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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2월31일 목요일 7 (제168호) 종합 전남 담양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된 대성사는 1931 년(辛未)에 건립된 사우(祠宇)로 중국춘추시대말기의대 사 상가요 교육자며 유교의 개조(開祖)로서 성인(聖人)이라 일 컬어지는 공자(BC551~BC479)와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 로 성리학의 집대성자(集大成者)로서 주자학(朱子學)의 창 시자 주희(1130~1200), 고려말의 학자이자 충신 포은 정몽주 (1337~1392)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일제는 무력을 앞세워 1905년 을사늑약(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한일 신협약을 통해 군대를 해산하 는 등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준 비해 갔습니다.우리는 일본에 의해 주권을 빼앗기고 45년의 식민지 생활 속에 인고의 세월을 보낸 민족으로 공부자(孔夫 子) 또한 예의(禮意)를 숭상하는 나라가 인륜이 무너지고 윤 리가 사라지는 말세(末世)에 금수(禽獸) 같은 세상을 애통히 여겨 춘추(春秋, 오경의 하나)로서 대의를 붙잡았고, 남송의 몰락에 비분했던 주희와 고려조의 전복(顚覆)에 희생당한 포 은은 나라 잃은 원통함을 지녀 이들을 봉안하여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구국(救國)의 의지를 결행(決行)키 위해 건립되었 으니대성사는민족의염원을담은곳이기도한다. 대성사의 주요건물은 사우와 내삼문, 강당 이산재(尼山齋) 로배치되어있으며,제향진설은4변4두이다. -생략- 하늘에 서성이고 땅에 즈음하니 대도(大道)는 가히 형용하기 어려운데 바다처럼 깊고 산 같이 높은 덕(德)을 어 찌 능히 수로 헤아리오. 민(民)이 있음으로 부터 가장 성(盛) 하셨고, 군성(群星)을 모아서 크게 이루셨도다. 그러나 공부 (功夫)의 절차는 반드시 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 에 먼 저 하 되 도 리 ( 道 理 )의 본 원 (本 源 )은 효 (孝 )와 자 (慈 )와 제(悌)에지나지아니하도다. -생략- 창평에 이구산(尼邱山)은 중원(中原)에 궐리(闕 里)와 같아서 동북(東北)으로 영기(靈氣)가 모였으며, 성산 (聖山)을 우러러 보고 금구동(金龜洞)을 바라보니 서남(西 南)으로 다투어 아름답도다. 노은동(魯隱洞)이 돌아서 대성 리를 감쌌으며 사수(泗水)의 청기(淸氣)는 행정(杏亭)의 제 월(霽月)과비쳐돌아오도다. 천도(天道)가 호환(好還)함은 우연이 아니로되 동운(洞 雲)이 기리잠긴 지 오래이므로 명실(名實)이 맞지 아니하였 도다.지사(志士)들이 분발하여성암(聖庵,암자)을 일으키니 원방에 벗이 찾아와 문업을 힘썼도다. 서로 창사(創祠) 하기 를 원하였으니 내일을 기다리리요.궁(窮)하면 반드시 본(本) 에돌아오나니가히여정(輿情)에상징할지로다. 사문(斯文)의 원기(元氣)는 바다가 변하여 뽕밭이 되어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도(道)는 이 해로부터 바람에 구더 기가 생기고,구름에 굼벵이가 생길 때까지 다투리라 문공(文 公) 고정(考亭) 선생은 순강(順剛)을 온전히 갖춘 재주로써 안자(顔子), 맹자(孟子)의 아래는 짝이 없고, 박학약례(博學 約禮)의 두 가지 지극한 학업은 주무숙(周茂叔)과 주자(朱 子)에게도 벗이 있었고, 변소(辨蘇, 소진의 변론)와 척육(斥 陸, 육상선을 배척함)으로 만고(萬古)의 사추(士趨)를 크게 변하였고, 저서(著書)와 입언(立言)으로 천성(千聖)의 비건 (秘鍵)을통쾌히열었도다. 문충공 포은선생은 우리 이학(理學)에 밝았고 또한 강상 (綱常)을 부식(扶植)하여 현성(聖玄)의 진통(眞統)이 곧 자 양(紫陽,주자)을 인하여 크게 밝았고,청구(靑邱,동방)의 문 풍은 탄일(誕日)로부터 비로소 나타났도다. 이에 공(孔)·주 (朱)·정(鄭)으로써 철향( 緩享,釋祭)하였으니 진실로 북(北) ·동(東)·서(西)가 삼엄하였도다. 오직 물의(物議)를 빙자하 였으므로 서의 공평(公評)에 허물이 없도다.진퇴(進退)와 주 선(周旋)에 완연히 부해(海浮)의 성춘(聖春)함을 이었고, 훈 호(焄蒿)하고 처창(悽 헤)하니 재상(在上)하신 신령(神靈)이 이르시리다. 천정(天定)한 상개(爽塏)를 발굴하여 고릉(古陵)을 따랐 고 장공(匠工)은 기능을 발휘하여 호리(毫釐)를 틀림없이 대 하(大廈)를 지었도다. 때는 여름의 말이요 가을의 머리이니 봉력(鳳曆)의 협길(協吉)에 좋았고, 좌향은 임(壬)을 등지고 병(丙)으로 향하였도다. 용루(龍樓, 용귀산)의 통명(通明)을 바라보니 신물(神物)이 서수(舒愁)하고 강산(江山)이 증색 (增色)하도다. 분주(奔走)희 취사(就事)하여 뒤질까 부끄러 워하였으니 길주(吉州)의 학(學)이 능히 전미(專美)하지 아 니하고 의절(儀節)은 옛을 범하여 혹 어긋남이 없으니 창주 (滄州)의사(祀)를이제따랐도다.-이하생략- 신미(辛未,1931)6월 23일 영양이정순삼가찬술하다 대성사는 주민들을 위한 교육 사업은 물론 기로연(耆老宴) 을 통해 효 사상을 실천하고 미래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 등에꾸준한활동을벌여오고있다. 특히 정부는 물론 지자체 등의 지원 없이 뜻을 같이하는 지 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고향의 발전을 위해 봉사, 기 부활동을벌여오고있어귀감이되고있다. 보통의 서원이나 향교가 제(祭)를 모시며 명맥만 유지해 오 고 있으나 대성사는 어릴 적 마을친구인 문경규 전 담양군수 (현 대성학당 이사장)와 박현규 군산CC 회장이 개인 사재를 털어 재단법인 대성학당을 만들고 지역 유지들과 마을 사람 들이 마음을 보태 지역 교육사업 등을 추진해 오고 있다.특히 지난 2012년 선인들의 유지를 받들어 대성사 안에 만들어진 대성학당에서는 매달 14일 지역은 물론 전국유명 강사를 초 빙,인문학강의를진행해오고있다. 이어 지난 2015년부터 시작된 장학사업은 담양군 대전면과 수북면 중·고등학생, 지역 출신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교육 사업을 더욱 확대하고 있어 지역주민과 늘 함께하고 있 다. 대성사는 1930년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병준 원장이 초 대 원 장 으 로 취 임 하 여 1 9 5 7 년 2 대 오 학 수 원 장 1 9 7 0 년 제 3 대 이효순, 1981년 제4대 이재갑, 1989년 제5대 오월근, 1994 년제6대박한수,1996년 제7대 이돈정,1999년 제8대 이희신, 2000년 제9대 문재규, 2003년 제10대 임노덕 원장이 취임했 다. 초창기 원장은 길게는 27년 적게는 1년 동안 봉직하며 대성 사 발전을 이루었다. 이후 2005년 제11대 박광호 원장이 10여 년 헌신하였으며,이후 제11대 배병호 원장,그리고 지난해 현 12대고광선원장이대성사를이끌어가고있다. -1931년대성사창건 -1935년강당이산재건립 -1945년 대성사중건 -1961년대성사중수 -1971년대성사중수 -2004년 1월담양군향토문화유산제4호지정 -2004년 이산재 중건 -2012년 대성학당개설 -2015년 장학사업전개 뱚 유교사적지탐방 담양대성사 전남담양군대전면행성리630번지 대성사전경:전남담양군대전면행성리630, 공자를주벽으로 하고주희, 정몽주선생을동서벽에배향한 곳으로 일제강점기교 육 계몽을통한 항일운 동을벌여온 곳이다. 대성사는 일제강점기 교육 계몽을 통한 항일운 동을벌여온곳으로문병구,이재묵,이필순,이 진기,오학수등지역5현이건립한서원이다.그 러나서원이라는명칭대신대성학당을통해매 월 지역은 물론 전국유명 강사를 초빙, 인문학 강의를진행해오고있어서원의본래기능을충 실이 수행하고 있으며, 대성학당은 문경규 전 담양군수와 박현규 군산CC 회장이 개인 사재 를털어재단법인대성학당을만들고지역유지 들과마을사람들이마음을보태지역교육사업 과장학사업을펼치고있다.그리고지난4일대 성사 상량문을 노강 박래호 선생이 글씨를 쓰 고, 진죽 박판철 명인의 서각으로 새롭게 게액 (揭額)되어소개해본다. 뱚대성사건립과배경 대성사사우(祠宇) 상량문, 1931년영천인이정순선생이 찬술하였고 , 그의제자노강박래호님이 글씨를쓰고, 진죽박판철명인이 각(刻) 하여지난 4일대성학당강당에 걸었다. 뱚상량문으로보는대성사 지난 4일,상량문글씨를쓴노강박래호선생에게(左)이근식부원장이 감 사패를전달하고있다. 뱚대성사와지역사회에끼친영향 뱚대성사역대원장 뱚대성사연혁 밀양박씨 해백공파 중앙종친회는 지난 1 일 예정된 정기총회 를 서면결의로 대신 했다. 이번 서면결의는 지난 이사회의결에 따라 대의원들에게 회의자료를 등기로 송부하고 찬반 의결 을 등기로 반송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코로나19’ 상황에 최근 각급 종친회 및 사회단체에서 서면결의로 대 신하고있는방식이기도하다. 이번 결의 안건은 △1호의안 2020년도 세출 예산 항목간 전용안, △2호의안 2021년도 세 입세출예산안(112,996,000원), △3호의안 임 원개선안(임기 2021. 1. 1.~2023. 12. 31.)으로 대의원36명중33명이투표에참여했다. 투표결과 성율 32표를 얻어 연임되었고, 감 사에 영학(33표), 노열(33표) 2명 다 신임으 로대의원들의압도적인지지를받았다. 부회장과 이사는 회칙에 따라 신임 회장이 지명토록 되어있어 조만간 인선을 마무리하 고발표할계획이다. 성율 회장은 수 십 년간 종사에 몸담으면서 종중의 체계를 세우고 종재 축적에 상당한 기 여를 하는 등 종중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그러나 일부 종원들이 터무니없는 비방을 일 삼으며 분열을 야기하고 있는 시점에 대의원 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음으로써 뜻을 굽히 지 않길 바라는 종원들의 염원이 드러난 듯하 다. 이에 대해 성율 회장은 오직 선조를 위하고 종원들을 위한 종사운영 방식에는 변함이 없 을 것이라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전했 다. 해백공파중앙종친회는 밀양박씨 규정공 후 35개 소파에 속해 있으며,해백공의 휘는 소영 으로공효공(휘중손)의손자이다. 1465년(세조11)에 태어나 1483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85년(성종16) 별시에서 3등으로 급제하였다. 1501년 홍문관 응교, 1503년(연 산9) 사헌부 장령, 1504년 홍문관 직제학 겸 지제교 벼슬에 있을 때 연산의 생모 윤씨의 추 승하는 일에 반대하여 60대의 태형을 맞고 피 투성이가 된 채 함거에 실려 충청도 진천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1 509년 형조참의, 1513년 홍문관 부제학을 거 쳐 황해도 감사가 되었다가 호조참의가 되었 다. 1518년(중종13) 10월 영흥부사 재임시 임 지에서순직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두응촌 선영아래 부 인인정부인해주오씨와함께(함폄)모셨다. /박현배명예기자(서울특별시) 밀양박씨해백공파중앙종친회定總성료 ‘코로나19’서면결의븣성률회장연임 박성율 회장 영해박씨순일현종은 지난 2012년 양산문화 원이 주관한 할술대회 ‘양산과 박제상’의 학술 지를 영인하여 부제목 을 ‘혼 불 ( 魂 火 )’ 이 라 하 여 종원들에게 배포했 다. 이는당시학술대회에 시종조인 관설당 박제 상 선생의 위패가 봉안 되어 향화를 받들고 있는 효충사에서 횃불을 점 화하여 양산 시민체육관 성화대에 불을 붙이면 서운동장을환하게밝혔기때문이다. 효충사의 작은 춧불에서 시작되어 양산 삽량 문화축전의 성공적인 개최와 무사안녕을 염원 하는성화로옮겨지는모습에서충렬공(관설당) 할아버님의 혼불을 보았고, 당시 나동연 시장은 축사를 통해 충렬공 박선생은 양산의 태양이요 횃불이라강조하기도했기때문이다. 순일 현종은 책은 보내면서 코로나19의 재 확 산이 심각해진 상황에 종원들을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비대면으로 종원들에게 뿌리를 알려주고 후손된 도리를 실천할 수 있는 길을 모 색하다 책자를 배포하면 효과적이라 생각하여 영인본을보내게되었다며“우리영박내력과충 렬공 할아버님의 역사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 으니 잘 살펴보고 후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 바로 조상님들의 업적을 빛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보신 후 형제·자녀에게로 전하면 더욱좋을것이라고전했다. 학술지를 보면 ‘4세기 후반~5세기 초 신라의 선도(仙道)와 박제상(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 국학과 교수)’,‘삽라군 태수 박제상의 애 국활동(선석열, 부산대학교 사학과 전임강사 대 우)’, ‘<박제상 설화>와 전승 양상과 성격고찰 (고신대학교 교양학부 강사)’의 발표문과 별첨 으로 ‘신라 박제상의 출자(出自)와 출신지에 관 한 고찰(이성도 양산시 총무국장)’이 수록되었 다. 영해박씨의 시종조인 박제상 선생은양산출신 으로 ‘신라만고충신’으로 그의 정신은 신라초 마 랑(馬郞) 정신이고 곧 화랑도 기풍으로 발전하 였으니 그가 태어난 효충곡은 민족정기의 발상 지라고양산군지(梁山郡誌)는 기록하고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고구려에 볼모로 잡힌 왕 의 아우를 구하고 왜에 잡혀있는 신라왕자 미사 흔을 구출하고 자신은 포로로 잡혀 사망에 이르 게 된 기록을 정경희 교수는 발표문에서 인용하 고 있어 박제상 선생의 충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옮겨본다. [예의를 갖추고 고구려로 들어가서 왕에게 말 하기를 ‘국교(國交)는 실로 신의(信義)로써 할 따름이며 질자(質子)교환은 오패(五覇)에도 미 치지 못하는 말세 (末世)의 일입니 다. 지금 우리 임금 이 아우를 그리는 정의(情誼)를 보아 대왕께서 만약 흔 연히 귀환시켜 주 신다면 대왕의 손 해는 미미하지만 우리 임금은 대왕 의 덕을 크게 간직할 것입니다.’하니 허락하여 귀 환 할 수 있 었 다 븣 ( 다 시 마 사 흔 을 구 하 기 위 해 왜로 들어가면서) ‘왜인(倭人)은 그렇지 않 아 말로는 불가할 듯하니 꾀로서 속여 귀환시키 겠습니다.신이 떠나면 나라를 배반하고 간것처 럼 말을 퍼트려주십시오’하고 처자도 보지 않고 율포(栗浦,울주군 강동면 정자리 해변)에서 떠 나갔다븣. 왜왕(倭王)은 신라왕이 마사흔과 박 제상 처자를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 박제상이 반 역하고 온 것으로 여겼다.왜왕이 신라를 공격하 기 위 해 박 제 상 과 미 사 흔 을 장 군 으 로 삼 고 길 을 안내하게 하여 해중산도(海中山島, 히야마 섬) 에이르렀을 때박제상이미사흔과 배를 타고 놀 면서미사흔을몰래도망시킨후 더멀리달아나 게 하기 위해 자신은 그대로 그곳에 머물렀다. 사실을 안 왜인이 미사흔을 추적하였으나 운무 로 인해 실패하였다. 왜왕은 박제상을 목도(木 島 ) 로 귀 양 보 냈 다 가 화 형 시 킨 후 다 시 참 수 하 였다. 영해박씨순일현종학술지영인(影印 )배포 ‘코로나19’만나지못해비대면효과븣뿌리알리고후손된도리실천키위해 초당박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