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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10월31일 토요일 8 (제166호) 기 획 進士公 門中은 통덕랑 휘 지( ), 첨지중추부사 휘 世東, 청요직(淸要職)에 오른 휘 璲의 長子 휘 道心家系의 명칭이 며, 1740년 進士에 오르고 과거를 준비중 31세의 나이로 조졸 한 박도신(朴道身, 1714~1744) 기일세(起一世)로 하는 우리 나라 대표적인 사대부가이다. 양주지역 밀성(밀양)박씨 문중 을 명문가로 이끈 조선 중기 박율(1520∼1569), 박이서(1561 ∼1621), 박노(1584∼1656), 박수현(1605∼1674)의 계보를 잇고있다. 밀성대군 후 忠憲公派 大提學 諱 允文의 후손으로 박 율 (栗)의 字는 관중(寬仲) 호는 돈계(遯溪), 1558년(가정37븡명 종13) 식년시에 올라랐다.문장을 잘하는 것으로 세상에 아려 져 간행된 책문(策文)은 과장(科場)의 법식(法式)이 되어 중 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의 책문 8수를 뽑으면서 공의 작품 을 3편이나 넣고 또 2편을 진영수어(震英粹語븡조선시대 유학 자들의 대표적인 논(論)과 책(策) 등의 문장을 모아 엮은 과 문집)에 넣었다.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 춘추관 사, 홍문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오위도총부 세자좌빈객 을 증직하였으며, 통훈대부 사헌부장령 겸춘추관 편수관 지 제교를역임했다. 그의 아들 충간공 박이서 선생은 1558년(선조21) 알성시에 급제하여 이조참의 부수찬, 이조참판 겸비변사제조, 훈련도 감제조 등을 역임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7년여에 걸 친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고 폭군으로 묘사되어 온 광해군시대에 살면서 때로는 본인에게 화가 미칠 것이 자 명함에도 상소문을 올려 이를 바로잡으려 했고, 부정한 관리 의 등용을 반대하고 또는 청렴하지 못한 상관의 부임에 과감 하게 관직을 버리면서까지 본인의 의사를 표출했다. 스스로 호를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뜻으로 비천(泌川)이라 함은 시경(詩經)진풍(陣風)에 나오는 시로조촐한집에서편히 쉬 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으로 선생의 검소한 삶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손자 대호공 박노의 자(字)는 노직(魯直 ) 호(號)는 대호 (大瓠)이다. 1584년(선조 17년) 6월 27일 비천공(泌川公) 박 이서(朴彛 )와 광주이씨(廣州李氏)와의 사이에 장남으로 서울남쪽청파동에서태어났다. 1609년(광해1년)10월 19일 문과 병선(文科丙選)에 2등으 로 합격 후 이듬해인 1610년 8월 18일에 예문관 검열(藝文官 檢閱:정9품)의 직책으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홍문관 정자, 시 강원사서, 병조 좌랑과 정랑,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홍문 관 수찬 겸 세자시강원 사서를 지내고 이어 이조 정랑이 되려 던 때에 이이첨(李爾瞻)의 무리들이 선생의 부자를 시기하여 산지(散地븡인기없는 자리)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 다. 1618년(광해10)에는 성균관 사예에 올랐으며 종사관으로 수군을 감독하고 다스렸다. 1619년에는 안동부사를, 돌아와 서는 아버지 비천공을 위해 마포강가에 수명정(水明亭)을 지 으니날마다모시고술과시를즐기시도록하였다. 1620년(광해12)에 태창황제(명나라 광종)가 승하하니 아 버지 비천공께서 진위사로 나가게 되어 연로하신 나이에 나 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걱정하여 병을 빙자하여 사양토록 권 유하였으나 비천공은 “병에 얽매여 편안함만 취하는 것은 신 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듣지 않고 출발하였는데 이 이듬해 청나라 군사가 요동을 함락하니 길이 막혀 되돌아 올 수 없었다. 이때 의정부 검상으로 있었는데 특별히 정리부사 를 제수하여 항해를 감독하게 하였다. 진위사로 떠난 아버지 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해상에서 파선이 되어 돌아오지 못함을 알고 해상에서 초혼(招魂)하여 돌아와 3년 곡읍(哭 泣)하여미음만들었고종신토록물고기는먹지않았다. 1624년가을에전적으로기용되었고,이어장연부사로제수 되어 선정으로 관리와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우고 기렸다. 이 밖에도 병조참판 세자좌빈객을 지낸 박노 의 신도비는 염헌 임상원이짓고족손규동이전자(篆字)를썼다. 草亭公諱 수현(守玄)은 시와 문장에 능하였던 그는 소암 임 숙영(1576~162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조선 중기에 소북 파팔문장의한사람으로불리었다. 1660년 형조 좌랑에 재직 중 겨울에 증광회시(增廣會試)에 장원을 하여 예조 겸 춘추로 옮겼다가 문안(文案) 쫓김을 당 해나아가거산 찰방(居山察訪)이되었으나오래되지 않아16 64년(현종 5년)에 평안도사(平安都事), 1671(현종 12년)에 직강으로있다가사예로올랐다. 예조정랑과 성균관사예를 지냈으며, 숨겨진 명필로 유명한 후손 기종 공이 묘비를 썼다. 이처럼 명관으로 이어지는 가문 으로 화성입향조는 초정공의 장자 휘 지( )이다. 현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는 옛 수원부 서천(鋤川)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의 최초 입향은 草亭公(諱 守玄)의 長子 통덕 랑 諱 지( )이다. 通德郞公의 字는 상경(尙卿) 1623년(인조 원년)에 태어나 1699 년(숙종25)에 졸하였 다. 1641년(인조19븡19 세) 辛巳(신사) 春省 發解試 [춘성발해시: 禮曹에서 보는 初試 (초시)를 말함]를 합 격하였으나 아버지와 조부의 탄핵(彈劾)등 을 지켜보면서 공명 을 멀리하고 과거를 보지 않았다. 인조 26 년 戊子年(무자년븡16 48년) 26세에 水原(수원) 鋤川(서천) 땅 현 화성시 양감면으 로 移住(이주) 하시어 현재 進士公派(진사공파) 後孫(후손) 들이근거지로삼고있다. 수원 서천으로의 입향은 당시 중부(仲父븡휘 수초)가 평택 으로 이주하여 거주하고 있었고, 세상일에 일정 마음을 쓰지 않고 꽃나무를 심고 물고기와 새를 벗 삼아 때때로 술잔을 들 고 詩(시)를 읊으며 한가롭게 지내기 위해 찾은 것은 아닌지 짐작해본다. 그리고 입향지 양감면 정문리 우뚝 솟은 고목이 이를 방증 하고있기도한다. 통덕랑공(휘 지)의 장자 휘 세동(世東)의 字는 형백(亨百), 호(號)는 晩悔(만회)이다. 1657년(효종 8년븡丁酉)일에 출생 하시어 첨지 부사직(僉知 副司直)을 지내고, 1731년(영조 7, 辛亥)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품계승전(品階承傳) 하시고, 1735년(영조 11븡乙卯) 5월 5일 예산관아(禮山館衙)에서향수79세의일기로卒하시었다. 통덕랑공의 손자 鋤窩公(서와공)휘 수(璲,1680~1751)는 1 708년 무자식년시(戊子式年試) 합격 성균지사이고, 1728(英 祖4년) 무신별시(戊申別試)에 文科及第하여 假注書, 승원부 정자, 찬수겸춘추, 숙묘보감 찬수청낭청, 전적, 예조좌랑, 예 조좌랑,례산현감,병조정랑,통정승전,시강원필선(사도세자 로부터 충신 글자를 받음), 평안도사겸춘추관기주관, 군자감 정, 사헌부장령, 봉상시정, 순천도호부사를 지냈으나 순천고 을의 폐단(弊端)이 많아서 매양 상사(上司)에 청했지만 그때 마다 뜻을 펼 수가 없어서 을축년(乙丑, 1745년) 벼슬을 버리 고 돌아왔다.이때부터 여러 차례언관(言官)에제배되었으나 사양하고나가지않았다. 말년에는 효순우공근인정묵(孝順友恭勤忍靜默)이란 여덟 글자를써서좌우에붙여놓고경계했다. 부인 숙부인(淑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와의 사이에 四 男(도심븡도항븡도성븡도신), 三女를 두면서 크게 번성하였으며 첫째인 道心은 과거공부하다 젊은 나이에 卒하였고 넷째인 諱 도신(道身)이 1740년(영조16븡庚申)에 사마진사(司馬進 士)이다. 進士公(휘 도신)의 아들 휘 장섭(長燮븡1735~1780)의 호는 서은(鋤隱)이다. 1762년(英祖 38) 식년시(式年試)에 오르고, 1770년(英祖46)에 정시 문병과(文丙科)에 及第, 관직은 兵曹 佐郞(병조좌랑), 楊口縣監(양구현감)을 지내셨다. 配 全州李 氏(전주이씨)이시며 슬하에 이남 이녀를 두셨으며 二男 효민 (孝敏)이 사마소과(司馬小科)하였고, 그의 손자 승위(承偉) 1873년(高宗10)진사로 소과에 급제(及第)하는 등 그 명맥을 이어 갔고,현세에 이르러서도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보이는 성손들이많아지역토반으로서자리를굳건히하고있다. 진사공파종중은 통정대부 순천부사 行 춘추관기주관 세자 시강원필선 서와공 諱 수(璲)의 장자 휘 도심(道心) 계(系) 宗中에서 재산관리 및 시제묘 관리, 종중공원묘원 관리운영 을 책임지고 년3회 예초, 년1회 이끼제거, 년1회 제초제거 작 업등으로시제묘관리를하고있다. 특히집행부임원진들이몸을아끼지않은희생과봉사정신 은 종원들의 무한한 신뢰로 이어져 체계적인 운영의 밑바탕 이되고있어눈여겨볼만하다. 집행부 임원진으로는 △회장 박상철, △감사 박명원. 박상 철,△부회장박형원,△대의원박세원.박우준,△총무박상국 으로 매년 1회 정기총회, 1회 정기감사, 3~4회 임원회의를 열 어종사전반을결정하여운영을하고있다. 선조에대한자료와문헌을지속적으로찾아후손에게전하 고 계승토록 선도하고 재산의 증식과 보전에 만전을 다하여 향후 장학재단을 만들어 훌륭한 후손양성을 목표로 삼아 노 력하고 있다.또 시제묘,종중묘원에 후손들이 혐오감 없이 찾 아올 수 있도록 주변환경을 깨끗하고 사계절 꽃이 만발하고 소나무 숲을 만들어 찾아오는 이들에게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도록 묘원의 개념에서 쉼터 공간으로 만들 계획으로 주변 조경을공원화하는것이목표라고전한다. 뱚선진(先進)종회를 찾아서븣 밀성(밀양)박씨충헌공후진사공 종중 제1묘역:양감면정문리221-1 입 향조 휘 지 공(公)이 하 현손 ‘장(長) ’ 항 렬까 지의 9 位 내외분 의 묘 역으로 三地 域에 분 산되어 있던 각 묘 역을 2002 년4월청명에한 곳으로 모아조성하였다.시제묘역의제원은1,330평이다. 제2묘역:양감 면신흥길35-24 진사공파종중후손들의묘원으로 매장묘와납골묘,자연장으로 사용하도록2006년11월에조성하였고제원은1,3 60평이다. 가을햇살이 눈부신 지난 13일 경기도 여주지역 취재차다녀온길에경기도화성시양감면의지 인을 만나 차 한 잔 하기위해 찾은 묘역은 눈을 의심케 한다. 1천여평이 넘는 넒은 묘원에 잡초하나 없이 마 치골프장잔디를연상케하는묘원과묘원입구 관리사에 빼곡이 들어찬 700여권의 장서(藏書) 는 말문을 막는다. 각 성씨마다 종중을 운영관 리함에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돈이 있으 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걱정이다. 설상 가상송사가이어진다면더없이어려워진다. 마침가승보교열작업을하고있는박형원(朴亨 遠),박상국(朴商國)현종에게 종중의연원과 운 영등에 대해 소상히 물어보는데 부끄럽다며 한 사코손사래를친다.어렵사리취재에응하면서 제1묘역을 안내받아 찾아간 묘역 역시 1천여평 이 넘는 넓은 묘원이 발목을 잡기에 소개해 본 다. 뱚종중의연원 제2묘원(가족묘원)전경 뱚화성입향 입향의역사를안내하듯350여년된느티나 무가 입 향조 묘 역 앞 에 자리한 다. 뱚종중의운영과집행부 제2묘원아래관리사에비치된700여권의장서와선조의신도비탁본(右), 친필등을비치종원들의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있다. 사진은박형원부회 장(앞)과 박상국총무가안내하고잠시포즈를취하고있다. 뱚종중의향후추진계획 주요 공사 실적현황 고 고객 객의 의새 새로 로운 운가 가치 치와 와미 미래 래 를 를건 건설 설하 하는 는성 성진 진종 종합 합건 건설 설 고객 중심, 가치창조, 미래선도 라는 경영이념을 한 마음 한 뜻 으로 실천하고 있는 저희 봑성진종합건설 임직원 일 동은 고객 여러분으로부터 더욱 깊은 신뢰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최 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봑성진종합건설 대표이 사 박남희 영천본사:경상북도영천시북안면운북로1631 TEL:054)337-2687 대구지사:대구광역시북구구리로199,2층 TEL:053)322-2687 율하동해도프라자신축공사 세진빌딩근린생활시설신축공사 이노빌딩근린생활시설신축공사 세민타워근린생활시설신축공사 영우빌딩근린생활시설신축공사 부산시연제구거제동1469-13근생시설신축공사 긴급신고공동관리센터신축공사 용암면사곡리공장증축공사 농업회사법인㈜제이팜스제3공장신축공사 경북신문사옥신축공사 동호동장례식장신축공사 신양리다세대.다가구주택신축공사(2개동/총16세대) 안동영명학교예능교육관증축건축공사및내진보강공사 ㈜한국단자부품근린생활시설신축공사 행복나눔파인토피아봉화조성사업 금호공업고등학교장애인편의시설승강기증축건축공사 청도군여행자센터건립공사(건축,기계) 고덕동다세대주택및근생시설신축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