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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 의攝政 (섭정)과 무리한 경복궁 중건공사 로 경제 사정은 악화되었고 歐美(구미)열 강들은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며 카톨릭 탄압을 응징하기 위한 丙寅洋擾(병인양요) 와 辛未洋擾(신미양요)를 일으켜 국내정세 가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의 國運 (국운)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백성들은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며 貪官汚吏(탐관오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처참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이에 대원군은 鎖國政策(쇄국정책)으로 斥 和碑(척화비)를 세우고 외세침략에 대응하 였지만 列強(열강)들의 조선반도 攻略(공 략)은 계속되었으며 국가부채는 늘어만 가 고 권력을 놓치않으려는 대원군과 권력을 찾으려는 명성왕후의 적대감으로 대원군 은 청나라에 원군을 청하였고 명성왕후는 일본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하여 외세가 개입되어 조선은 그야말로 청일의 난장판 같은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이에 1894년, 포악한 관리와 외세의 收奪 (수탈)에 맞서 봉기한 조선 농민들의 함성 이 한반도를 뒤흔들었다. 바로 이것이 조 선 최초의 동학농민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를 진압한다는 빌미로 조선에 들어온 청 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일본이 승리하였다. 이로써 중국을 중심으로 하던 동아시아 질서가 무너지고, 일본이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갑오년(1894년) 정월 대보름을 닷새 앞둔 차가운 겨울밤, 한 무리의 풍물패가 전라 도 고부의 마을을 돌면서 농민들을 불러 모았다. 온갖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어느새 성난 물결을 이루었고, 농민 수천 명이 곧장 고부官衙 (관아)로 달려갔다. 전봉준의 지휘 아래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여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창고를 헐어 빼 앗긴 곡식을 나누어 가졌다. 고부에서 시작된 봉기는 이웃 마을까지 번져, 3월 하순에는 농민 전쟁으로 발전하 였다. 전봉준은 동학 조직을 이용하여 부 대를 편성하고 “못된 관리와 양반, 포악한 외세를 몰아내자.”라고 沙鉢通文(사발통 문)을 보내 각지에 봉기를 촉구하였다. 드 디어 체계를 갖춘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 를 누비며 破竹之勢(파죽지세)로 北上(북 상)하였다. 정부와 화해한 농민군은 전주성을 비우고 농사짓던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라도 를 중심으로 자치 기관인 執綱所(집강소) 를 설치하고,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나섰 다. 집강소에는 농민을 괴롭히던 수령과 아전, 양반들이 잡혀 와 혼쭐이 났고 奴婢 (노비) 문서는 불 속으로 던져졌다. 무지 렁이 농민들이 역사의 前面(전면)에 등장 한 것이다. 조정에서 진압군이 파견되었지만 농민군 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전라도 제일 의 도시 전주가 마침내 농민군의 손에 넘 어갔다. 다급해진 朝廷(조정)은 청에 출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