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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6월30일 화요일 10 (제162호) 종합 6월은호국보훈의달이다.'호국보훈 의달'은나라와국민을위해목숨을바 친 사람들의 희생을 기리고 그 공로를 보답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6월이 '호 국보훈의 달'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85년부터다. 국가유공 자를 예우하기 위해 1961년 설립된 군 사원호청(1962년 원호처 승격)이 1985 년국가보훈처로개칭하면서6월이'보 훈의 달'로 정해진 것이다.우리나라는 예부터 국가가 위태해질 때 국민들은 분연히 일어나 국가를 위해 싸워 이들 을 의병이라 한다. 임진·정유재란 등 많은 난에 의병들은 혁혁한 공을 세웠 다. 그리고 현대사에 이르러 6.25 전쟁 은 우리 민족사에서 있을 수 없는 비극 이 라 할 수 있 다 . 1 1 29일 간 에 걸 친 동 족 상 잔 의 비 극 은 수 많 은 희 생 자 가 발 생 했 다. 3년간의 전쟁으로 현재 밝혀진것만 하더라도 국군 62만, 유엔군 16만, 북한 군 93만 , 중 공 군 1 00만 , 민 간 인 250만 , 이 재민 370만,전쟁미망인 30만,전쟁고아 10만, 이산가족 1,000만 등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명의 절반을 넘는 1,900여 만명이피해를입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 체결되면서 고정선(固定線)으로 간 주됐던 38선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대신유동적인휴전선이생겨났다. 월남전쟁 또한 우리 젊은 청년들이 수없이 죽어가고 그 후휴증으로 고엽 제라는 무시무시한 병을 얻었다. 월남 전에서 우리 군은 5,099면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연평해전으로 꽃 다운 청년들의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는 높이 기려야 할 것이다. 그 러 나 매 년 이 맘 때 쯤 이 면 정 부 와 민 간 단 체 에 서 유 공 자 에 대 한 각 종 프 로 그 램을 내놓으며 떠들썩거린다.구호에만 그 치 지 말 고 행 동 으 로 옮 겨 지 는 유 공 자 대우를기대해보면서6·25참전유공자 박순우현종과월남전에참전하여생가 의고비를수없이넘겼던박풍길현종을 찾아가본다. 6·25 전쟁기간에는 전투요원들의 희생은 말 할 수 없다. 그러나 비 전투요원들의 희생 또한 만만치 않다. 순우 현종은 전쟁기간동안 비전투 요원으로서 교통부 소속 철도공무원으로 헌신 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이 전면남침을해오자정부는대통령긴급명령제6 호를 발령하고 교통부는 전시 수송본부를 설치 하여 철도직원과 철도시설일체를 징발, 비상동 원태세를 내리는 동시에 군사수송 지휘관을 급 파하여전시군사및피난민수송에참전하게하 였다. 교통부 소속이었던 철도공무원은 특별조 치령에 의거 전원 군무원으로 소집되었으며, 당 시 철도현업직원 3만여 명중 1만9천3백여 명이 군사및피난민수송작전에참전하여국군및유 엔군과 하나가 되어 군수물자와 병력을 최전방 까지 수송하였으며, 일반 국민들의 피난 열차까 지 운영함으로써 철도는 적의 공격목표가 되어 철도참전용사들의피해가컸다. 전쟁 중 유일한 교통수단은 철도였으며, 파괴 된 교량을 복구하며 자신들을 방위할 아무런 무 기도 없이 오직 애국심만 가지고 싸움으로써 6· 25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본분의 역할을 다했 던 것이다. 이 기간 동안 287명의 사상자가 발생 하였으니 그 피해 또한 커 철도참전유공자들의 고귀한희생정신에잠시고개를숙여본다. 순우 현종은 우리나이로 93세이다. 부산 대저 동집으로찾았을때건강한모습으로맞이해줘 나이를 잊게 만든다.일제강점기인 1928년 1월 2 일아버지동주(東柱)公과어머니홍분연(洪分 連) 여사의 아들로 태어나 충효전가(忠孝傳家) 의 가풍을 이어온 유서 깊은 가문에서 엄부자모 (嚴父慈母)의 훈도를 받으며 예의 바르게 성장, 유년시절 부산 대저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철도 기술원양성소를수료한후1943년 1월 부산지방 철도청에입문했다. 그 리 고 얼 마 되 지 않 아 6 .2 5 전 쟁 이 발 발 하 면 서수많은희생을감수해야했다.우선유엔군의 전쟁물자가 부산항을 통해 들어오면 이들 물자 를 열차에 실어 보내는 일을 매일 반복해하면서 하루가어떻게지나간지모른다. 부산역에서 대저동 집까지 얼마 되지 않은 거 리지만 전쟁 기간에는 6시간이 걸렸다고 함께 배석한 홍우 판도판각공파 전 회장(순우현종 4 촌 동생)은 거든다. 그만큼 전쟁기간동안의 교 통은 말로서 표현하기 힘들었고, 철도공무원들 의고초또한컸다는방증이다. UN군의 보급물자 중 50톤의 탱크 수송이 제 일 기억이 남는다고 말한다. 폭이 3.4m인 무한 궤도식 탱크를 실어야 하는데 당시 우리 화물열 차는폭이맞지않았다.이에일본에서급파하여 개조된기차에20㎝침목을깔고 탱크를 실어전 장으로 보내는데 당시 수송장교와 말싸움이 벌 어졌다. 탱크를 결박하여 안전하게 수송해야 하 는데 수송장교는 50톤의 탱크가 전복된다는 것 을 말이 안 된다며 그대로 강행하며 가버렸다. 순우현종은매사에안전지상주의자인것이다. 당시 유일한 교통수단인 철도 운행은 우리나라 전쟁사에크게기록된다.3년의전쟁기간동안자신 의몸은돌보지못했다.인민군의힘이뻗치지않은 부산이기에 더욱더 바쁜 시간의 연속이었던 것이 다.많은희생자는발생했으나휴전과함께철도업 무도 정상을 찾아가면서 지금은 당시의 상황이 오 래전 기억으로 더듬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안보정신에 이의를 제기한다. 최근 정치 권에서남북한관계정상화등을부르짖으면서정작 안보는뒷전이아닌지묻고싶다고말한다. 순우 현종은 전쟁 기간 중인 1952년 계장으로 승진하였고, 철도청 간부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철도청 부산 검차국에 임용되어 열악한 근무 환 경 속에서도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묵묵히 맡 은바 직무에 심혈을 기울여 종군하여 군수화물 수송작전에기여했다. 이후 부산지방철도청 검수계장 등용시험에 합격, 부산객화차사무소 검수계장, 운수과, 차 량과 근무. 부산객화차사무소 기술계장, 검수계 장,분소장 등 요직을 역임하고 1986년 6월 정년 퇴임하는 순간까지 탁월한 기획력과 정확한 판 단력을 바탕으로 철도시설 및 장비의 철저한 사 전점검을통해안전사고를예방하고대국민교 통수단의 핵심 열차운행 계획에 따라 무사고 운 전을 위한 교육을 통해 철도인의 생명인 신속하 고안전한운행과고객만족을위해철도문화써 비스를 제공하는 등 철도운영발전과 국가고도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기여해온 인사로 퇴 임 때 옥조근정훈장을 수상했으며, 재임중에도 대통령 표창(2회), 교통부장관 표창, 철도청장 표창(3회)과 퇴임 후 6·25참전용사 증서, 국가 유공자증서,호국영웅증서를각각받았다. 그리고 종사에 입문하여서는 판도판각공파 부회장과 감사, 고문을, 박씨부산시종친회 강서 구 지부장 4년 역임하는 등 종사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특히각급종친회행사에백수를바라 보는 나이임에도 솔선수범하고 있어 많은 귀감 이 되고 있는 순우 현종은 부인 전연수(田連守) 여사와의 사이에 3남2녀를 모두 훌륭하게 성장 시켜행복한가정을일구었다는평이다. 부산진구 보훈회관 3층 303호, 대한민국 월남 전참전자회 부산진구지회 사무실이다. 이곳 사 무실 사무국장으로 30도가 넘나드는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참전전우들의 권익향상을 위 해사무실에출근한풍길현종을지난17일찾았 다. 마침 월례회와 호국보훈의 달 기념 유공자 위문품이 정부로부터 나와 접수하고 옮기는 등 정신없이바쁜시간속에잠시시간을빌렸다. 밀양박씨 사문진사공후 간의대부공 후손으로 1941년8월15일대구에서태어난풍길현종은1 965년27사단이기자부대에 입대했다.병장으로 근무 중 1967년 맹호부대소속으로 파병 배트남 의 꾸이년에 도착했다. 포병으로 1년간 수많은 전투에서전장을누볐다.포병의주된임무는각 종 대포와 대공포 및 로켓과 유도탄 등과 같은 화력수단에 의해 적의 전투부대나 군사표적을 파괴함으로써 보병이나 기갑부대의 작전을 지 원하는것이다. 그러나 생사의 고비도 수없이 넘겼다.일명 태 풍 5호 작전, 1967년 11월 배정신 중령 지휘로 퀴논 북방 안톨마을 일대의 베트콩 침투지역 수 색작전으로 지원사격에 엄청난 화력을 지원하 면서성공적인작전을전개했다. 사이공의 나트랑시 호화담 마을에서 적국 3 개 대대가 진격하기 시작 이를 막기 위해 지원 사격을 하다 적군의 사격에 철모위로 쏟아지 는 적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적탄을 피하기 위해 초인적인 힘으로 땅을 파기시작 몸을 더 낮추어 피하다 아군의 엄호사격 덕분에 살아 날 수 있었다.그러 당시 중대장의 무전병이 적 탄을 맞아사망했단다. 1968년 3월 귀국 후 전역한 풍길 현종의 배트 남전에서 겪은 수많은 상처는 정신적 고통으로 남아 한동안 많이 힘들었다. 그리고 고엽제후유 의증판정(경증)을받았다. 전역 후 생업전선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종친 회 일 에 도 게 을 리 하 지 않 았 다 . 부 산 진 구 지 부 사무국장 10년,본부 감사 4년, 부산진구지부장, 부산본부 지부장협의회 등 종친단체에서 봉사 하다 지난해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 부산광 역시 부산진구지회 사무국장으로 회원들의 권 익증진에앞장서고있다. 최근 정부에서 추진 중인 보훈정책에 대해 아 쉽다며 시위현장에서 쓰러진 사람은 열사이고, 여행 중 사망한 사람들은 인재라며 엄청난 보상 금과 매년 추모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반면 목 숨을 바쳐 국가에 헌신한 유공자들은 현충일 하 루 형식적인 구호에 그치며 생계지원은 미미하 다. 연평해전에서 목숨을 바친 전우들을 생각하 면 정말 울화통이 터진다며 이날 월례회를 위해 모인전우들은말한다. 혹자들은 월남전 참전용사들을 돈벌이 위해 갔다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단다.이럴때면 “대한 민국정부에서 파병을 결정할 때 정작 당사자들 에게묻고파병했는가?”라고묻고싶단다. 월남전 전사자들은 연금도 없고 부모에게 소 액의 금전을 지원할 뿐 아무것도 없다며 ‘개죽 음’이라고 말한다. 꽃다운 20대 청춘들의 목숨 을가벼이하고있다며울분을토한다. 그러면서 최근 북한에서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강경기류인 반면 우리 정부는 오히 려 북의 눈치만보고 있다며 주적의 개념을 명확 히해야하는데지금의정부는퍼주기만하고있 어 답답하다고 강조한다. 매년 6월이면 생각나 는 전우들이 있단다.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하면 서 나누었던 전우애가 정부의 무관심으로 피지 못하고 있는데 성의 있는 보훈정책으로 활짝 웃 는날이왔으면하는기대감을감추지못하고있 는 풍길 현종을 비롯한 보훈가족 모두에게 진정 한보상과복지정책이이어지길소망해본다. 한편 월남전 파병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위키백과사전’을인용해소개해본다.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한국 전 쟁 직후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을 고려하였으나 프랑스의반대와주변국가여론이좋지않자포 기한바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를 내걸고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였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미국의 요청이 있기 전인 1961년 박정희가 존 F. 케네디에게 먼저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케네디의 정책은 베트남 전쟁에 미군을 직접 투 입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케네디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 은1964년대한민국에게의료부대의지원을요청 하였다. 1964년5월 9일 미국이 보낸 서한에는 "1 개 이동 외 과병 원"을 파 병해 주도 록 요청 하고 있 다.대한민국의 국방부는 130명 규모의 이동 외과 병원과 10명으로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등 140명 을파병하기로결정했다.통킹만사건이후미국은 대한민국에 후방 지원 부대의 파병을 요청하였고, 대한민국은 제6사단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인 비둘기부대를 창설하고 1965년 3월 10일 인 천항을 통해 파병하였다. 비둘기 부대는 3월 16일 사이공에 도착하였고, 사이공 동북쪽 22km에 있 는지안에주둔하여건설지원임무를수행하였다. 1965년 미국은 베트남 주둔 민군의 사상자가 속출하자 곤경에 빠져있었다. 1965년 3월 11일 김현철 주미대사는 조지 볼 미국무부 차관과의 면담을통해"한국정부는베트남에서추가적인 병력을 기꺼이 파견하겠다."고 말했으며, 이동 원 외부무 장관은 브라운 주한미국 대사와의 다 음과 같이 협상을 했다. △ 파병 상한선은 5만명 이내 △한국군의현대화 지원 △북한의 침공시 미국이 즉각 출병하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 한다. △ 남베트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 등 한국의남베트남시장진출을보장한다. 위와같은한국정부의요구사항은1965년5월1 7일에서18일까지워싱턴에서개최된한미정상회 담에서 대부분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 는 6월 14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전투병력 정식 파병요청서를 접수하고, 8월 13일에 국회 의결을 얻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수도사단장 채명신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청룡 부대가 1965년 10월 9일 깜라인 에 상륙하였고, 9월 20일부터 주월한국사령부가 사이공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11월 1일에는 맹 호부대가꾸이년에상륙을하였다. 대한민국의 베트남 파병 병력의 누계는 32만 명에 달했다. 베트남파병 병사의 의무 기간은 1 년이었고, 파병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8년 당시 의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수는 5만여 명이 었다.파리평화협정으로미군이철수하면서대 한민국역시철군하였다. 베 트남 전쟁 기간 동 안 한 국군 의 전 사자 는 약 5 천여 명이었고 1만 1천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 국군은 전쟁 중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 약4만1천여명을사살하였다고밝히고있다. 미국은 한국군 병사에게 2억 3600만 달러를 지불하였고, 대한민국은 파병의 대가로 경제 발 전을이루었다.대한민국의 GNP는파병을전후 로하여5배가량성장하였다. 뱞종친탐방.... 호국보훈의달 특집 참전유공자 박순 우·박풍길 현종 박순우현종(右)이사촌동생홍우전판도판각공파대종회장의도움을받으며인터뷰를하고있다. 박풍길 현종이 월남전참전자회 부산 지구지회 사무국장 으로봉사하고있다. 박풍길현종은포병으로적의전투부대나군사표적을파괴함으로써보병이나기갑부대작 전을지원하는임무를수행했다. 월남전 에서의 박풍길 현종, 1967년 맹호부대소속으로 파병 베트남의 꾸이년 등지에서 수 많은전투를벌였다. 6·25참전유공자박순우(朴順祐) 월남전참전용사박풍길(朴豊吉)현종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