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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수립되자 초대위원과 외무위원에 4년여를 재임하신후 이어서 중화민국의 군문에 투신하여 협서육군1사단 사령부의 고등고문관과 건국군 상군제6사령부의 군의처장겸 제3사령부의 등의(登議)와 사성엽합군 총사령부의 등군(登軍)직등을 역임하는 동안 풍찬노숙 이루 헤아릴수 없는 와신상담을 극복하면서 오로지 항일투쟁에 분골쇄신하시었다. 이와같이 오상불망하시던 조국광복을 미성하니 日暮途遠(일모도원)이라 憂悶(우민) 得病(득병)하시어 서기 1942년 7월 26일 이역만리 중국성도에서 천추의 유한을 품고 향년 63세를 일기로 노훈의 보람없이 천애의 고혼이 되시었으니 장엄하고 위대한 장부의 일생이었다. 서기 1945년 8.15광복이후 정부에서 수차에 걸쳐 독립지사에 대한 공훈이 시행되었으나 선생께서 하세하신후 잇따른 동지들의 별세와 후생들의 무지불민으로 인하여 당당히 일월(日月)과 같이 빛나는 위훈이 민몰(泯沒)지경에 이르자 서기 1977년에 이르러 이창규씨의 주선으로 비로소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작년 8월에 겨우 衣履(의리)로 代葬(대장)하고 묘정비를 건립하게 이르렀다. 묘비제막 당일 원근 명처에서 참집(參集)한 5백여 인사들의 구송(口頌)이 선생의 평생을 국가민족에 바치신 공훈은 모비에만 그칠것이아니요 거군적으로 위훈을 길이 현창하자는 공론이 준발(峻發)하매 강호장보(江湖章甫)들의 흔연(欣然)한 호응으로 발의한지 불가 1년여에 이 충훈비를 세움에 즈음하여 본사업추진위원장 유인혁씨로부터 선생의 공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