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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 오는 길에 구입하여 가지고 온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어릴 때 얇은 검정 고무신은 보았지만, 굽이 있는 고무신은 처음 보았고 밑창과 고무신 전체가 얇았 다는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출토된 신발은 밑창 이 아주 두껍고 전체적으로 고무가 단단 해 보인다. 수입품 신발이면 그 당시 보통 사람들은 신기 어려웠던 고무신이라고 한 다. ▶비성골 발굴지에 안개와 가랑비 내리는 날 비성골 발굴기간 동안(2018년 6월 20일~ 6월 25일) 장마철이라 안개와 비가 잦았 다. 발굴장에서는 비가 오는 것이 가장 곤 혹스럽다. 유해가 비를 맞으면 빨리 부식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비성골은 유해가 적게 출토되었다. 가랑비가 휘날리는 날 발굴장을 바라보니 대부분의 시신은 찾아 갔지만, 무연고인 유해는 쓸쓸히 혼자 남 아있다. 이제야 발굴되어 안식처를 찾게 되어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 아닌가 싶어 매우 쓸쓸하고 착잡했다. 발굴장을 둘러싸 고 있는 쭉쭉 뻗은 버드나무들도 발굴지 를 감싸고 있었지만 이제 복합도시건설로 사라지게 되겠지 하면서 아쉬움이 남았다.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 단 안경호 국장이 발굴장 전체 배경 사진 을 촬영하기 위해 포크레인에 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위험을 감수하고 발굴에 전념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비성골의 사살과정과 시신을 수습한 증 언의 목소리 당시 갈운리 ‘수멍재’ 현장 아랫마을에 살 았던 참고인 신순용(당시 13) 어르신의 증 언에 따르면 사살 당일 저녁 때 쯤 경찰 들이 와서 ‘사격훈련하니까 집에서 나오지 마라, 나오면 큰일 난다’며 주민들을 전부 집으로 들어가게 한 후 엄청난 총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 지역의 희생자 유족들 은 대부분 시신을 수습한 경우가 많았는 데 사살 현장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 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시신을 수습했던 참고인 송재진‘은 구덩이 속에는 두 사람씩 손이 철사로 묶인 채 머리에 총을 맞아 죽어 있었다’고 했다. ▶비성골의 발굴지에서 위령제 및 안치 드디어 세종시 연기면 비성골 발굴도 막 을 내리게 되었다. 유해와 유품 중 유일하 게 검정 고무신만 많이 출토된 신발도 함 께 추모의 집에 보관되었다. 주인 잃은 검 정 고무신 유품들은 희생자들의 신분과 직업 등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맺음말 충청남도 지역의 희생자들은 보도연맹원 과 좌익혐의 등을 이유로 예비검속된 사 람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좌익활동과 무관하게 보도연맹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