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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문 나라의 안팎이 어지럽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 되던 1894년(갑오) 구국제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동학농민군은 총궐기하여 혁명을 소리높이 외쳤다. 고부에서 전주로 다시 옥천에서 홍천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던 그 혁명의 이념은 안으로 봉건주의의 타파였고 밖으로 일본제국주의의 타도였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운동의 근대적 효시였으며 최초의 항일 민족운동으로서 위로는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화랑의 애국정신과 아래로는 삼일운동의 정신적 맥락을 같이 하면서 이나라 근대사의 커다란 물굽이를 이루며 빛나는 각광을 받고 있다. 홍천에서는 그해 11월 접주 차기석과 친 일본군과 싸우며 홍천읍및 횡성방면의 관군에 맞서 내촌면 물걸리에서 먼저 혁명의 횃불을 올린후 두촌, 화촌, 동면과 홍천읍에서 격전을 벌렸고 또한 내면에서는 여러 차례의 공방전이 있었으니, 이 때 그 정의와 애국의 대열에 이 고장의 농민들은 혼연히 참여하여 귀한 신명을 바쳤다. 일본군의 침략적 출동으로 혁명군에게는 패색이 완연하던 때였으나 경기, 충청 그 외 여러 고을에서 모여든 동학군과 손을 잡고 홍천의 동학농민군은 승패에 구애됨이 없이 오직 정의를 위하여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는 수천 군중이 이곳 서석에 모여 항전하다가 30일(음력10월 23일) 그 힘이 다하여 빛나는 최후를 마쳤으니 그 수는 800에 이른다고 전해 오지만 대부분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참혹하게도 이 자리에 있던 구렁에 쓸어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착란의 역사를 반성하는 홍천 군민은 무명의 영령들 앞에 명복을 비는 정성을 모아 탑을 세우고 그 정의의 넋을 영원히 기리는 한편 이들의 애국혼을 오늘에 되새겨 우리들 마음의 등불을 삼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