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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일생을 풍운속에 던진채 대의는 산같이 우뚝하고 큰뜻이 역사를 움직여 이름을 백세에 드리운이가 여기 고요히 누워계시니 이는 민족의 스승이요 천도교 제3교조인 의암 손병희선생이시다. 일직 단기4194년 4월 18일 청주에서 나시니 본관은 밀양 부친은 의조요 모친은 최씨며 어려서부터 남달리 뛰어났었다. 22세에 동학에 들어 제2세교조 해월 최시형선생의 교도를 받고 즈윽이 창생을 건지려는 큰 포부를 기르더니 갑오년 34세에 미쳐 부패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혁명의 기빨을 들었으나 불행이 실패에 돌아가고 다시 교조의 순교에 따라 법통을 이어받은채 분연히 뜻한바있어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세를 살피면서 청년자제들을 불러다 유학케함으로써 뒷날을 대비하던중 노일전쟁이 일어남을 계기하여 국민정신을 일깨우려고 진보회를 결성했으나 어두어가는 국운을 따라 동지중에 배신하는 자 없지않아 곧 정치와 교단을 분리하여 동학의 이름을 천도교로 고쳐 선포하는 한편 본국으로 돌아와 혹은 보성 동덕여러하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또 혹은 우이동에 수도원을 열어 투사연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다 50세로써 국치의 날을 만나자 솟아오르는 통분의 정을 속깊이 간직한채 매양동지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때를 기다리더니 와신상담 10년째 되는 4252년 미국대통령 윌슨의 세계평화를 위한 민족자결제창에 호응하여 무저항 비폭력 그러나 불굴불퇴전의 대원측을 세우고 각계대표 33인을 결속하여 드디어 그들의 선구아래 3월 1일로써 독립을 선언하는 국민전체의 피 묻은 만세운동이 일어나 역사민족의 면목을 세계에 떨쳤던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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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그로인하여 일본치하의 법정에서 3년형의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병으로 보석되어 마침내 4255년 5월 19일 62세로써 환원하신뒤 무릇 23년이 지나 조국이 광복되고 또 다시 13년이 지나 오늘 여기 선생의 무덤앞에 한덩이 돌을 세우고 그의 일생행적을 새김에 미쳐 삼가 노래를 바치노니 대의의 횃불을 높이 드심이여 겨레의 갈길을 비취시도다. 큰뜻을 천추에 드리우심이여 조국의 역사와 함께 가도다. 4292년 개천절 후학 이은상은 글을 짓고 김충현은 글씨를 쓰고 손재형은 제자하고 의암선생 기념사업회의 주관아래 김상근의 성금으로 삼가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