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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閔泳煥)은 서울 견지동(堅志洞)에서 태어났다. 1878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순조롭게 역임하였으며,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명성황후의 친족이었다. 부친은 민겸호(閔謙鎬)로서 임오군란 때 피살되었으나, 민영환은 온순하고 청렴하였으며 애국심이 매우 강하였다.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에 개화사상을 갖게 되어 개화정책을 지지하였다. 갑오경장 추진내각이 수립되었을 때에는 1895년에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1896년 2월의 아관파천 후, 3월에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그에 가서 제정러시아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그 해 10월에 귀국하여 의정부찬정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897년에는 다시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태리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재차 유럽 여러 나라들을 순방했으며, 이 때 특명전권공사를 겸하여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년 다이아몬드 축하식에도 한국사절로 참석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여행에서 각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발전상을 견문하고 돌아와서 고종에게 우리나라도 대대적인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고 민권을 확장하여 독립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하자고 건의했으나 시행되지 못하고 그의 건의에 따라 육군제도만을 개혁하였다. 1898년부터 서재필(徐載弼) 이상재(李商在) 등이 지도하는 독립협회(獨立協會)가 본격적인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자, 적극적으로 이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의회(議會)를 개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관료로서 정부 내의 적극적인 독립협회 지지자가 되었다. 독립협회가 1898년 10월초부터 수구파 7대신의 퇴진과 개혁파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는 철야 상소시위를 연일 감행한 결과 1898년 10월 12일 박정양(朴定陽)을 수반으로 한 개혁파 내각이 수립되었을 때에는 군부대신 겸 내무대신에 임명되어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하고 개혁파정부의 실권자로서 독립협회 운동을 지원하였다. 박정양 민영환 정부에서는 즉각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제안을 받아들여 한국역사상 최초의 의회(議會)를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1898년 11월 2일 중추원(中樞院)을 의회로 개편하고 의회설립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민영환 등과 독립협회가 공화정(共和政)을 수립하려고 한다는 수구파의 모략전술로 의회설립운동도 좌절되고 그도 파면 당하였다. 1902년 이상재 이상설(李相卨) 이 준(李儁) 이동휘(李東輝) 양기탁(梁起鐸) 등과 개혁당(改革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다가 이상재는 투옥되고 민영환은 견책 당하였다. 그는 황실의 친척이므로 곧 복직되어 참정대신, 탁지부대신, 원수부(元帥府) 회계국총장,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 헌병사령관의 여러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였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 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키어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 침략정책을 자행하자, 그는 고급관료로서 이를 격렬하게 성토하다가 일본군의 압력과 친일적 각료들과의 대립으로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으로 좌천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빼앗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을사조약에 서명한 5적을 처형할 것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요청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지 아니하므로 다시 상소를 올리고 대한문(大漢門)밖에 엎드려 대답을 기다렸으나 일제는 조병세와 민영환 등을 체포하였다. 석방된 후에는 상소운동이 효과가 없음을 통감하고 죽음으로써 국민에게 고하여 국민을 분기시켜서 국권회복운동을 일으킬 결심으로 유서 2통을 남기고 1905년 11월 30일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그의 유서 중 국민에게 고하는 유서에서는 「아,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다다랐구나. 생존경쟁이 심한 이 세상에 우리민족의 운명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맹세하는 사람은 살아 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나 영환은 죽음으로써 황은을 갚고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려 한다. 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황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형제여, 천만 배나 분려(奮勵)를 더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과 마음을 합하고 힘과 힘을 아울러 우리 자유독립(自由獨立)을 회복할지어다.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겠노라. 아, 조금도 희망을 잃지 말라.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한다.」 고 하여 온 국민이 죽음을 맹세하고 분발하여 국권회복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그는 각국 공사관에게 보내는 유서에서 일본의 한국침략 사실을 환기시키고 자유독립을 위하여 일어선 한국 국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의 〈자결〉과 국민에게 드리는 〈유서〉는 각 신문에 일제히 상세하게 보도되어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게 하는데 큰 계기를 만들어 주고, 나라가 독립을 찾아야 한다는 모범을 죽음으로써 가르쳐 주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애국심과 국권회복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