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20년10월31일 토요일 12 (제166호) 기획 송암박두성선생의이름앞에는‘시각장애인의세종대왕’이란수식어가붙는다.한글점자는앞을못보는것 도서러운시각장애인들에게눈을찾아준 것이나다름없다.시각장애인아이가부모님이애물단지로생각한다며성가시다는아이의편지,‘앞못보는 것도서러운데조선인이일본점자를배워 야한다.’는것은민족정신마저빼앗긴것이아닌가?하는생각에밤잠을못이루는송암,일제강점기한글점 자를창안하여반포한다는것은또하나의 독립운동으로주목받아야할것이다.지난9일은한글날이다.세종대왕이훈민정음을반포하는것을기념하 는것으로,오는11월4일은점자의날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지 480년 후인 1926년 11월 4일 송암 선생이 점자 연구에 착수 한지 장장 6년 7월 만에 완성을 보게되어 발표한 역사적인 날이 다.이에본보에서는훈맹정음을창제한송암박두성선생을소개해보고자한다. 1888년 송암박두성출생 1906년 한성사범븡송학교졸업어의동보통학교훈도 1913년 제생원맹아부교사로취임한국최초점자교과서(일본어점자)를출판 1923년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조직,훈맹정음연구착수 1926년 훈맹정음완성,통신교육실시 1931년 성경점자원판제작착수 1936년 인천영화학교교장취임 1 941 년 한글 점자로 된 신약성서 발간 1947년 점자회람지븮촉불븯발간 1955년 성경점자원판재제작(이전원판은6.25전쟁중소실) 1962년 국민포상수상 1963년 76세의나이로운명 1992년 은관문화훈장 2002년 4월의문화인물선정(문화관광부) 2015년 훈맹정음-한국최초,인천최고100선선정 선생의 본관은 무안(務安) 휘는 두성(斗星, 譜 名 斗鉉)으로 송암(松庵)은 아호이다. 고려조 간 의대부로 경기도 지평파 문중의 문호를 연 송림 공 휘 정 (禎 )의 1 9 世 이 다 . 아 버 지 휘 기 만 ( 基 萬 ) 公과 어머니 김해김씨와의 사이에 고종 25년(戊 子,1888)3월 16일(양4.26)인천광역시 강화군 교 동면상용리에서9남매중맏이로태어났다. 송암 선생 가문이 경기도 지평에서 인천 강화 군 교동 입향은 7대조 휘 만영(萬英)때이다.어려 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8세가 되던 1895년 무관출신으로 한말 애국계몽운동과 의병 운동을 이끌었던 성재 이동휘 선생이 강화도에 세운 보 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 신교육을 받았다.졸 업 후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1905 년 졸업과 함께 어의동보통학교 훈도(薰陶)로 취 임, 교직자로서 첫발을 내딛는다.1911년 보창학 교의 설립자 성재(誠齊) 이동휘(李東揮) 선생이 한일합방 조약이 발표된 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가족 과 함 께 중 국 북 간 도 로 망 명 하 면 서 함 께 할 것 을 권유받았으나 선생은 “대결은 행동이지만, 도전 은 실력 배양에 있습니다. 저는 남아서 후배 양성 에 힘쓰겠습니다.”라며 소신을 밝히자 성재 선생 은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말라’는 의 미의 ‘송암(松庵)’이라는 아호를 지어주며 남이 하지 않는 사업에 평생을 바치라는 당부했다. 이 에 이 를 새 기 며 실 천 할 것 을 결 심 하 게 된 다 . 이후 일제가 조선인 유화정책의 하나로 설립한 조선 총독부 제생원내 맹아부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송암이 교사로 발령을 받게 된다. 당시 제 생원 내 맹아부에는 부장을 위시하여 4명의 일본 인 교사와 조선인 교사는 송암 선생이 유일하다. 이렇게 송암은 남이 하지 않은 맹아교육의 첫 발 을 들여놓게 되어 암흑뿐인 시각장애인 교육의 애로점을파악하는데주력하게된다. 조선총독부에서 1921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8 ,699명의시각장애인이있었으니제생원내맹아부 신설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유화가 있었지만 조선 의 시 각장 애인 으로 서는 획 기적 인 일이 라 할 수 있 다.당시 청각교육, 주입식 교육에 한정된 맹교육의 현 실을 깨 달은 송 암은 교 육의 기 본 자료 인 점자 교 과서의필요성을주장하여1913년8월14일,일본에 서점자인쇄기를들여와 비록 일어이기는 하나 한 국최초로점자교과서를출판한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난 후 일제의 탄압은 날로 심해져 조선어 과목을 없애려 하자 송암은 “눈이 없다고 사람을 통째로 버릴 수 있겠어요? 앞 못 보는 사람에게 모국어를 안 가르치면 이중 의 불구가 되어 생활을 못 하는 것이외다.눈 밝은 사람들은 자기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읽고 쓸 수 있지만 실명한 이들에게 조선말까지 빼앗는다면 눈 먼데다 벙어리까지 되란 말인가요?”라며 절실 히 항의하자 기세등등하던 일본인들은 자라목처 럼 쏙 들어가 버렸다.송암의 교육관은 애맹정신 의 실천 속에 면학을 장려했다. 당시에는 ‘왜놈들 이 장님은 무용지물이라고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더라.’는 풍문에 부모들이 자녀들을 제생원에 보 내길 꺼려한 것이다. 당시에는 비장애인들도 굶 는 것이 다반사이기에 학교보다는 지게를 지워 보냈으니 시각장애인을 공부시키려 보내는 부모 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그러나 송암은 시각장 애인의 거주지를 파악 적극 찾아다니며 면학을 권유했으며, 또한 제자들의 자립을 위해 안마술, 침구술, 마사지 등의 직업교육에도 심혈을 기울 였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 관리들을 설득하기 위해부단한노력을아끼지않았다. 당시 일본인들의 생각은 ‘본토에서도 시각장애 인들은 자립이 어려운데 여기서야 그저 일본어나 해득시켜서 문물이나 귀띔해 주면 그만이지 직원 도 적은데 무슨 직업교육 시간 증설이냐’라는 인 식이다. 이에 대해 송암은 ‘언어는 수단이지 목적 이 아니다. 가령 시각장애인 한 사람이 하루 양곡 3홉씩을 먹는다면 1년에 한 섬,그러나 9,000여 명 을 먹여 살리려면 9천 섬을 소비해야 합니다. 이 들에게 적절한 교육으로 직업을 부여하여 재활케 한다면 그만큼 경제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같은 실정의 시각장애 교육에서 직업교육의 위치는 모든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송암은 제생원에 부임 한 지 7년이 지났으나 한글점자가 없음을 안타 까워하던 중 1920년, 본격적으로 한글점자 연구 에 몰두, 제자인 이종덕, 전태환 등 8명을 규합 하여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비밀리에 조직 하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끊임없는 연구 결과 1926년 11월 4일 세상에 발표, 전국 시각장애인 들에게 취지문을 발송했다. 송암은 한글점자의 연구와 완성뿐만 아니라 이를 전국에 산재해 있 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숨어 사는 시각장애인을 위해서는 통신교육을 실시, 가르 치고 읽을거리를 보내주며, 비록 눈은 못 봐도 배우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자고 외쳤다. 또한 송암은 “너희들이 눈은 비록 어두우나 마음마저 우울해서는 안 된다. 몸은 비록 모자라도 명랑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안 배우면 마음조차 암흑이 될 테니 배워야 하느니라”라며 명랑한 마음으로 적극적인 삶을 살도록 유도하였 다.또한 송암은 산술과목에도 정열을 기울여 “너 희들은 눈을 못 보니 약기라도 해야만 살 수 있다. 그러니 주판쯤은 놓을 수 있어야 내 주머니의 것 이라도 간직하고 살지...” 라며 시각장애인들에게 주판을 가르치는 데 열심이었다.이렇듯 생활교 육도 잊지 않고 각종 서적의 점역에도 심혈을 기울여 성경전서, 이광수 전집, 명심보감, 천자 문, 불쌍한 동무, 이솝우화, 뉴스 등 시각장애인 들이 살아갈 힘이 생기기를 바라며 읽을거리를 점역해 주느라 수고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점 자책 쌓지 말고 꽂아...”라고 맹인교육만을 강조 하면서 송암은 말년 지병에 시달리던 1963년 8 월25일76세를일기로숨을거두었다. 17세기경 프랑스의 모로오(Pierre Moreau)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활자를 납으로 만들 었다. 시각장애인들이 촉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납의 무게로 인한 제작의 어려움과 비용이 많이 드는 이유로 보편화되지 못했다. 이와 유사한 방식이 독일의 케에니스 베 르히의 쇤베르거(Schnberger)에 의해 채택되기 도 했는데 그는 납 대신 주석을 사용했다.이들 선 각 자들의 노력은 프랑스에서 점자가 완성되어 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784년 아우이(Valentin Hauity)는 파리에 맹학교를 설립하고 돌출문자 인쇄를 시작했으며, 1808년에 이르러 마침내 프 랑스의 육군장교 바르비에(Barbier)가 처음으로 점자를 고안하게 되었다. 바르비에는 야간전투에 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손으로 만져서 읽을 수 있는 점으로 된 문자를 생각해냈다. 그러 나 오늘날과 같은 점자 형태는 1829년 파리맹학 교에 재학 중이던 루이 브라이유(Louis Braille) 에 이르러 첫 윤곽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바르 비에가 고안한 군대용 야간문자는 세로 6줄에 가 로 2줄씩 총 12점으로 구성되어 있어 손끝으로 한 꺼번에 읽기에는 불편한 점이 있었다. 브라이유 는 이 점 을 보 완 하 여 세 로 3 줄 에 가 로 2 줄 씩 총 6 점으로 이루어진 점자를 개발했다. 비슷한 시기 영국, 독일, 미국 등지에서도 여러 점문자 타입이 연구되었으며, 보편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방안 들이다각적으로모색되었다. 뷺세 상 에 눈 으 로 보 고 하 는 일 이 많 지 마 는 눈 으 로 보아야 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도리어 손 으로 만져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틀림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그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 던그의마음은한글점자창안으로드러났다. 제생원에서 시각장애인들을 만나 교육하기 시 작한 1913년부터 ‘일본 점자는 있어도 우리말을 기록할 수 있는 한글점자는 없으니, 저 가엾은 시 각장애인들을 어쩐단 말이오.’ 하면서 더욱 시름 에 빠진 송암은 일본어 점자,천자문 점역 등을 연 구하고, 1920년 본격적으로 한글점자 연구에 몰 입했다. 점자 창안에 앞서 근본적으로 한글의 원 리부터 알 필요가 있어 한글의 창제 과정을 연구 하게 되면서 한글의 초성(자음) 14자를 3점 점자 로옮기는데성공했다. 그리고 1922년 다시 중성(모음)의 연구에 착 수,모음은 자수로나 발음,또는 형태의 모방상 비 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한글의 중성 10자를 2점 식 점자로 바꾸는 데 성공하니 이것이 초기의 소 위 3.2점식 점자이다.송암은 점자 연구를 위해 몸 소 시각장애인의 암흑세계를 위해 밤이면 불을 끄고 눈을 가려 손끝으로 더듬어서 시험해 보기 1 0 여일, 그리고 확신이 서자 제자들을 불러 시험 을통해증명해내기시작했다. 그러나 초기의 3.2점자는 초성과 중성만으로 구성되어 받침, 즉 종성도 초성과 같은 점자기호 를 갖 다 붙 이 고 나 면 중 성 과 종 성 이 혼 동 되 어 잘 못읽기쉽다는문제점이있었다. 점자는 한글을 가로로 풀어쓰는 거나 마찬가지 이다. (예:학교→ ㅎ, ㅏ, ㄱ ,ㄱ, ㅛ) 이런 경우 정 안인이라면 앞 뒤 문맥을 통해 쉽게 짐작을 하지 만 시각장애인은 눈을 감고 촉각만으로써는 혼동 되기 일쑤다. 즉 받침 ㄱ 그리고 초성 ㄱ 이 구별 되지 않어서 시각장애인들은 잘못 읽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에 송암은 다시 새로운 국면에 부딪 혀 또다시 한글의 원리와 세종대왕 한글 창제 당 시의 과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세종 대왕이 성삼문 등 8명으로 언문청을 두었다는데 깊은 관심을 표명 이를 본떠 1923년 4월 제자들을 규합하여 조선어 점자연구회를 비밀리에 조직, 미완성된 점자 연구에 착수한 지 3년 4개월 만인 1926년 오랜 노력 끝에 한글점자를 창안하고 11 월 4일 ‘훈맹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하였다. 송암은 점자를 개발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시각장 애인들에게 실제로 보급하기 위해 통신교육과 강 습회등다양한방법을활용하였다. “점자는 어려운 것이 아니니 배우고 알기는 5 분이면 족하고,읽기는 반나절에 지나지 않으며 4 ~5일만 연습하면 능숙하게 쓰고, 유창하게 읽을 수 있 소 어 서 바 삐 점 자 를 배 워 야 원 하 는 대 로 글 을 읽 게 되 는 것 이 오 ” 라 며 점 자 교 육 및 보 급 에 열정을다바쳤다. 점자 창안의 기초를 한글의 원리에서 찾은 박 두성은 한글의 창제 과정을 먼저 연구하였다. 점 자는 한글을 가로로 풀어쓰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예 : 한글 → ㅎ, ㅏ, ㄴ, ㄱ, ㅡ, ㄹ). 이런 경우 정 안인이라면 앞뒤 문맥을 통해 쉽게 짐작하지만, 시각장애인은 눈을 감고 있으므로 촉각만으로는 혼 동 하 기 쉽 다 . 즉 , 학 교 ㅎ, ㅏ , ㄱ , ㄱ, ㅛ라 고 할 때 ㄱ,ㄱ이 연속되기 때문에 잘못 읽기 쉬운 것이 다. 박두성은 한글점자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부 딪히는 이와 같은 어려움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던 과정을 이해하면서 극복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세종대왕이 성삼문 등 8명으로 언문청 을 두었다는 데 깊은 관심을 두고 이를 본떠 1923 년 4 월 , 송 암 이 손 수 키 운 당 시 재 경 제 생 원 졸 업 생 유도윤, 이종덕(뒤에 서울맹학교 교장), 노학 우, 전태환(뒤에 한국맹인복지협회장), 이종화 (뒤에 서울맹학교 교사), 황이채, 김영규, 김황봉 등 8명을 규합하여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비밀 리에 조직하였다. 점자의 기점이 적으면 식별하기 쉽다는 점에 착안하여 초성(자음)과 종성(받침)에 주 로 2점을 배 당시 키고 중 성은 전부 3점으 로 했 다. 여 기서 제 한된 배 점으 로 한 점이 라도 더 아 끼기 위 해 점 자 체 계에 큰 지 장이 없 는 초 성의 'ㆁ'자 는 빼 기로했다.사실초성은'ㆁ'자로풀어쓸때빼도무 방하다.다음으로문장중에서사용빈도가가장많 은 토 (가 , 을, 은 , 의, 에 등 )와 글자 구 성이 복 잡한 ' 예','와','워'등의글자를모아약자를만들었다.그 런데 초성 'ㆁ'을 뺄 경우, '아이'를 점역할 때 뒷글 자 '이'에서 'ㆁ'을 빼면 'ㅐ'로 잘못 읽을 우려가 있 어 '애' 또한 독립된 약자로 표기하고, 마지막으로 문음부호,숫자를만들었다.이렇게지속된3년4개 월 여의 창안 노력 끝에 , 마 침내 1926년 8월 한 글점 자의완성을보게되었다. ‘눈이 사람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눈이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두뇌가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이니 맹인들 을 방안에 가두지 말고 가르쳐야 합니다.’송암 선 생이 제생원시절 시각장애인들을 가르쳐야 한다 며부모님들에게강조한말이다. 우리나라는 전국에 약 25만여 시각장애인이 있 다.송암 선생의 점자는 이들의 눈과 귀가 되고 있 어 훈 맹 정 음 창 제 는 그 중 요 함 을 더 하 고 있 어 국 가적 차원에서 선생의 현창사업을 주도하길 소망 해본다. 송암점자도서관은 지난 10월 15일 ‘흰 지팡이 의 날’을 맞아 송암박두성기념관 소장 유물 8건 4 8점을 등록문화재 등록 예고되었다고 16일 밝혔 다.이번에 등록 예고되는 ‘한글점자 훈맹정음 제 작 및 보급 유물’은 한글점자, 일지, 맹사일지, 점 자원판-우어, 제판기, 점자인쇄기-로울러, 점자 타자기, 촉불 등 8건 48점으로, 당시의 사회·문화 상황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근대 시각장애 인사 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문화재 등록 가 치가 높다.송암박두성기념관 관계자는 “ 이번 문 화재 등록 예고를 통해 일반인에게 조금은 생소 한 송암 박두성 선생과 한글 점자에 대해 널리 알 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 기쁘며,이번 등록 예 정된 유물과 더불어 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 물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보존에 앞장서는 기 념관이되도록노력하겠다”고말했다. 한글의 우수성은 이미 알려진바 오래다. 이제 한글점자의 우수성을 알리고 선생의 숭고한 정신 이 길이길이 이어지고 계승발전 되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및자료제공송암기념관 /글븡정리=박상섭편집국장 훈맹정음창제송암박두성 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박두성선생의생애 송암박두성선생 남동구수산동에위치한송암선생의묘소에서탄신기념행사광경(사진제공송암박두성기념관). 송암박두성선생연보 점자의유래 점자의 창안과보급 한글점자의우수성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