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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열경찰 반공의적기비 建國警察(건국경찰) 救國警察(구국경찰) 護國警察(호국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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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警察 反共義蹟記(충열경찰 반공의적기)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30분 북한 공산군은 괴뢰군 15만 4천명과 전차 242대 장갑차 208대 각종포 2540문 전투 비행기 211대 해군함정 30척등으로 일제히 38선을 넘어 불법남침 공격하여 왔다. 당시 남한의 병력은 보병 8개사단 10만명 이었으며 전차는 한대도 없었고 장갑차 27대 각종포 840문 해군함정 30척 공군연습기 겨우 10대를 가졌을 뿐 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대한민국이 공격해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면서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북괴의 남침에 우리의 국군도 즉시 대응하였으나 중과부적에다가 그나마 일요일이라 외출중인 장병들을 소집하기에는 시간이 미치지 못하였으며 6월 28일 03시 한강 인도교가 예정보다 일찍 폭파되고 한강 이북의 국군은 총 퇴각 한강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하기에 이르니 수도 서울은 완전히 적에게 함락되었다. 기선을 잡은 북괴군은 계속 남하하여 7월 15일에는 제2방어선인 금강 남안의 구출선까지 뚫고 7월 20일에 대전에 진입하고 대전 작전에서 미25사단장 딘 소장은 직접 적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며 용전하다가 행방불명까지 되었으며 대전을 점령한 적은 진로를 세갈래로 나누어 일부는 호남을 휩쓸어 마산에 달하고 일부는 경부선을 따라 대구로 향하였으며 일부는 동으로 향해 포항에 육박했다. 6월 27일 유엔 분부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공산주의자들의 불법침략임을 규정 이에 대응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 32개국에서 대한의 자유전선을 원조하여 왔다. 그러나 전선은 이미 낙동강까지 밀려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풍전등화였다. 이때 유엔군은 총사령관에 맥아더장군이 임명되어 작전 총 지휘를 맡고 있었다. 9월 3일 12시를 기하여 적 보병 8개 사단과 1개 전차사단 병력이 총 집결 최후의 침투를 하였으나 유엔군과 국군은 완강히 저지 주력부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한국 함정 15척을 비롯 연합군 함정 261척의 함포사격으로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어 9월 28일 역사적인 서울탈환이 이루어져 중앙청 첨탑에 태극기가 올랐다. 9월 30일 38선 이남은 완전 수복되었고 유엔군 사령관은 북괴 김일성에게 더 이상의 유혈과 파괴행위를 중지하고 항복할것을 권고하였으나 남한에 있는 공산군의 퇴각을 명하였을 뿐 이었다. 이에 반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을 무렵 중공은 의용군이란 미명하에 100만 대군을 파병 북한의 괴뢰군과 함께 총 공격에 나서 작전상 부득이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버리고 수원까지 후퇴하게 되었으며 그후 서울을 탈환 38선에서 피아간의 공방전을 계속되었다.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백마고지는 1952년 10월 1일 ~10월 29일까지 1개월간 25회 이상 고지의 주인이 바뀌기도 했던 요새이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군과 공산군은 현 휴전선을 놓고 휴전협상이 조인되고 말았다. 6.25사변으로 유엔측은 150억불의 전비와 16개국에서 총254,761명이 참전하여 그중 전사자만도 미군 33.629명을 포함 34,943명이 되고 한국군 30여만명 경찰관 11,164명 이며 전쟁 미망인 20만명 전쟁고아 10명이나 되었다. 가옥피해 60만 채에 공업시설 45%의 가동이 불가능하게 되니 경제와 사회는 그대로 암흑기였다. 적의 피해도 북한 괴뢰군 52만명과 중공군 90만명이 사살되고 민간인 피해등 총 180여 만명으로 남한의 5배가 넘는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는 북괴 김일성의 적화남침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비참한 동족상잔의 비국였으며 양극 세력의 세계적인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 전쟁은 휴전으로 멈출 때 분명 이조국 대한은 승리하였고 오늘의 철책선분단 속에서도 겨레의 평화는 진정 유구하기만 하다. 그것은 그대로 폭력을 이겨낸 평화의 승리요 불법을 뛰어 넘은 양심의 광명이니 조국의 참된 자유는 여기서 오히려 영원무궁하여라 그때 그 평화 그 자유 위해 산화한 거룩한 총경 정철모님외 열다섯 분의 고귀한 희생을 여기에 모시니 장렬한 죽음위에 치솟는 힘찬 충령은 오늘도 겨레의 가슴마다에 길이 의롭고 뜨겁기만 하다. 서기 1986년 6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