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梧山 金俊亨先生功積碑文(오산 김준형선생 공적비문) 괴산 동쪽과 연풍서쪽에 한 이름이 있으니 한 큰씨족으로 마을이름이 백운동이라. 거족은 의성김씨니 뿌리가 깊으니 어찌 거목이 아니겠나 물의 근원이 길면 반드시 큰 못이되니 옛 이조 헌종 철종때 재주가 뛰어난 영걸이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백운동 시골집에 살았으니 그 이름하여 김준형으로 자는 성옥이요 호는 오산이라 일찍이 박학자를 따라 제자로 공부하여 시문과 경서에 통달하고 더욱 예법을 정신하여 고종 광무8년 2월 5일 칙명으료 교지를 받으니 성균관 전례비서원 비서를 받았다. 상고하건대 벌족으로 즉 신라 경순왕 제4남 휘석은 의성군에 봉하여 시조로 하고있다. 고려조에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 의성군에 봉해진 휘 용비는 공의 20세 중시조이다. 고려말 문과 봉익대부 병수상서 공민왕 11년에 홍건적을 토벌하여 경성을 수복하니 세칭 김장군이라 순성보리공으로 의성군에 봉하였다. 고려말 왜란에 왜적의 토벌에 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하신 휘는 광부요 호는 남파공으로 의성김씨 중흥선조로서 공의 17세조이다. 그후 명관석유는 다 기록할 수 없는 명문거족이라. 사적을 살피건대 즉 일제치하에 우러러 탄식하며 그치지 못하며 을유년 8.15광복후에 이승만박사와 가까이 지내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발족시에 괴산군지부장으로 취임하여 민주국가 수립에 열열히 투신 봉사한 공로로 누차 포상 표창을 받았다. 특히 좌경배제에 적극 노력하여 보도연맹 결성시에 가입을 막고 끊어 한 마을이 편안하니 당연히 그 당시 공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 것이며 공의 엄하고 강한 방안이 없으면 어찌 구했으리요. 이는 감동해서 눈문이 나고 아주 존경스러운 일이로다. 말년에는 세거 종중재실인 봉서재에서 학문을 가르치는데 게을리 하지않으니 학도가 운집하여 서경을 강론하고 읽는 소리가 백운동에 그치지 않으니 유교진흥에 그 공로가 지대했도다. 또 어진자는 필히 장수하니 선생은 81세로 시골집에서 돌아가시니 이는 복이며 위대함이라. 공의 막내아들 필규씨로 하여금 내게 글을 청하여 고사했으나 허락하지않는 고로 어리석고 재덕도 모자라고 천학비재하나 삼가 청문의 글을 지어 선생의 영전에 머리숙여 올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