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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9월30일 수요일 12 (제165호) 기획 박세옹 선생의 자는 경운(景雲)이며,본관은 함양(咸陽)이다.호는 명헌(明軒)또는 진목정(眞木亭:서교동근처 정자)이다.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에 오르는동안24년의관직생활은애민(愛民)사상으로위민봉사한시간이었다.감찰어사로나가폐단을바로 잡고,임금의곁에서는직간을서슴치않는 등청사에길이빛날명신으로21세기를살아가는우리들에게나아갈바를풀어주고있어공의서거480주기를 맞아공의생애를조명해본다. 맺음말 명헌공 박세옹은 돈녕부정 구당공 세영(世榮), 동몽선습을 편찬한 군자감정 소요당공 세무(世 茂)의아우이다. 병조판서를 지낸 습(習)은 공의 고조이고, 문 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지낸 의손(義孫)은 증 조 이다 . 사 복시 정 증 이조 참판 을 지 낸 신 동(信 童)은 조부이고, 승정원좌승지 증 이조판서 중검 (仲儉)은 아버지이다.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 는 옹 주소 생으 로 담양 부사 양 성헌 이관 식(李寬植) 의 따님 이며 공 정대 왕(恭靖大王: 조선 2대 정 종대 왕)의 외손녀이다.이판공 중검(仲儉)이 왕실과 결 혼하면서중흥의초석을마련하게되었다. 공은 홍치 계축년(1493, 성종 24) 8월 8일에 태 어나니4남매(3남1녀)중삼남으로태어났다. 조선 전기 명헌공의 고조인 박습(朴習)은 태종 이방원의 과거 동기이자 동갑으로서 태종의 측근 이었다.박습은 태종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 면서 중요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승승장구하였 다. 하지만 태종이 세종(1418년 8월8일)에게 양위 한 직 후 병조 판서 에 임명 되었 던 박습 은 얼마 안 되 어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강 상인 옥사에 연루되어 11월 24일 고문에 못이겨 죄 를 자 백하 게 되니 , 죄목 은 모반 대역 (謀叛大逆)이 고 11월 26일 참 수 예 정이 었으 나 고 문을 너무 받아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로써 가문은 풍비박산 되는 참 화를 겪게 되 었다 . 조 선시 대 대역 부도 는 삼족 을 멸족시키는무시무시한죄목이었다. 박습의 아들 중 나이16세 이상은 모두 교형(絞 刑)을 받아야 했다. 또한 15세 이하의 아들 및 처 첩(妻妾), 조손(祖孫), 형제(兄弟), 자매(姉妹) 는공신(功臣)의집에사노(私奴)로가야했다. 당시 박습에게는 아들 5명과 출가한 딸 1명 등 총 6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첫째 아들과 둘 째아들은이미세상을떠난상황이었다. 박습의 아들은 의건(義乾), 의곤(義坤), 의보 (義甫), 의경(義卿), 의손(義孫)이었고 이들 중 생존한 세아들 義甫,義卿,義孫은 모두 16세 이상 으로 모두 교형(絞刑)을 받아야 했으나, 태종의 선처로 노비(奴婢)로 감형되었다. 박의손은 남해 로, 박의보는 광양으로 귀양 갔고 박의경은 그사 이사망했을것으로사료된다. 의손의 아들 신동(信童)은 당시 10세로 어머니 안동권씨와 공신의 집에 노비가 되어야 하나 안 동권씨(권근의 손녀딸) 친정이 왕실관계에 있어 선처된것으로보인다. 안동권씨는 살아갈 방법이 없어 족두리를 만들 어 파는 것으로 생계를 이었고 이렇게 어려운 환 경에서도 10살 된 신동(信童)을 기르고 각고로 노력하여 가르쳤다. 이에 힘입어 부지런히 배워 학업이 일취월장하였고, 명예는 일찍이 드러났 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지 않고 들어앉아서 조용 히 살며, 덕을 숨겨 드러내지 않았고 명문가 서산 유씨와 혼인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 질도다. 그 어머니에 마땅히 그 아들이로다.’ 하 며. 혀를 차고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남편 어사공(御使公) 박의손(朴義孫) 이 참화를 입은 후에도 능히 경화(京華: 서울)에 서 보 존 하 며 잠 영 (簪 纓 : 높 은 지 위 )을 이 을 수 있 었으니, 이는 모두 權부인의 의덕(懿德)과 현행 (賢行)으로하여시작된것이라아니할수없다. 하지만 박신동이 성장했을 때에도 박습의 대역부 도는 신원되지 않았고,세조4년(1458)4월16일 “박습 의 자손은 모두 벼슬길을 허통하게 하라” 명령을 내 리면서 비로소 40년만에 신원이 회복 되었는데 신동 의나이50세로벼슬길에나가기는불가능하였다. 박 습 의 가 문 이 재 기 하 기 위 해 서 는 가 문 자 체 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였고 대역부도라는 죄목 자체가 정치적인 문제가 계기였기에 그것을 극복 하기위해서도정치적인계기가필요했다. 1458년 이런 조치가 이루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 실 록 등에 서 명확 하게 설 명하 고 있지 않아 자 세한 내용을알수는없다.다만추정해보건데박의손의 부 인이 안동 권씨 권제 (權 퇀)의 딸이었다는 점이 주요한배경이되지않았을까하는점이다.권람(權 擥)은 박의손의 처가인 안동 권씨로, 아버지가 권 제 이므 로, 박의 손의 부 인과 는 결국 남 매 사이 가 되 며,박의손과처남매부사이가된다. 권람은 세조의 즉위에 제일 앞장서서 도와 성 취하게한 대표적 인물로 정난공신 1등과 좌익공 신 1등에 책록되었고. 그의 정치적 위상으로 본 다면 충분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박습의 후손들이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한 조치는 당대 정치 실력자인 권람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추정된다. 강상인 옥사에 연루되어 거의 멸족되었던 박습 가문은 신원이 회복되면서 명문가문과 혼인할수 있는 길이 열였고, 박습의 3대 후손인 이판공 중 검이 정종의 부마 이관식의 사위가 되므로써 왕 실의 친인척으로 재기의 발판을 만들었다, 중검 은 1489년(성종20년) 42세의 나이로 생원에 합격 하였고, 1498년(연산군 4년) 51세에 세상을 떠났 다.부인전의이씨와의사이에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世榮, 世茂, 世 죕 이었고,딸은송세정(宋世精)에게출가하였다. 중 검 이 5 1 살 에 세 상 을 떠 났 을 때 부 인 전 의 이 씨는52살, 世榮은 19살, 世茂는 12살, 世 죕은 6 살 이었다.그의 3명의 아들중 朴世榮은 진사에 합격 하고, 朴世茂, 朴世 죕은 과거 문과에 합격함으로 써 함양박씨 가문은 다시 명문가문으로 발돋음하 게되니중종대의사림으로크게활약하였다. 이 결과 박세영은 九堂公派의 중흥시조가 되었고, 박세무는 逍遙堂公派의 중흥시조가 되었으며 마지 막으로박세옹은明軒公派의중흥시조가되었다. 선생의 유년시절은 선비들을 박대하던 연산군 의 혼조에서 보냈지만 학문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람됨은 자질이 질박하고 솔직하여 의 관 꾸미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부지런히 학업을 쌓고검소하게스스로를관리하였다. 재질이 뛰어난 아버지와 옹주소생으로 시부모 를 지성으로 섬기고, 부군 받들기를 정성으로 하 여 부덕(婦德)의 모범이신 어머니(전의이씨) 사 이에서훈육을받고성장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명석한 두뇌로 사서삼경은 물 론 사학, 천문지리 등 다방면의 학습을 습득하여 깊은 학문과 스스로 절제된 넓은 도량은 가족들 은 물 론 주변 사람 들이 크게 될 인물 이라 고 칭송 이 자자하였다.공이 6세에 아버지 이판공이 돌아가시 니(1498년) 큰형 구당공은 19세요, 작은형 소요당 공은 12세이다. 어머니 전의이씨는 3남1녀를 거느 리고 이판공 묘하 마을에 거주하면서 자녀교육에 전력을 다하였으니, 4남매가 혹 허물이 있거나 학 업을 게 을리 하 면 이판 공 묘정 에 끌고 가 서 동자 석 에 손을 매 어 초달 을 가하 시며 “너 희 아버 님이 돌 아 가실 때 너희들을 잘 가르쳐 가문(家門)을 일으키 라 부탁 하시 어 내 그때 죽 지 않 고 지 금까 지 살아 있 어 너희들의 장래(將來)를 바라고 가르쳐 오거늘 이제 너희들이 학문을 힘쓰지 않는다면 아버님의 고명(顧命: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함)은 어찌되며 나의희망은무엇이랴”하시며눈물을지으시니아 들들이감동하여학업에정진하였다. 아버지 역할을 한 큰형(구당공)은 매사에 신중 하고 효도가 극진하여 어머니가 장남 구당공에게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함) 하면서 두 아우를 가르치게 하였다. “내가 죽지 않고 있는 것은 너희 삼형제가 있는 까닭이니 네가 어린 아 우들을 잘 교도(敎導)하여 쓸사람이 되게 하라 “하시니 각별히 유의(留意) 하더니 아우가 혹 게 으로 태(態)가 보이면 꾸짖거나 때리지 않고 스 스로 아버님 묘정에 나가 자신의 종아리를 치며 “아버님의 영혼이 하늘에서 밝히 내려다보시고 어머님의 명령(命令)이 귀에 쟁쟁한데 아우가 공 부를 아니함은 兄의 허물이다” 하시니 아우들이 감격하여감히게으르지못하였다. 결국 명헌공은 소요당과 함께 형인 구당공에게 학문을 수학하였고, 특별한 사승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명헌공과 구당공의 나이는 13살 차이로아버지같은형이었으며,형의학문적,정치 적 사상이 자연스럽게 전입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형인 구당공은 “나면서부터 지덕이 뛰어났으며 학 문에뜻을둘나이에스스로독서할줄알았다”라고 신도비에 쓰여 있듯이 아우들을 충분히 학습할수 있는자질이있었다.또한,청강(淸江)이제신(李濟 臣)은구당공의묘갈명을찬술하면서,“동국(東國) 에 현 벌(賢閥)이 많 으나 효 우(孝友)로 이 름난 것 은 박씨에앞서는자가없다”며함양박씨의효우를높 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3형제는 장남 구 당공을 중심으로 형제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고 어 머니에게는 지극 정성으로 효도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구당공이 아버지의 역할하면서 훈육과가례를몸소실천하였다. 공은 삼형제중 제일 먼저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명석한 두뇌를 가진 것은 물론이요, 이는 형들의 가르침과 어머니의 절제된 행동이 그 결과를 낳 았다고 본다.공이 정치기반을 닦아 이후 대립(大 立),소립(素立),명립(名立) 등 경팔립(京八立) 을형성하는계기가되었다. 공의 위민정신을 잘 나타내 보이는 일면을 볼 수 있는데,.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효 순공주의 집을 지을 때 효령대군(孝寧大君) 옛 집의 목재와 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중종 은 사용할 수 있는 목재와 돌은 사용하라고 윤허 하였다. 공은 암행어사로 활동하였는데 상의 측근으로써 특명을 받아 지방군현의 잘잘못과 백성의 사정을 비밀리에 살피기 위해 파견되었고 그 역할을 충실 히 하였다. 공은 중종28년에 재상적간어사(災傷摘 奸御史)로 강 원도 에 파견 되었 는데 재 상적 간어 사 는 홍수 , 가뭄 , 우 박 등 재 해에 따 른 백 성들 의 실상 을파악하고그대책을강구하는일이다. 또한 전라도 승인추쇄경차관(僧人推刷敬差官) 으 로 있을 때 중 이 많은 것은 수령 들이 법 을 시 행하 지않음을간파하고부역,병역을피해중이된자3,5 00여명을처결하였고,그후승도의 작란이있을 것 을 우려하여 계절을 두어 도별로 여지승람에 없는 절은 헐어 버려 승도를 다스리도록 강연을 하였는 데 대 표적 인 사건 이 전라 북도 군 산시 소재 수 심사 (修心寺)가 폐사된 사건인데 이는 조선의 정치적 기반인 양반관료와 고려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불 교 와의 대 립에 서 비롯 한 정치 적 사건 으로 현재 불 교계에서는이것을법란이라고한다. 선생은 처음 벼슬하여 졸(卒)할 때까지의 햇수 가 23년이었는데, 이 중 중앙조정에 보임된 것이 19년이고 산관(散官: 해당업무가 없는 관직)에 있거나 상을 당하여 벼슬을 떠났거나 병 때문에 사직하고 향거 한 기간이 4년이다.주로 조정에서 나라를 위해 충성하며 임금의 측근에서 충실한 직언과 보필로 관료 생활을 하였으며, 애민정신 으로위민하여청사에길이빛날것이다. △1519년(중종14) 27세에 사마시(司馬試) 생 원과진사(進士)를장원으로합격하다. △1526년(중종20) 식년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 여 승문원 부정자( (承文院 副正字:종9품)에 등 용되고 사학(史學)에 밝아 재능을 인정받아 사관 (史官:역사의 초고를 작성하건 관리)의 제목으로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정9품, 사초를 기록하는 일)로 옮겨 봉교(奉敎 정7품)를 거쳐 성균관전적(典籍:정6품)으로승진되다. △1530년(중종25 3월22일) 사간원정언 (司諫 院正言:정6품)이되다 △1531년(중종262월5일)홍문관부수찬(弘文 館副修撰, 종6품)이 되고 다시, 사간원(司諫院) 정언이되다. △1531년(중종262월21일)부수찬박세옹이김 안로체직을청하며직언하다. “근자 대간(臺諫)을 비롯하여 조론(朝論)이 김 안로를 빙자하여 사림을 모해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데, 국가 명맥이 사림에 있어 사림이 한 번 망하면 국가는 따라 망합니다. 시비 호악을 상 감 자신부터 굳게 정한 연후에야 조정이 흔들리 지않습니다.”라고하였다. △1531년(중종26 2월21일) 다시 사간원(司諫 院 ) 정 언 에 제 수 되 다 . △1531년(중종266월18일)홍문관 부수찬에제 수 되 다 . △1531년(중종267월11일)사간원 정언에 제수 되다. △1531년(중종26 11월 7일) 홍문관 수찬(정6 품)에제수되다. △1533년(중종28 .9월2일) 송인수·박세웅을 충 청 강 원 도 에 파 견 하 다 재상적간어사(災傷摘奸御史:암행어사)로 송인 수(宋麟壽)와 박세옹을 충청도와 강원도에 파견 하였다. △1536년(중종31) 복을 마치고 세자시강원(世 子侍講院)문학(文學)에제수 되었다. △1536년(중종31. 2월25일) 사헌부 지평에 제 수 하 다 . △1536년(중종31. 3월 3일) 사헌부지평에 임명 하다. △1536년(중종31. 12월 26일) 사헌부지평( 司 憲府持平:正五品)에제수하다. △1537년(중종32. 1월 17일) 작서의 변에 연루 된사람들을내치도록박세옹등이건의하다. ※ 작서(灼鼠)의변(變) : 1527 중종 22년 2월 25 일, 곧 세자 의 탄 일에 누 군가 가 쥐의 사지 와 꼬리 를 자르고 주둥이·귀·눈을 불로지져서 동궁(東宮)의 북쪽 뜰에 있 는 나무 에 걸어 놓 은 일이 있 었다 . 이 것 은 세자 를 저주 한 것인 데, 이 를 작서 의 변 이 라한 다. △1537년(중종32. 2월21일) 사헌부 장령 (掌 令:正四品)에제수하다. △1539년(중종34.4월29일)한성좌윤 박세옹을 등을보내조서반포한데대하여사례하다. 공조판서 윤세호(尹世豪)와 좌윤(左尹) 박세 옹(朴世 죕)을 보내 황태자책봉 조서와 황천상제 의 태호(泰號)에 관한 조서를 반포한데 대하여 사례하였다. △1537년(중종32. 5월 4일)사헌부 장령 (掌令: 正四品)에임명하다. △1537년(중종32. 9월 12일) 사헌부 사간 (掌 令:正四品)에제수하다 △1538년(중종33. 7월 27일)홍문간 전한(弘文 館典翰:從三品)에 제수하다 △1538년(중종33. 8월 26일) 직제학으로 승진 하다. △1539년(중종34) 당상관(堂上官) 품계에 오 르면서예조참의(禮曹參議:正三品)가되다. △1540년(중종35년) 병조참의에 제수되었고 이어이조참의가되었다 △1541년(중종36)년 정월 23일 졸하니 수가 49 세이다. 박세 옹의 사회 적 연 망으 로 주 목되 는 것 이 동 방 (同榜)이다.동방의유대는동년(同年)이라고하는 단지 같은 시기 과거에 급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다.특히,유교를숭상하는조선사회의특성상동방 은 “형제의 의(義)를 맺고 천륜에 비기려 한다”는 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것이며, 이들과의 친 밀도는일반적인교류와는상당한차이가있다. 박세옹과 함께 1526년(중종20) 식년시에 급제한 동방은 모두 24명이며,갑계를 만들어 끈끈한 관계 를 유지하며 정치활동에 연망으로 작용하였을 것 으로사료되나밖으로드러내보이지는않았다. 갑계(甲契)를 만들 당시 의정부 우의정에 있던 상진이나 의정부 우참찬에 있던 김명윤, 의정부 좌찬성에 있던 민제인 등이 확인된다. 김굉필의 문인인 박소와 함께 송순, 성수침 등도 주목된다. 송순은 송흠(宋欽)을 잇는 계열로, 16세기 전반 호남 사림 내 주요 학맥을 형성하며 이후 김인후 (金麟厚)와 기대승(奇大升) 등을 배출한 바 있 다. 성수침은 중종과 명종 연간에 일사(逸士)로 추천되기도 한 인물이다. 대개는 사림 세력에 동 조하는인물들이라고판단된다. 계회도는 가까운 문인들끼리 모여 친목을 다지 고 풍류를 즐기기 위해 계회(契會)를 베풀고 이를 기념하기위해제작된것으로,이작품은정확한계 회 의 이름 은 알 수 없지 만 조선 초기 에 유행 했던 계 축(契軸)형식을 따르고 있다.전체 화면은 4부분으 로 나 뉘어 져 있는 데, 화면 상 단에 는 계회 도의 제 목 이 전서체(篆書體)로 쓰여 있고, 이어서 계회장면 이 간 략하 게 묘사 되어 있 다. 삼 각형 모 양의 먼 산 아 래 경 치 좋은 계 곡에 서 한가 로이 담 소를 나 누고 탁 족(濯足)도 즐기는 계회의 모습은 안견파(安堅波) 화풍으로 그려졌는데, 넓은 공간감이 강조된 구도 와 단선점준(短線點 )의 구사, 흑백대조가 뚜 렸한 산의 묘사에서 이미 안견파 화풍이 이 시기의 고전적화풍으로자리잡았음을알수있다.계회장 면의 아래쪽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여백으로 남아 있어,조선초기 계회도의 화면은 주로 3분되는 것에 비해 다소 이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화면 하단의 좌목(座目)에는이날계회에참석했던황사우(1486 ∼1536), 김섬(?∼?), 강현(1486∼1553), 상진(1493 ∼1564), 채무역(?∼1537), 박세옹(1493∼1541), 허 항(?∼1537)등 7인의 이름과 관직이 상세히 적혀 있다. 영상을 지낸 공의 재종처남인 인재 홍섬은 공 의 묘갈명에 하늘을 원망하여 “ 이미 그 덕을 풍 부히 내려주고도 어찌 그 수령에는 인색했는가?’ 하여 보다 수를 누려 영달하지 못함을 애석히 여 겼고, 동각(東閣) 이정성(李廷聲)은 찬을 지어” 집에서는 효우하고 나라에선 충직했네, 물욕이 어찌 밖에서 유혹하리?성이 안으로 확고한 바에. 서봉 (瑞鳳)이 거동을 하고 산용이 빛나도다. 하 늘이 아직 다스리고 싶지 않았던가? 중도에서 순 명을했으니”라고했으며, 모제 김안국은 공의 만사에서” 통가하는 옛 친 구로 군을 가장 잘 아는데, 풍절이 금세에 유독히 출중했네. 명해에 용 되어서 창파를 가를 것이며, 천구(天衢)에깃떨쳐서구름을헤치리라. 경륜를 청조에 펴지 못했고, 황천에 야로 있는 줄 누가 알았으리. 정자 뜰에 난옥(蘭玉)(子孫) 있어 무성하니, 청전(靑氈)(가보:家寶)을 뒤에 남겨많은꽃다움을앉게했네”라고했다. 취계당 정지승의 진목정을 제한 시를 보면 “성 곽(城郭)과 강두(江頭)가 지세(地勢)가 부동(不 同)한데, 하늘이 이곳을 만드는데 또한 공교(工 巧)히 했다 하리로다. 서교(西郊)에 특별히 어진 사람을 위한 땅을 장만했으니, 늦바람 따라 돌아 가는배를누워서보겠구나”했는데, 진목정 (眞木亭)은 공이 평소에 거처하던 정자 (亭子)로 (정자 이름을 호(號)로 했다) 서교(西 郊) 하고 성곽(城郭), 강두(江頭)라 한것으로 미 루어 짐작하건데 지금의 아현동 조망 좋은 위치 에정자를가지고있었던가? 공이 송현 상진(공조판서), 지족암 윤변(군자 감정),야산 박소(문강공), 청송 성수침(문정공), 입암 민제인(좌찬성), 임필형 (검지중추부사) 등 과 함께 24인 계축(癸丑)생(生) 갑계(甲契)를 모 아 수호(修好)했는데, 모두 당대(當代)의 명류 (名流) 였다. 공(公)의 자질로 보아 수(壽)를 누 렸더라면 학문(學文)으로나 벼슬 열력(閱歷)으 로나 가문을 크게 빛냇을 터인데, 오십도 못되어 졸(卒)하니애닮은일이었다. 아버님 이판공(중검)이 하세하실 때 공의 나이 겨우 6세라. 특별히 좋은 전장을 가려 물려 주었는 데,공이 등과한 뒤 녹봉으로만 생활하고 유산으로 받은 땅을 종질 (宗姪:大立)에게 돌려주어 제사에 보태 쓰게 했다. 그 뒤 16년에 종질(대립 : 무환당 공 )이 등 과하 여 그 땅 을 공에 게 돌 려주 니 공 이 받 지 않고 문중 (門中)에 간사 (幹事)를 두어 관 리케 하고는, 조용한 곳에 서제(書齊)를 마련하여 그 비 용을 충당케 하고 자질(子姪)들에게 학업(學業)에 전념(專念)케하니 당시 경학(經學)과 문장(文章) 이 함양(咸陽)박(朴)씨(氏) 가문(家門)보다 크게 번성한데가없었고,그나머지는어려운종족의상 사 (喪事)나 혼사 (婚事)에 보태 쓰 게 하니 세 상에 서 공의 결백함과 돈목(敦睦)함에 감탄해 마지 않았 다 . 이 처럼 그 는 재 물에 큰 욕 심이 없 었으 며 늘 주변 을 먼저 둘러보았고 선조들을 기리는 마음이 매우 컸던 인물이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면면히 내려와 구소명종친회장학금을주는예로전해오고있다. /박성호명예기자(함양박씨구소명종친회) 조선의명신이조참의증 이조판서명 헌공박세옹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원세계와 인적 연망 명헌공 묘소- 묘소는경기도 고양시함양박씨선영의좌측에자리잡고있다. 묘소아래쪽에는외조부인이관식과 외조모 인천옹주의묘그리고인천옹주의생모인정종의6번째후궁숙의윤씨묘가있다. 부인남양홍씨와합장으로조성되어있는 묘소좌우에는문인석,동자석,망주석이한쌍씩놓여있고봉분앞쪽으로상석,향로석,혼유석.묘갈이모두갖추어져있다. 옥개석과비신,받침돌로이루어진묘갈은비신에보호석을붙여놓았는데보호석이붙어있는비석은흔치않다.묘갈의전 면에는通政大夫吏曺핫 議朴世죕 之墓라고쓰여있어박세옹의것임을알려주고있다. 묘 비, 萬曆二年(1574년)에 만들어진 비석은 보호석이 있어 서인지500년의세월에도여전히글씨가선명했다. 그의사 람됨을맑은바람에비유하여맑은바람은어제와같이천년 을흐르게될것이라는구절로마무리되는묘갈명은그의외 사촌으로의정부영의정을세번이나역임한경헌공인재홍 섬(1504-1585)이지었으며글씨는문과에급제한선비서화 가인동지중추부사남창김현성(1542-1621)이해서로쓴것 이다.묘표는일본경도대학에있다. 돈녕보첩(敦寧譜牒)왕실(왕친,외척)의족보로주요직에사람 을천거할시수록된인물을기용하는참고자료로인용됨 선생의 생애 선생의 연보 契會圖,작자미상,조선16세기전반,비단·수묵담채95.0× 57.5 동방(同榜)과갑계,그리고계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