사천면 미노리 신좌원(辛坐原)에 안 장 되었다. 1645년(인조23년) 8월에 강릉의 명현으로 최치훈, 최응현, 박공달, 최수성, 최운우와 함께 최초로 강릉 향현사 (鄕賢祠)에배향되었다. ※ 註-임영(臨瀛)강릉의옛이름 오사재는 삼가공의 재사(齋舍)이다. 경내에 있는 무궁화나 무가 매년 폭염에도 꿋꿋하게 만개하면서 오사재의 주인인 삼가공박수량선생의청렴과충효정신을대변하는듯하다. 일제시대와 6븡25 전쟁에도 살아남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 고 있는 무궁화나무는 높이 4m, 밑동 직경 0.5m, 둘레 1.5m로 밑동에서 지상50cm정도 높이에서 줄기가 3갈래로 가지가 나 뉘어져 펼쳐졌다.전체 둘레6m의 토종 무궁화로,지금은 붉은 색 꽃이 만개해 자태를 뽐내고 있어 2011년 천연기념물 520호 로지정되었다. 국립산림과학원 조사 결과 이 무궁화나무 수령은 120년으 로 추정된 무궁화나무는 통상 수명이 20~40년 정도로, 그 이 상이 되면 고사한다.이 무궁화가 장수한 것은 제때 약을 치고 거름도많이줬기때문으로분석됐다. 국내 무궁화나무는 일제강점기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대 부분이 훼손돼 오래된 나무를 찾아보기 어렵다. 60년 정도 된 보 호 수 는 강 릉 시 연 곡 면 유 동 리 에 있 는 한 그 루 등 전 국 에 세 그루 정도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오사재는 음력 3 월13일향사를받들고있다. 쌍한정은 선생의 당숙(堂叔)이 되는 사휴당 휘 공달(公達) 공과 서로 만나 경학(經學)을 강마(講磨)하면서 지낸 곳이다. 혹시 시냇물이 넘쳐 건너지 못할 때는 각각 남북 언덕에 마주 앉아 잔을 들고 권하다가 소요(逍遙) 자적(自適)하니 사람들 이쌍한(雙閒)이라불리워지면서이름하였다. 쌍한정 옆의 효자정려는 기묘명현의 한분이신 삼가선생의 효를 기리기 위해 내려진 정려이다. 선생의 청년기에는 효를 위하여 사마시에 등과하였고 폭군 연산조의 단상법이 엄히 시행될 무렵에는 모친상을 당함으로서 삼년간 여묘(廬墓)에 서복상(服喪)하였다. 때문에 중종개옥후(中宗改玉後) 생전에 정려(旌閭)가 내 려졌고 삼강행실도에 올랐다. 연산군이 단상법(短喪法)을 제 정하여 이를 어기는 자(者)는사형에 처한다는엄한 령(令)을 내렸다. 그러나 선생은 이때 모친상을 당한지라 우심(憂心) 끝에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차라리 부월(斧鉞-도끼) 아래 죽을지언정선왕(先王)의제도를어길 수없다.」하고여묘(廬 墓)하며 3년상을 받들었다. 중종 임금이 등극하여 바른 정치 가돌아오니나라에서그효성을가상히여겨정려를내렸다. ‘박치규 가옥’의 택호는 강릉박씨 관향조 휘 순(純) 의 26세손이자 삼가공의 16 세손인 현 소유자 강릉박씨 대종회 치규 회장의 이름으 로 1985년 1월 17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2호로 지정 관리되고있다.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미 노리111번지 소재 박치규 가옥은 1910년경 치규 회장의 祖父 이신 세동(世東)께서 지었다고 전해진다.조선 후기 전통한옥 으로 낮은 야산을 배경을 앞으로는 넓은 전답과 해송 숲 그리 고 동해바다가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븮ㅁ븯자 평면을 갖춘 집이다. 본채 전면에는 헛간과 방앗간이 정면·우측면 담장과 연결 되어 가옥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안채 좌측 후면에는 사당 이 위치하고 있어 강릉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다.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겹집형태로 구성되었다. 사랑채는 정면의 3칸과 대청 후면으로 3칸이 연결되어 안채 쌍방 좌측 끝 부분과 이어지는 븮ㄴ븯자형 배치를 하고 있다. 사 랑채 우측으로는 앞대문 및 외양간, 광 등 복합용도의 부속채 가연접되어있다. 광채 후면의 담장 밖에 우물이 있으며, 광채 외부로는 정면 6칸,측면 1칸의 방앗간채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헛간채가 위 치한다. 또한 본채 남측 편의 후면으로 정면1칸, 측면 1칸의 사당이 있다. 사당 내부에는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거나 감실(龕室) 은 설치하지 않았으며, 이서위상(以西爲上)의 원칙에 따라 4 대조신주가모셔져있다. /박용백명예기자(강원강릉시지부) 뱚집성촌 탐방 강릉시사천면미노리(강릉박씨삼가 공파)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는 강릉시 중북부에 위치 하며강릉시도심과주문진읍중간에위치한면으로북 쪽은 연곡면, 서쪽으로 평창군 대관령면, 남쪽으로 성 산면, 저동, 죽헌동과 인접하고, 동쪽으로 동해바다와 접한다.미노리는본래강릉군사천면지역으로1916년 주막거리,망골,보막이,부동을합쳐미노리라하였다. 미노리(美老里)는 븮흙이 진 마을, 진흙이 있는 마을븯이 므로 니동(泥洞)이라고 한다.또한 삼가 박수량 선 생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노모를 모시고 살면서 곱게 늙었다고 하여 생긴 말이라고도 한다. 마을 한가 운데에는 삼가봉(三可峰)이 솟아 있고, 이곳에서 줄기 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미노리 앞으로는 사천천이 흐른다. 그리고 삼가봉은 삼가공이 용궁현감에서 물러 나노닐던곳이라는연유로지명을얻게되었다. 강릉시사천면미노리전경 뱚입향약사 경양사-강릉시저동(관설당박제상선생의위패를봉안하고있다.) 단천공박자검(朴自儉)의묘 세장동-방동리산192-2 (도로 모퉁이에 있는 웅장한 자연 석에새겨져있다.) 뱚삼가공(三可公)박수량(朴遂良) 삼가공묘소 뱚오사재(五思齋)와방동리무궁화 오사재(사천면방동리) 무궁화나무(천연기념물 제520호) 뱚쌍한정(雙閒亭)과효자정려 쌍한정(좌측 삼가공효자정려) 뱚박치규가옥(朴穉奎家屋) 박치규가옥 전경 사랑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