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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선선생이 공부를 하시던 삼악하교의 위치를 표시하는 표지석을 찾아가는 중이다. 주소는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390-1이다. 이곳은 2016년에 찾았었다. 돌아와서 편집을 하다보니, 저 승용차가 서있는 뒤에 용인독립운동유적 정주원의병 교전지 표지판이 있었다. 현장에서는 깜빡잊고 그냥 지나쳤다. 그 모습은 아래 사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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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운동유적] 정주원 의병 교전지 -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능말 이곳은 구한말 정주원 의병의 교전지이다. 정주원(鄭周源, 1870~1908)은 죽산군 원삼면 하수리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같은 해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들을 모집하였으며, 양지.양성에서도 의병을 모집하여 150여 명의 의병부대를 갖추고 의병장이 되었다. 1908년 2월에 안성.양지.죽산 등지에서 일본군 15명과 교전을 벌였으며, 1908년 3월 30일 원삼면 능말에서 의병 80여명과 함께 일경과 교전하였다. 4월에는 양지군 사동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9일, 안성에서 일본군 40여 명의 습격을 받고 교전을 벌렸으며, 이후 죽산.양지에서 계속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한때는 의병의 수가 900여 명에 달하였다. 수가 늘어나자 정주원은 의병부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그 중 한 부대는 정주원 자신이 직접 지휘하며 수원군 수하 방면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고, 나머지 두 부대는 양지.죽산을 넘나들며 의병활동을 벌이도록 하였다. 1908년 7월 19일 충청도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나 감형되어 충남 당진에서 은둔하다가 1925년 타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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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운동유적] 정주원 의병 교전지 -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능말 이곳은 구한말 정주원 의병의 교전지이다. 정주원(鄭周源, 1870~1908)은 죽산군 원삼면 하수리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같은 해 8월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용인군 굴암에서 30여 명의 의병들을 모집하였으며, 양지.양성에서도 의병을 모집하여 150여 명의 의병부대를 갖추고 의병장이 되었다. 1908년 2월에 안성.양지.죽산 등지에서 일본군 15명과 교전을 벌였으며, 1908년 3월 30일 원삼면 능말에서 의병 80여명과 함께 일경과 교전하였다. 4월에는 양지군 사동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9일, 안성에서 일본군 40여 명의 습격을 받고 교전을 벌렸으며, 이후 죽산.양지에서 계속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한때는 의병의 수가 900여 명에 달하였다. 수가 늘어나자 정주원은 의병부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그 중 한 부대는 정주원 자신이 직접 지휘하며 수원군 수하 방면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고, 나머지 두 부대는 양지.죽산을 넘나들며 의병활동을 벌이도록 하였다. 1908년 7월 19일 충청도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나 감형되어 충남 당진에서 은둔하다가 1925년 타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