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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 - 을 요청하였고, 청이 군대를 보내자 덩달 아 일본도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외 세의 간섭을 우려한 농민군은 정부와 협 상에 나섰다. 조선 정부가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하자, 농민군은 해산하였다. 한편 조선에 들어온 청일 양국 군대는 조 선의 철수 요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 도권을 잡기 위하여 서로 신경전을 벌이 고 있었다. 6월 말 일본군은 갑작스럽게 경복궁을 점령하여 친일 정권을 세웠고, 이틀 뒤에는 청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본 격적으로 청과 전쟁에 들어갔다.(1894년, 청일 전쟁) 구미열강의 문물을 받아들여 현대화된 무 기로 일본군은 한반도 곳곳에서 청의 군 대를 압도하였다. 한반도가 외세의 전쟁터 로 변하고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농민들은 9월 하순 “양놈과 왜놈을 몰아 내자.”라며 다시 무기를 들었다. 한편 한반도에서 청의 군대를 격파한 일 본군은 압록강을 넘어 청의 군사 요충지 를 점령하였고 청의 最精銳(최정예) 함대 도 맥없이 무너지면서 수도인 베이징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결국 청은 항복을 선언하였다. 일본은 승리감에 도취하여 막대한 배상금 과 영토를 청에 요구하였다. 이 모습을 지 켜보던 러시아가 독일 · 프랑스와 함께 일 본을 (牽制)견제하고 나섰다. (1895년, 삼국 간섭) 일본은 청나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조선 의 내정을 간섭하고 산업을 독차지하며 지배국의 행세를 하기 시작하고 미국과 데스트카프라密約(밀약)을 체결하여 조선 의 지배를 露骨化(노골화)하기 시작하였다. 동학농민군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외세 배격을 외치며 또다시 대규모 봉기에 나 섰다. 이번에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 · 경 상도 · 경기도 · 강원도의 농민들도 함께 봉기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신식 무기 앞에서 농민군은 크게 패하여 뿔뿔이 흩 어질 수밖에 없었다. 농민 전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조선의 개혁과 의병 전 쟁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세력의 압력 때문 에 일본은 중국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 주어야만 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다 잡은 고기라고 생각하였던 조선에서도 러시아 의 입김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 는 것을 막기 위하여 조선의 왕비를 시해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895년, 을미사변). 그러나 이 사건 후 조선의 왕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아관파천), 러시아 의 영향력은 갈수록 더 커져갔다. ‘동양의 맹주’를 꿈꾸던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면서 군비 확장에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