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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2월31일 목요일 12 (제168호) 기획 박내정(朴乃貞)의자는직경(直卿)이고호(號)는월천(月川)또는초암(初庵)으로본관은함양(咸陽)이다.서울( 京)에서대부분거주하였다.1664 년(현종5)에태어나1735년(영조11)에돌아가시니수가72세이다. 공의삶은호(號)에서엿볼수있다.공(公)의시(詩)에『달(月)은사(私)가없으므로대지(大地)에임(臨)하고내 (川)는쉬지않기때문에능(能)히 긴강으로달린다.』는구절(句節)이있어사람들이월천(月川)이라고호(號)를했다한다.이는사심없는공평 하고정대함으로임지(任地)마다 선정을베풀고내직에서는강직한성품으로임금을보필한평일의삶이드러난것이다. 1694년(숙종20)에별시에서문과(文科)급제한이후출사한이후 41년의관직생활은효를근본으로하여평일 에깨우친근본사상과애민정신 으로일관하여곳곳에그의흔적을쉽게찾아볼수있다.이인좌의난을평정한공으로분무원종일등공신으로 한성부판윤을지내고기로소에 들어가기도한월천박내정선생은시문학에도탁월하여누정문학의효시로불리고있어소개해본다.선생은 1664년(현종52월)에 부친 박유궤(朴由 )와 어머니 청송심씨(沈之河의 녀) 사이에 1남 1녀로태어났다. 조선의 명신으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오르 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명헌공(明軒公) 박세옹 (朴世죕)이 고조(高祖)이고, 증조(曾祖)는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으로 승정원 증좌승지 인 박명립(朴名立)이며,조부는 생원으로 이조참 판에 증직된 박지행(朴知行)이요, 부친은 감역으 로 이조판서 증직된 박유궤이다. 외조는 심지하 (沈之河)이고, 처부는 봉사(奉事) 이행술(李行 述)이다.종고조소요당(逍遙堂)박세무(朴世茂) 는 세계최초의 아동 교재인 「동몽선습(童蒙先 習)」의저자로명문가후손이다. 선생은 용모가 단아하고 영민하였으며 예의범 절이 깍듯하여 주변사람들이 크게 될 인물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부친의 엄한 훈육은 공의 바 른 자세와 학습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공부에 매진하였다. 공(公)은 소 시에 천자문과 종고조부 박세무가 지은 동몽선습 을 익히고 몸으로 실천하였으며, 사서삼경(四書 三經)을 차례로 읽고 또 읽어 섭렵하였다.인간의 근본인 효는 인간의 덕목 중 으뜸이며 공(公)이 몸소 실천하니 집안은 물론 주변사람들이 모두 효자로 불리었다.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옳으니 이 는 부모의 가르침이 엄하고 실천하기를 항상 경 계하도록훈육하였기때문이다. 공의 부친은 자손을 교육하는데 엄하게 힘쓰셨 는데공이처음독서하기시작할때자녀사랑은항 상 도 탑고 한 결 같았 으나 교 육을 할 때 만큼 은 친하 게 한 적 없 이 수학 하게 하였 고, 아프 지 않 으면 잠 시 라도 게을리 하거나 나태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 계 하며 말하 시길 “사람 들이 자식 에 대한 온정 이 항 상 정의를 가려서 제대로 가르치고 이끌지 못하는 것이라친애(親愛)를피( 黴)한다는것이범인이애 정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이지만 지금에 너에게 사 사로운 사랑으로 처음부터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 면 반 드시 잘 못됨 이 굳어 져 되지 않 을 폐단 이 있으 리니실로애자(愛子)하는것이아니라”하였다. 또한공이항상말을정연하게하고글을짓고쓰 는 데 좀 더 유 의하 는 것을 보시 고 부친 은 문사 (文 辭)는 예 술이 라 다만 예(藝)에서 놀 고 본 래에 충 실 히 힘쓰지 않으면 앵무새 흉내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렵다 하시며, 말씀하시길 한창여(韓昌黎:중국의 문호)는문사를공부한사람으로오히려옛날의도 의를배우고더불어그말씀을통하려한다하였다. 또한 옛날사람들은 몸소 도를 행하고 여력으로 문 사를 하면 우연히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먼저 솜씨를 자랑하여 일세를 현혹하려고 유의(有 意)하는것이아니라하시며너는마땅히글솜씨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본실에힘쓰라강조하셨다. 모부인(어머니) 청송심씨는 공이 나이 어려서 글자를 배울 때에 감히 엄하게 신칙(申飭: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함)하시어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하시며 글 읽는 소리를 들으시면 문득 희 색(喜色)을 나타내시고 바로 훈계하시기를 “사 람이 교육이 없으면 금수(禽獸)나 다를 것이 무 엇이냐?’ 하시며 우리 집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너의 공부가 부지런하고 게으른데 달렸으니, 너 는 마땅히 힘쓰라 하였다. 또한 항상 경계하시며 “대체 사람은 정(定)한 분수가 있나니,나의 분수 를 넘어서 구(求)하기를 당연하다고 한다면 죄악 의 과보로 재앙을 부르지 않는 이가 없느니라”말 씀하며이를경계할것을말씀하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예를 갖춰 조석으로 부모의 안부를 여쭙고 살피는 예(禮)를 일관되게 하였으며 아침부터 침소(寢所)에 들 때까지 어버 이 곁에서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도리를 다하였 다. 부모를 봉양(奉養)함에 있어서는 맛있는 음 식을 접대하고 부모님이 맛보시기 전에는 먼저 입에 대지 않았으며 의복 관대 (衣服冠帶)를 늘 갖추고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다. 중앙관서에서 일하다 잠시 외직(外職)으로 지방에 제수(除授) 되면 임지(任地)에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관사 (官司)에 기거하며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산수 좋은 곳에 모시고 관람하며 그 지방에 맛있는 음 식을 대접해 드리는 예를 다하였다. 또한, 조상에 대한 봉선(奉先)도 근본으로 알고 마음가짐과 몸 가짐은 예를 갖춰 진행하라고 강조하신 부친의 당부를 실천하였고 제사, 묘제시 한 자손이라도 빠짐없이 참여토록 당위성을 거듭 이야기하며 정 성을다해제사를봉행하였다. 부친께서는 공에게 항상 말하시길 선조의 덕업 을 이어받아 지키는데 더욱 치성을 다하여 마지 막이 처음과 같이 한결 같아야 하고, 고조이상의 선대 조상의 묘소가 양주 신헐리(현 영모재)에 계신데 부친께서는 연대가 멀어지면 묘소 수호가 소홀할까 염려하시어 종인을 모아 놓고 논의하며 제사의식을 두고 사사절사(철이나 명절에 지내 는 제사)에 종인 중에 한사람을 지정하여 보내되 게으른자는엄벌하기로정하고시행하였다. 또한, 매번 명절과 좋은 때에는 술을 빚고 음식 을 장만 해 놓고 친척들을 불러 같은 자리에 모여 서 나이 순서대로 앉아 하룻밤동안 음악을 즐기 며 끝마치니 해마다 전례가 되었다. 공(公) 또한 이를 이어받아 종인들에게 사대부 집안으로써 가 문의 전통과 선대의 가훈을 강조하며 항상 똑같 이명절차례와혼례등대사(大事)를치렀다. 부친께서는 친족을 만나면 촌수가 멀거나 가까 우나 또는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차별 없이 돈 목 (敦睦;돈독히 친절하게) 하였고 조금이라도 불가함이 있으면 의로써 알아듣도록 타일러 잘못 을 뉘우치고 고치게 하였다. 또 전해오는 말을 하 시면서 우리 선대에서 본래 예법으로 집안을 거 느리시어 당대 사대부의 모범이 되었는데 조상들 의 문헌과 전해 오는 이야기 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 중에서 내가 들은 바대로 말하면 우리 종증조 공 (無患堂 朴大立)의 성품이 준엄하시고 법도가 있으셔서 제사를 봉하기를 상당히 엄하셨다. 한 번은 명절 차례에 사재공(四宰公 朴素立)이 진설 할 무렵에야 도착 하니 무환당공이 들어오라는 말씀을 안 하시어 사재공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 고 문밖에 서서 기다리는데 차례를 마치시고 늦 게 온 죄를 질책하시며 시자에게 명하여 매를 해 오라 하시니 사재공이 댓님을 풀고 매 맞을 자세 를 취하니 무환당공이 비로소 노기를 풀으셨다 한다. 두 분의 나이 차이는 1년차이고 다 같이 작 위가 正卿(정이품 이상 판서)이신데도 매를 치시 려는 형님이나, 그를 감수하시려는 아우님이나 다 장하다 하시며, 친족들에게 너희들은 마땅히 옷과띠에적어두고경계하라말씀하셨다. 부친은 홀로 계시는 고모님을 평소에 어머니 섬기듯 하시더니 공이 남쪽지역에 벼슬을 할 때 에 병자년 흉년을 만나서 공이 봉급을 나누어 맛 있는 음식을 마련하면 부친은 말리시며 나에게 주지 말고 우리 누님에게 드리라고 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께서 작고하시자 부친이 심히 비통하시니 옆에 사람이 그만 고종하시라 말하여 도 조금도 늦추지 않으셨다. 공에게 명하기를 자 주 시수(제사에 쓰는 제철음식)을 갖추어서 제사 를 돕게 하라고 하셨으며, 외로운 조카를 어루만 지면서 어느 날 우리 백씨가 돌아가시고 다만 네 어린 것이 하나가 남아 있으니 내가 보살피지 않 으면 누구를 믿고 살아가겠는가 하셨다. 조카 사 랑하시기를 공보다 더하시니 비록 각자의 집에서 살아도 특별한 음식이 있으면 정성스럽게 그릇에 담아 손수 보자기에 싸서 보내시고 세월이 지나 도록조금도변치않으시니라. 선조에대한탁월한봉선으로숙종32년(1706년1 2월) 咸陽朴氏 시조(始祖) 상서공(尙書公) 諱 善 묘비(墓碑)를 병조참판(兵曹參判) 겸(兼) 동지의 금부사(同知義禁府事) 경후(慶後, 구당공 后 6世) 가 찬(撰)과 함께 전면(全面)을 글 쓰고 후면(後 面)글씨는공(公)이사헌부(司憲府) 지평 (持平) 시절에 썼다. 경후(慶後)는 구당공(九堂公) 6세 손이고,乃貞은명헌공(明軒公)현손이다. 공은 현종(顯宗)五年에 태어나 1684년 (肅宗1 0)에 식년시 진사(進士)하고, 1694년 (숙종20)에 별시병과 9위로 문과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로 출사하니 함께 급제한 26명은 모두 신인관료들로 조정을 차지하게 된다. 공의 동방(同榜)중에는 후일 정승 자리에 오른 경주 이씨, 이광좌(李光 佐, 영의정), 용인 이씨 이의현(李宜顯, 영의정) 을 비롯하여 권이진(權以鎭, 호조판서), 권상유 (權尙游이조판서), 윤지인(尹趾仁 병조판서)등 이 있고, 당대 명 필인 해평윤씨 윤순(尹淳, 예조판서) 등과 친하 게 지내며 글과 문을 상합하여 지냈는데,백하(白 下) 윤순(尹淳)은 公의 만사(挽詞)에서 벼슬살 이에 청백(淸白)하여 『돈 많이 벌 수 있는 자리를 많이 지냈으되 돌아오면 집에 있는 것이 벽(壁) 뿐이로다』라고했다. 사헌부(司憲府)정언(正言)을 시작으로 지평 (持平)을 두 번, 삼척부사(三陟府使), 세자시강 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사헌부 장령 (司憲府 掌令), 양양부사(襄陽府使), 집의(執義)를 지내 고 동래부사 (東萊府使)로 나갔다가 경종(景宗) 4년 좌승지(左承旨)로 들어와 영조(英祖)4년 형 조참의 (刑曹 參議), 영조(英祖)6년 병조참판(兵 曹參判),8년 형조참판 (刑曹參判),9년 한성좌윤 (漢城左尹),10년 다시 병조참판 (兵曹參判)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특진(特進)되었다. 그때 공이 정석(政席)에 입시(入侍)했는데 상감 이 등과한 해를 묻자 공이 “갑술년(甲戌年) 중전 (中殿) 복위(復位) 경과(慶科)에 입격(入格)했습 니다.” 대답하니 상감이 특명(特命)하여 지중추부 사(知中樞府事)에 제수한 것으로 실록(實錄)에 실 려 있 다. 영조 (英祖)10년 10월 한성 판윤 (漢城判 尹)에올랐고,70수에기로소(耆老所)에들었다. 중 앙 여 러 요 직 을 두 루 거 치 면 서 일 을 함 에 있 어서는 정과 사를 분명히 하여 신망이 두터웠고 승진하면 외직으로 잠시 나갔다 다시 중앙으로 제수되는 것이 공의 관료생활의 특징이다. 외직 에 나가서는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고 서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니 나가는 곳마다 송덕비, 선정 비, 불망비가 세워졌다. 처음으로 1694년에 외직 으로 제원찰방(충남 금산면 제원리)으로 나갔을 때 공덕을 세워 서민들이 세운 선정비가 지금까 지 전 해 오 고 있 다 관원들 중 모범이 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하고 맺음이 탁월하여 사헌부(司憲府) 감찰 (監察)로 제수되니 이곳은 명망(名望)있는 사람들이 천거 되었고 지위를 보장받으며 승진 등 여러 특전을 누리는기회를얻게된다. 숙종 25년에는 봉보관 전적(捧寶官 典籍: 정6 품)에서 병조정랑(兵曹正郞;정5품)까지 승진을 거듭하며 자리를 옮기니 특히 사헌부 지평으로 제수되었을 때 공(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임 금에게 아뢰니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 시 키기를 청하고, 말이 과중하기는 했지만 일을 논 함에 있어서는 체면을 유지했다고 말을 하다. 또 한,사간원정언으로발탁되어왕에게논리 적으로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니’ 이세석의 상 소에 대하여“사의(私意)에 가리워 처치(處置)가 정당한 데에 어긋났으니, 어떻게 굽혀 따를 수 있 겠는가?”라며논하다. 숙종31년 지평으로 승진되었을 때 한동안 등용 되지 못한 사유를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고(告) 하니 “박내정은 바로 광해군 혼조(昏朝)때 흉악 한 상소를 올렸던 사람 박지행 (朴知行)의 손자 (孫子)로서, 이전부터 세루(世累:선대의 하자)가 비로소 탄로되어 내침을 당하고 등용되지 못하였 는데, 지금에 이르러 시의(時議)에 의거하여 다 시 청로(淸路)에 통하였다’ 여기에서 혼조(昏朝, 광해군)때 조부 박지행(朴知行)의 상소 건은 조정 에서 공(公)에게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공격을 하 는 사건이었으며 특히 윤세유, 이홍일 등이 앞장서 서 임 금에 게 여러 차 례 체직 을 시켜 야 한다 고 상소 하였으나, 공(公)은 굳힘 없이 논리적으로 상황 설 명을 하면서 설득하고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부친 (박유궤)도함께부당함을임금에게고(告)하였다. 이 논쟁은 6년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는데 조정 대 신이 모인 자리에서 윤세유는 박내정에게 한없는 욕을당하였다.사람들이이때문에모두놀라고우 스워하였으니,이것이 이른바 자기(윤세유)에게서 나온 것은 자기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라고 하 였다.이논쟁이얼마큼조정에서지루하게극에달 했는지를 지평 김일경(金一鏡)이 서로 배척하는 두 사람을 파직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청하는 장면 에서살펴볼수있다. “박내정(朴乃貞)과 윤세유(尹世綏)가 서로 욕 설로 꾸짖으며, 그 선대(先代)를 들어서 말하는 까닭으로 저쪽에서 오면 이쪽에서 가는 식의 패 악한 말이 서로 오고 가, 박내정의 뒤집어서 헐뜯 어 말한 것이 이미 지극히 불미(不美)한데, 윤세 유가 곧 욕설을 더하여 사사로운 분심(憤心)을 풀며 말에 명백하게 솔직함이 모자라매, 피차 간 에 입으로 짓는 악업(惡業)이 마치 거리와 골목 에서 머리채를 휘어잡고 말하듯 하였으니, 청컨 대 모두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하였으나,윤 허하지않았다. 공(公)은 사간원 정원부터 한성판윤까지 여러 차례 실시되는 각종 시험(사마시, 별시등)에 감독 관 으로 특 임되 어 철저 한 감독 과 엄 격히 법 을 적용 하여유능한관리를임용하는역할을하였다. 또한, 나이 들어 동래부사 외직으로 출사(出 仕)하였을 때 부친을 모시고 함께 현지에 도착해 보니 여러 해 가뭄으로 백성들이 곤궁함을 보게 되었다. 부친께서는 공에게 네가 한 고을을 맡았 으 니 한 치 의 소 홀 함 이 없 이 구 호 하 라 하 셨 다 . 이 에 전력을 다해 구휼하였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 이 부친의 마음과 공의 마음이 같으니 그 아버지 에 그 아들이라 하며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또한, 동래부사 재임시 풍랑 등으로 인해 표류를 위장 해 조선으로 들어오는 일본인이나 일본으로 건너 가는 조선 사람들에 대한 시폐를 근절할 것을 조 정에소(疏)를올렸다. 공은 뛰어난 문학으로 많은 시문을 남겼다. 누 정은 풍광이 뛰어난 곳이나 주변의 풍경들을 두 루 조망할 수 있는 지대가 높은 곳, 즉 산이나 언 덕 등에 세워지며명승(名勝)조망,주거(住居),추 모(追慕), 감시(監視), 수비(守備), 강학(講學), 군 사 훈 련 등의 다 양한 공간 으로 활 용되 었는 데 이중 에서 많은 시인묵객들이 자리하여 시를 짓고 돌에 새기기도 하는데 이를 누정문학이라 한다. 우리 주 변에는 누각(樓閣)이나 정자(亭子)에 관련되어 노 래한 문학(文學)작품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근처 바 위 에 글을 새 기는 것 은 공 이 처음 으로 누 정문 학의 효 시라 고 할 만 큼 많 은 곳 에 이 름(名)과 시 (詩)를 새기었고 특히, 통도사 청류동천에는 박내정 바위 가있고,읍승정(동래부북쪽100보쯤에있던정자) 은公이지은오언율시의한시가새겨져있어소개 하며마무리하고자한다. 淵明五株柳(연명오주류) 도연명은 버드나무 다섯그루를심었는데 如我八松不(여아팔송부) 내 경우에는 여덟 소 나무가아니겠는가? 密葉能排署(밀엽능배서) 빽빽한 잎은 능히 더 위를물리치고 寒枝巧耐秋(한지교내추) 차가운 가지는 가을 을잘도버티누나 露淸應驚鶴(로청응경학) 이슬 차가우니 학을 놀래킬만하고 雲逗欲盤蛇(운두욕반사) 구름 머무르니 뱀이 도사린듯하구나 大厦終堪棟(대하종감동) 큰 집엔 용마루가 필 요하듯이 他年匠石收(타년장석수) 다른 해에 장석(匠 石)이거두어들이리라 한성판윤박내정(朴乃貞)븣 지극한 효를 근본으로 충직(忠直)과 지모(志操)의 삼조(三朝)명신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생애 동래부사시절부사의업적을기리기위해부산범어사청룡암에새겨진이름이뚜렷하다.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일명퇴조 비(退潮碑, 삼척), 1 709년 2월에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 곶도(竹串島, 지금 육향산) 등록嶝麓)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가 1969년 12월 6일, 259년 만에현재의위치인육향산산정山頂에이전준공하였다. ‘효 를 근 본으 로 하는 엄 격한 훈 육으 로 위 선정신함양’ 기로연명단. 출사와정치활동 남원무안왕비,전라북도남원시왕정동에있는조선시대에 지은 관우(關羽, ?~219)의 조각상을 모신 사당(관왕묘) 앞 에 ‘명조도독유정건묘사적비(明朝都督劉綎建廟事蹟碑)’가 세워졌고, 현감 박내정이 중건을 기념하여 세운 ‘무안왕비 (武安王碑)’가있다. 제원찰방박내정선정비,(금산재원면제원리산14) 통도사청류동천박내정바위,1723년겨울동래부사박내정을비롯 한영산현감이사윤,밀양부사이희주등인근고을수령 들의이름이새겨졌으며,이들가운데중심인물인동래부사박내정의이름을따박내정(朴乃貞)바위로이름한다.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