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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6월30일 화요일 4 (제162호) 재실 탐방 행산재는 1955년(乙未) 3월 종중 원로인 봉희(鳳熙) 현종 의발의로 전종원의성금과연금(捐金)으로단비삼좌(三坐) 와 주택(住宅)정침(正寢)4칸을 구입(購入)개수(改修)하여 행산재(杏山齋)라편액(扁額)을달았다. 1964년 갑진(甲辰) 정월달에 당시 종회에서 재사(齋舍)가 협애(狹隘)함을 절감하고 전종원의성금으로정당 오칸(행산 재), 동재 4칸, 대문3칸으로 확장 중건하여 동재를 효우당(孝 友堂),대문을 동원문(同源門)이라편액하였다. 1983년 계해(癸亥) 8월 종의에 의하여 전 종원의 헌성금으 로서재4칸을증축하여치각실(致慤室)이라편액을달았다. 1984년 갑자(甲子)3월 종의에 의하여 구제단비(舊祭壇碑) 가 왜소하고 단소가 협애하여 단비개수 및 단소를 확정하였 다. 1997년 정축(丁丑) 10월 1일 대종회 정기총회에서 공궤청 (供饋聽)증축 및퇴락된관리사를개축하기로결의하여헌성 금으로완성하였다. 그러나본재가건립된지4여년의오랜성상을지내는동안 건축년도에비해빨리노후(老朽)되었을뿐만아니라오랜세 월에 체목이 부식(腐蝕)되어 누수가 잦아 창녕 휘 신경(臣敬, 이조참판파) 종중의 재기(載基) 현종이 기와를 다시 이는 번 와 공사비용 전액을 부담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중건의 필 요성이 재기되어 2007년 10월 추향 때 종회 총회를 열어 행산 재사를 중건하기로 만장일치 의결을 본 이후 동년 12월 17일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종중별 모금 목표액을 책정 한 이 후3년여만에대망의준공을보게되었다. 행산재 중건 과정을 보면 경이롭다고 해야 할 것 같다.최초 창건때부터 동·서재와 공궤청, 관리사 모두 종원들의 십시일 반 모아준 성금으로 지었다.2011년 준공을 가진 중건 또한 종 원들의성금으로이루어졌다. 보통 독지가가 있어 몇 억 씩 후원하여 재사를 짓는데 반해 50여 대소 문중과 1,300여 종원이 참여 한 것이다. 추진위원회자금담당을맡았고당시종회장을맡고있는재 현 회 장 은 족 보 책 을 한 장 한 장 보 면 서 일가들의 연락처를 확인하고통보하여이끌어낸결과라고귀뜸한다. 문중별로 회의를 거듭하고, 형제간, 부자 숙질간, 근친간에 서로의논하고권유하면서헌성을하였다. 전통을 심어주려는 할아버지의 손자 이름 올려주는 헌성, 고국을 방문한 해외 동포 종원의 헌성, 출가한 딸네의 헌성, 용돈마저 타서 쓰는 노년 종원의 헌성, 병석에서 시한부의 삶 을 둔 환자의 헌성은 종교와 지역의 한계를 넘고 학벌과 빈부 그리고 세대 및 계층을 초월,오직 행산 선조의 후예라는 긍지 로 전통을 륍아 조상을 받들고 서로가 화합하며 후세를 육영 하려는하나된그마음그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당시 해냈다는 자부심이 가득차 준공식에 참여한 300여 성손들의 감회 또한 새롭다 못해 매우 상기된 표정이었다. 이에 대종회에는 기금모금에 동참한 문중과 종원의 이름을 돌에 새겨 그 뜻을 영원히 이어지도록 하기위해 행산재 창건 기적비, 중건기적비, 관리사 및 공궤청 신충 표성금록, 중건 헌성금록등을대문앞정원에세웠다. 예(禮)가 비록 선왕(先王)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나 그렇지 않은경우에는가히의(義)로서제정하는경우도있는것이니 이는옛날의군자(君子)가이미인정을한바인것이다. 오늘날 인가묘(人家墓)의 제례(祭禮)가 당초부터 제작(制 作 ) 된 것 이 아 니 지 만 중 세 이 래 로 드 디 어 없 앨 수 없 는 영 전 (令典,좋은 법전)이 되었고, 그 혹 실묘를 하여 묘제(墓祭)를 지낼 곳이없을경우에는단(壇)을 베풀어 제향(祭享)을 거행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혹자들은 의심하기를 묘제(墓祭)는 본 시 보백(報魄)을 위주로 하는 것이며 백(魄)은 또한 시체(屍 體)에 의지를 하는 것인데 시체가 없다면 백(魄)이 어디에 의 지할 수 있을 것이며 백(魄)이 의지할 수 없는 곳에 무엇 때문 에제사를제시를지낼수있으랴한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도 또한 가히 일개(一 槪)로서단정지을수없는것이라고하는것인바왜냐하면백 (魄)이라는 것이 신(神)에 속한바인 것이니 신(神)이 가히 래 격(來格)할 수 있다면 보백(報魄)도 또한 가능한 것이라 할 수있기때문인것이다. 이에 관하여 그 설명을 좀 더 자세히 해본다면 신(神)을 사 당(祠堂)에 옮기고백(魄)을인하여제사를 지내어도오히려 말 할 것 이 없 는 것 이 다 . 그 리 고 비 록 그 묘 ( 墓 ) 에 나 아 가 제 사를 지낸다 할지라도 그 체백(體魄)의 장존(長存)을 가히 기필 할 수 없는 것이니 그렇다면 이처럼 역여( 鋤如)한 것에 어 찌 능 히 그 백 ( 魄 ) 이 있 음 을 보 장 할 수 있 으 랴 . 그 리 고 또 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오직 후인(後人)의 첨앙(瞻仰) 때문 이요 그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대상은 바로 여기에 있기 때 문인 것이니 그렇다면 또한 어찌하여 설단(說壇)을 반드시 묘(墓)로서 견주어 보지 아니하려 하는가? 묘제(墓祭)를 인 정한다고 할 것 같으면 단향(壇享)또한 그 다음은 된다고 해 야 할 것이다. 밀성박씨의 선조에 행산(杏山)충정공(忠靖公)휘 세균(世 均)이란 분이 있는데 이 분은 고려조에서 현달하여 문형(文 衡)을 맡았고, 부원군(府院君)에 봉(封)을 받았으며, 또한 중 조(中朝,중국조정)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한림(翰林)의 벼슬을 역임하기도하였다.그리고중조(中朝)의명사인구양 현(歐陽玄)이 해외(海外)의 의발(衣鉢)이라는 글귀가 든 시 (詩)를 증(贈)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대개 공(公)의 문장을 염모하여서였다. 행산이 이자(二子)를 두었는데 장자는 도은(挑隱) 문절공 (文節公) 휘 문빈(文彬)으로서 역시 중서문형(中書文衡)을 맡았고,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 분을 맺어 고려가 망하매 절개를 지키고 새로운 조정의 부름 에 응하지 아니하였으며,차자 는 소감공(少監公)휘 문익(文 翊)으로서 역시 백공(伯公)과 더불어 절의를 지킨 채 세상을 마치었는데이분들이바로박씨의삼현(三賢)이다. 그러나 세대가 멀고 자주 병난(兵難)을 겪으므로 해서 체백 (體魄)이 묻힌곳을 의신(疑信)속에잃어버리니 후손이 이를 슬피 여겨그 거장(居葬)의 부근에다재실을 재숙(齋宿)의 장 소라 일컫지 아니하고 이름을 행산(杏山)이라 한 것은 존위 (尊位)에통속(統屬)하였기때문이다. 재(齋)의 건립은 갑오(甲午)칠월에 있었고,단(壇)의 향사 는 동년 10월부터 거행을 하였는데 후손인 봉희(鳳)熙)가 이 번의 선후 역사를 강기(綱紀)하고 이듬해 봄 이에 관한 일로 서 나를 찾아와 기(記)를 청하였다. 내 일찍 춘추전(春秋傳) 에서 덕(德)이 후(厚)하여 광(光)을 후세에 남기는 것으로서 세묘불천(世廟不遷)의 증거를 삼는다 라는 구절을 읽은바 이 었는데 대개 덕(德)이 후(厚)한 사람은 그 용물(用物)이 정 (精 )하 고 많 아 구 원 (久 遠 )토 록 풀 어 지 지 아 니 하 므 로 서 쫓 아 제사를 지내매 가히 신(神)을내격(來格)케하는 이치가 있는 것일라.오늘날 삼현(三賢)의 덕(德)이 후(厚)하여 그 흐르는 광(光)을 자손의 중다(衆多)에서 가히 징험하고 있는바이는 그렇다면제사를지내어그 신(神)을가히 내격(來格)케 하는 일 또 한 이 치 의 마 땅 히 있 어 야 할 바 라 할 수 있 을 것 이 다 . 이에 감히 사양하지 아니하고 인하여 평일의 논의(論疑)한 바를 우(右)와 같이 밝혀 기록하여 돌아가게 하면서 아울러 세상의 의(義)에 밝고,예(禮)에 달(達)한 군자(君子)의 질정 (質正)을 기다리기로 하였다.(을미년 2월 김황(金榥)삼가 짓 다) 행산파조(杏山派組)로 서기 1340년경에 고려 충혜왕 때 양 효공(良孝公) 간(幹)의 차차(次子)로서 은산부원군 휘 영균 의제(弟)로태어났고,휘(諱)는세균(世均)이다. 중조 태사공(太師公)의 6세손이며 벼슬이 고려조의 보문각 태학사이며 전문형(典文衡)과 중국 元나라에서 한림학사(翰 林學士)를 지내셨다. 늙어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원나라 문관 구양현이 이별을 슬퍼하며 지은 시(詩) 븮송고려 박학사븯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 다. 귀국하여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고, 밀성부원군 (密城府院君)에 봉하고 시호(諡號)를 충정(忠靖)이라 별세 후에 받았다. 또한 수연(壽宴)을 맞으니 임금께서 기로치사 (耆老致仕)와 함께 선(膳:궁중요리)과 악서(樂書)와 광효(廣 孝)라는 두 글자를 내리시어 고향에서도 임금의 극진한 대우 속에만년(晩年)을보내셨다. 슬하에 장자이신 휘 문빈(文彬)이시니 도은공(挑隱公)이 시며차자소감공(少監公)은휘문익(文翊)이시다. 칠십세가되어고향에오시어도임금님의극진한예우와두 아드님의 지극한 효성으로 만년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詩 가 전해져 현재 행산재 기둥에 판각되어 오늘날까지 읽히고 있다. 충정공 행산 선생의 많은 문적들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에 잃고 남은 시문들마저 천지개벽과 같은 수해에 모두 실전하 였으니애통하지않을수없다. 중국(元)의 명사(名士)인 구양현(歐陽玄)이 해외(海外)의 의발(衣鉢)이라는 시(時)로서 公의 문장(文章)을 염모(艶慕: 화려하여 높이 사모함) 하였다. 장자(長子)이 신 도은(逃隱) 公은 포은(정몽주), 목은 (이색)과 도의(道義)의 교분(交分) 을 맺어 고려가 망(亡) 하매 절개를 지키고 새로운 조정(朝 廷)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며 절의를 지킨 채 세상을 마치었 는데 이분들이 杏山의 삼학사(三學士)요,삼현(三賢)이다.라 고 화산(花山) 先生께서 글을 남겼다. 행산파조의 묘소는 구 보에 밀양 무안 운정 박릉곡에 있다 하였으나 실전하였고, 도 원 소 감 두 어 른 과 손 자 여 섯 분 모 두 가 이 씨 조 선 개 국 에 참 여 하지 않았던 일로 대부분 실묘하였으니 행산문중은 고려말과 이조 초기에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여 오늘날 후손들의 고심 또한역사가깊다할것이다. 행산파조(杏山派組)의 장자(長子)로, 휘(諱)는 문빈(文 彬)호(號)도은(挑隱)이시며 중서전(中書典)문형(文衡)이 벼슬이다. 고려가 운이 다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망복지절을 고수했다. 이조에서대사성으로불러도나아가지않았다.98세로졸하니 좌찬성의금부세자좌빈객을 증하여 문절(文節)이라사시(별 세후시호(詩號)를받음)했다. 公은 포은(정몽주), 목은(이색)등의 문인들과 교류하였으 며목은 先生의 시중(市中)에도 있듯이 부자(父子)세분이학 문이 깊었기에 가전삼학사(家傳三學士)라 칭하였던 구절이 있다. 도은先生께서 이곳 송악에 오시어 칠순을 맞으시니 임금께 서 광효규모(廣孝規模)라는 글을 하사하시니 임금과 나라의 후대를 받으시고 일세의 문장이신 목은 선생의 축하시 등 많 은 시 를 주 고 받 았 다 . 행산재후편에선고인충정공과함께제단을설립춘추향사 를봉행하고있다. 杏山先生의 차자(次子)이시며, 도은(挑隱) 先生의 아우이 시다.휘(諱)는문익(文翊)이다. 고려시대의 소감의 벼슬은 무관직으로 기병과 보병을 합친 군대를인솔하여전라도전주지방에주둔한것으로추정된다. 형인 도은공과 더불어 망복지의를 지켜 이조에는 벼슬을 하 지않고충절을다하였다. 목은 선생의 시문에 杏山先生, 도은공(挑隱公) 소감공(少 監公) 삼부자를 삼현이라 하였으니, 또한 벼슬을 하였더라도 상당한학문의깊은곳에있었으리라짐작된다. 소감공께서전라도에주둔하시고계실무렵의역사는 포은 (정몽주)의 계열로써 함께 뜻을 하신 것으로 짐작 할 수 있 는 것은 杏山祖와 挑隱公 , 삼부자 모두가 함께 이조개국에 참여 하지 않았고,그후 정변으로 삼부자의 묘소마저도 실전 되고, 그후 손자(6분) 모두도 피신하여 심산유곡에 은둔하 였음을 五代손 四美(사미) 祖의 묘소와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있다.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 先生의 기록에 “유염( 孺染하 여 정매(征邁)하니 덕(德)을 이루었다” 하였으니 행산조(杏 山祖)의 높은 뜻과 도은공(挑隱公)의 학덕(學德)을 이어받아 서삼현학사(三賢學士)댁(宅)이라하였으리라. 행산문중은크게6소파로나뉘어진다. 도은공의 아들 4형제(臣悅, 臣敬, 臣輔, 臣寵)와 소감공의 아들 형제(臣佐, 臣弼)로 신열(臣悅)은 찬성사공파로 밀양, 후포, 청도 흑석, 남산, 밀양사촌, 청운, 경북 경산, 전북 정읍, 강원 삼척,대구,신경(臣敬)은 이조참판파로 창녕 계성,밀양 봉황, 신보(臣輔)는 이조판서파로 청도 흑석, 밀양안곡, 함안 외암,경북 영일,신총(臣寵)은 이조참의파로 밀양 상동,전북 정읍, 전주, 경북 청송, 신좌(臣佐)는 소윤공파로 전북 정읍, 강원평창, 부산덕포, 울산평창, 신필(臣弼)은 진사공파로 고 령 내곡, 부산온천, 고성월계, 김해 내덕, 창녕 월계, 경산 남 촌,울산천진에집성촌을이루며세계를이어오고있다. 뱚재실탐방 밀성박씨행산재(杏山齋) 경남밀양시부북면송학길20 행산재전경①단소(제단)②행산재정당③동재효우당④서재치각실⑤정대문(동원문)⑥공궤청및관리사⑦화장실⑧표성비 등 행산재를들어서면먼저‘광효(廣孝)’라는큰글 자가들어온다.이는행산공의아들도은공이부 친을 위하여 수연(壽宴)을 베풀 때 고려왕으로 부터하사한찬궤(饌饋,식사를권함)와광효규 모(廣孝規模) 4자를 사액(賜額) 받은 것으로 집 안의내역을 알아 볼 수 있다. 평소의바름이 효 에서비롯된것으로풀이할수있을것이다. 행산재는 1955년 창건되었으며,정대문인 동원 문(同源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정당인 행산재 (杏山齋)가 있고 우편에 동재(東齋) 효우당(孝 友堂)이, 좌편에 서재(西齋)인 치각실(致慤室) 이 자 리 하 고 있 다 . 정당을 돌아 후원 삼문(三門)을 들어서면 행산 공삼부자의단비(壇碑)가 자리잡고 있으며, 서 재 후편에는 관리사와 공궤청(供饋廳)이 있고, 문밖에는그동안행산재를수호해온이력이담 이 헌 성 비 등이 있 다 . 뱚수호연혁 舊 행산재정당 행산재正堂 舊효우당 동재효우당 서재치각실 정문동원문 뱚행산재기(국역문) 행산재창건·중수기적비및종원들의표성비가정문앞 주차장광장에세 워져있다. 뱚배향위 후원에세워진단소에서춘추향사를올리고있다. 뱚▲충정공(忠情公)행산(杏山)선생 뱚▲문절공(文節公)도은(挑隱)선생 뱚▲소감공(少監公)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