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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6월30일 화요일 6 (제162호) 관향조 종친회 판서공파는 숭정대부 행(行) 이조판서, 홍문관·예문관 대 제학,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를 지내고 1404년(영락2, 태종 4)좌참찬에 오르고 시호가 문효(文孝)인 휘 안례(安禮)에 의 해 문호가 열린다. 판서공은 판사재시사(判事宰寺事)에 올라 의정부우참찬에증직된휘문로(文老)의아들오형제중셋째 아들로 고려 말 태어났다. 기록이 전해지지 않지만 상주(상 산)박씨 대동보에 의하면 중형(仲兄) 휘 안의(安義) 公이 고 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조 태조부터 세종조에 벼슬기록 이 전해지고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함께 기록되어 있어 판서공또한고려말출사한것으로보아야할것같다. 특히 해동소통(海東疏通)이란 말이 있어 관직에 있는 동안 사물에능통하고업무처리에뛰어났음을짐작해볼만하다.특 히 시호에 문(文)과 효(孝) 자(字)가 있음은 그만큼 학덕과 충효(忠孝)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후 세덕사에 배향되었다. 판서공은 부인 정경부인 배씨와의 사이에 아들 하(遐)를 두 었는데 관직은 숭정대부 행(行) 이조판서, 홍문관·예문관 대 제학 지서연춘추관(知書筵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를 지내 부자가 이조판서와 양관대제학을 지내는 기록을 남겼으 며, 손자 휘 기(奇)는 정헌대부 이조참판 동지경연춘추관 성 균관사 보문각 제학을 지내고 아들 둘(楊善·良)을 두었는데 장남 휘 양선(楊善)은 자헌대부 行 한성판윤, 의금부사 오위 도총부 도총관을 차남 양(良)은 예조참판으 로 후손들은 장성 파(長城派)로불린다. 휘 양선(楊善)의 아들 윤문(允文)은 성균생원으로 그의 아 들 증손(曾孫)의 호는 운곡당(雲谷堂)으로 운곡공으로 불리 고,기묘명현으로순천지역입향조이다. 1496년경기도남양에서태어나관례전사마시에합격하여 족대부 도원재(휘 세희)공 문하에서 경전을 강토하며 심신과 언행이 바르고 총명하여 스승의 신망과 총애를 받아 정암 조 광조선생도군자인물이라며극찬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도원재공께서 강계로 유배를 가면서 세 도(世道,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의 병이 날로 깊으 니 영진하지 말 것을 당부하여 십여년간 몸을 감추고 도학에 전념하던차 1530년 도원재공의 부음을 듣고 단신으로 강계로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남양으로 운구 안장한 후 부인 청주한 씨와 아들 기(奇),매(梅)형제와 가족 그리고 사위 양천인 허 형을 대동하고 남하하여 전남 순천 황전을 거쳐 상사면 쌍지 에 정착했다. 이후 족대부 도원재공의 유훈을 받들어 향촌을 자경골 당호를 운곡당(雲谷堂)이라 하고 평생토록 향리 후세 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다 1573년 향수 78세의 일기로 영면하 니 당대의 큰 사표가 되었다. 1827년(순조27) 사림들은 문강 공 도 원 재 선 생 을 주 벽 으 로 운 곡 공 과 그 의 손 자 임 란 공 신 남 포공(휘 대붕) 등 세분의 학덕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상 사면 동백에 이천서원을 건립하고 사당에 위패를 봉안 향사 하고있다. 운곡공에 대해 조선후기 문인 강재(岡齋) 정재현(鄭再玄) 은 강재문집 6권(발문)에 ‘운곡 박공 유사 뒤에 씀-書雲谷朴 公遺事後’에서다음과같이 기록하고있어 옮겨본다. 뷺세상에 상주 박씨(尙州朴氏)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라면 어찌 정숙공(貞肅公)의 강직(剛直)한 절개와 도원재(道 源齋)의 학행(學行 학문과 품행)의 아름다움을 생각하지 않 겠는가.운곡공 휘 증손(曾孫)은 자가 태이(太而)이고 정숙공 의 방계 후손으로,도원재의 문하에 들어가 배웠으며 정암(靜 菴) 조 선생(趙先生 조광조)에게 칭찬을 받았으니 실제 자취 를 고찰할 필요도 없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공 은 세가(世家,대대로 나라의 중요한 자리에 있거나 큰 녹을 받았던 집안을 이르는 말) 자제(子弟)로 일찍 사마시에 합격 하여 문장과 행실이 모두 유명하였으나 만난 때가 불행한 데 도 어진 스승의 가르침도 있어서 더 이상 과거시험에 나아가 지 않았다. 스승이 귀양지에서 돌아가시자 먼 시골로 가서 은 거하여 새 집에 옛 당호를 걸고서는 경전과 역사를 혼자 즐기 고 충효로 가르치면서 종신토록 원망과 후회가 없었으니 진 실로 수양한 것이 두텁고 지키는 것이 튼튼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어찌 이러하겠는가. 애석하게도 증거로 세울 문헌이 없어서 그 학문의 본말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산 이름이 운곡 (雲谷)이고 마을이름이자경(自京)인것은모두 공에게서 나 왔으니 당시 사람들이 공을 존경하고 사랑한 정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공의 후손인 주부(主簿) 대붕(大鵬)은 일 찍이 진사(進士)로 선묘(宣廟) 기축년(1589, 선조22)에 정암 수(丁巖壽) 등이 소를 올릴 때 참여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 병을이끌고왕실을지키기위해노력하기도하여원종(原從) 공신에 책록되었으니 비록 충의(忠義)가 떳떳한 본성에 근거 하겠지만 집안 대대로 전해온 가르침이 있다는 것도 또한 속 일 수 없을 것이다.공의 후손 정일(禎一)은 나를 따라 배우는 데 어느 날 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와서 보여주었다. 받아 서 읽어보고 감개한 나머지 이 글을 뒤에 써서 부지런한 뜻에 감사한다.뷻 운곡공은 슬하에 기(杞), 매(梅) 형제를 두었는데 이들 형 제가 지금의 판서공파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장남 기(杞)는 통선랑(通善郞)이고, 차남 중종조에 병절교위 부사 맹이다. 통선랑공(휘 기)는 숙부인 창녕성씨와의 사이에 승사랑(承 仕郞)휘 대조(大틘)를낳았으며,승사랑휘대조는단인제주 양씨와의 사이에 민행·민복·민구 등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민행(民行)은 훈(訓)·회(誨) 형제인데 장남 훈(訓)은 아들 성량이 무후(无后)이고, 차남 회(誨)는 어모장군 훈령원정으 로여수율촌문중으로세계를이룬다. 승사랑공의 차남 민복(民復)은 아들 4형제(인·당·양·진)를 두었는데 장남 인(認)은 신방(信邦)·신국(信國) 형제 중 장 남 신방(信邦)의 아들 시석(時錫)은 여수 율촌 행정문중, 차 남 신국(信國)은 광양 봉강 봉촌문중으로 나뉘고, 승사랑공 (휘 민복)의 차남 휘 당은 계공랑(啓功郞)으로 광양 골약 중 동문중,삼남 휘 양은 순천 해룡 계당 문중,사남 휘 진은 광양 도청문중이다. 승사랑공 휘 대조의 차남 민구는 6대에 이르러 아쉽게도 무 후(无后)이다. △ 여수 율촌면 평촌문중은 승사랑공(휘 대조)의 장남으로 판서공파의 장손가이기도 하다. 승사랑공의 장자 민행(敏行) 의 차자 회(誨)는 어모장군 훈련원정을 지냈고, 그의 장자 희 맹(希孟)은학생이고,차자희설(希卨)은또한학생으로그의 5대손 담손에 이르러 무후이고,희맹의 장자 시문(時文)은 무 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그의 장자 동운은 손자 사영 에 이르러 무후이고, 차자 동우는 통정대부 절충장군 첨지중 추부사이다. 희맹의 차자 시창은 학생으로 여수 율촌 평촌문 중은이들형제의후손들이세계를잇고있다. △여수율촌행정문중은 승사랑공(휘 대조)의 차자 민복의 장자 인(認)은 무과 선전관으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자 휘 신방(信邦)은 병절교위로 그의 아들 시석(時碩)이 300여 년 전 광양 봉강에서 이주해 문호를 열었다. 종사랑인 휘 시석은 세빈, 동빈, 정빈, 만빈, 상빈 등 5형제를 두면서 크게 번창한 다. 장남 세빈은 병절교위 부사과이고, 현손 휘 명석(命碩)이 통정대부승정원우부승지에증직되었다. 차남 동빈은 사헌부사간원이고 아들 경진은 통훈대부 사복 시정, 그의 아들 사공 또한 통훈대부 사복시정, 손자 준원은 1 734년(영조10)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증손 명복은 1754년 가선대부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사헌부사간 원 휘 동빈의 장손자 사겸(思謙)의 아들 익원은 통정대부 대 사간에 증직되고, 그의 아들 명일은 통정대부 경연참찬에 증 직 됨으로써 문무지사 가문의 대를 이었다. 행정문중은 입향 조 휘 시석의 차남 동빈의 손자 대(代)에 이르러 사겸(思謙), 사공(思恭), 사일(思一), 사옥(思玉), 사인(思仁) 등 8종항간 5문중으로 2007년(丁亥)에 추모단 5기와 행정추모재숙소를 지어종사를논한다. △ 광 양 봉 촌 문 중 은 운곡공(휘 증손)의 승사랑(휘 대조)의 차남 민복의 장남 인(認)의 차자 종사랑 신국(信國) 아들 휘 상문은 천성이 순후 단아하고 효우 돈목하여 학문 또한 뛰어 나 문과로 군자감(軍資監,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을 맡았던 관 청)정(正)을 지내고, 처음 순천에서 광양시 봉강면으로 1700 여년초 이주하게 되어 봉강면의 봉(鳳)자와마을(村)의원음 을따봉촌(鳳村)파라하고있다. 입향조의 5대손 휘 정일(率性齋公)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 고 형을 아버지처럼 받들면서 노모의 병환 중에 단지를 하여 생명을 연장하게 한 효자이다. 십회시(十悔詩) 및 좌우명(座 右銘)을 써서 걸어놓고 깨우치며 살피는 자료를 삼았다.평생 에 중용(中庸)을 자주 읽어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성(性) 밖 에 도 (道 ) 를 찾 지 말 라 하 고 솔 성 (率 性 )으 로 재 호 (齋 號 )를 걸고 남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여 말과 행동을 삼가 함을 요점(要点) 삼아 무 릇 세간(世間)의 명리(名利)와 성색(聲色)을 일절 마음에 들 이지 아니하고 그 자질(子姪)과 후진(後進)을 위해 교훈하되 문득 효제(孝悌)로선무(先務)를삼았다. 또,광양이 낳은 호남의 지성 신재 최산두 선생과 초대 광양 현감으로 부임 선정을 베풀어 사향민의 추앙을 받았던 인재 박세후 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봉양사가 정유재란에 소실되어 중수 후에 신재 선생의 위패만 봉안하고 있는 것을 애석히 여 기고 동지를 규합하여 중지를 모아 1828년 중수하고 인재 선 생을 추배하여 예전과 같이 사우의 모양을 더욱더 새롭게 하 니 모든 유림들이 선생을 더욱더 숭상하게 되었다. 선생은 특 히풍속진작에힘써지역민이모두추앙하였다. 뱚파조별약사 상주(상산)박씨판서공파 운곡정사와판서공을비롯한 입향조운곡공이하 묘소,판서공파대종회종약소(宗約所)(전남순천시상사면쌍지리) 상주(상산)박씨는 신라(新羅) 제54대 경명왕(景 明王)의 아들인 언창(彦昌)이 사벌대군(沙伐大 君)에 봉해지고,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상주) 를식읍(食邑)으로하사(下賜)받아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다. 아들 욱(昱)이 고려조에서 개국 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예부 상서(禮部尙 書)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것을 시작으 로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가 명문(名門)의 기틀 을 다졌으며. 사벌대군의 10世에 이르러 휘 원 정(元挺)은 첨의정승(僉議政丞)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전( 櫻)은 봉상대부 전법총랑(奉 常大夫 典法摠郞) 차남 여(侶)는 삼중대광 보국 숭록대부첨의찬성사(三重大匡 輔國崇祿大夫 僉議贊成事)에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 지고, 삼남 영(瑛)은 고려부정(高麗 副正)을 역 임하면서크게번성하기에이르러장남휘전은 총랑공파차남여는찬성공파로분파된다.이어 총랑공의 아들 휘 문로(文老)는 판사재시사(判 事宰寺事)에올라의정부우참찬에증직되고아 들 오형제를 두었는데 안충(安忠), 안의(安義), 안례(安禮),안지(安智), 안신(安信)으로 이중 장 남 안충(安忠)은 실전(失傳)이고, 차남 안의(安 義)는 상암공파(商巖公派), 삼남 안례(安禮)는 판서공파(判書公派), 사남 안지(安智)는 예판공 파(禮判公派),오남안신(安信)은정숙공파(貞肅 公派)로분파되어이번호에서는전남순천광양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판서공파(判書公 派)를소개해본다. 한편 총랑공(휘 전)의 차남 문유(文有)는 판원사 공파(判院事公派)로세계를이룬다. 뱚판서공파약사(判書公派略史) 뱚연원(淵源) 뱚판서공파세계(世系) 뱚▲통선랑(通善郞)휘(諱)기(杞)파(派) 뱚▶7면으로계속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