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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다. 生1男2女하니, 子男은 남일(南一)이요 손남은 녕연 강연 재연이다. 婿는 문화 유인동 순흥 안병선이요 외손은 유홍열 호열 상열 계열 안충헌이다. 공은 소시부터 성도(性度)가 준정(峻定)하여 대의를 처결함에는 학연히 자수(自守)하고 의연히 불요(不撓)하였다. 한일합방이 되자 공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서기 1909년부터 임천에 천흥학교를 설립하고 학감으로 투신 민족의 자주력을 교육하면서 중군망명투사와 접선 구국운동자금을 공여하고 국내동지규합에 활약하다가 서기 1914년에는 왜경에게 피검되어 인천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익년에 출감하였다. 왜경의 감시가 극심하여 학교운영은 물론 국내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서기1919년 중국에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동지들과 동함하며 외무성및 초대 의원직으로 활약하다 서기 1922년 임시정부 4년에 자금난 등으로 사임하였으며 중국 협서 육군제1사단 사령부 고등고문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후 중국 건국군 상군 제6군사령부 의처장겸 제3사단 사령부 등의및 사성연군 총사령부 등군으로 조국광복의 항일투쟁에 투신하였다. 공의 공적은 무수히 많을 것이나 사실을 입증할수있는 동지들은 타계하고 골자(骨子)있는 문서나 왕래서신은 일제의 형별이 두려워 소각 또는 오랜 세월에 기손(棄損) 되었음으로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사실만을 기술하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공은 서기1942년 7월 26일에 조국의 광복을 목전에 둔채 망국의 한을 품고 이국만리인 중국 사천성도 남항 227호에서 파란많은 일생을 마치니 향년 63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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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구 정부에서는 공의 공적을 기려 서기 1977년 12월 13일에 제799호로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공의 평생을 세속적인 이해득실이나 사생영욕에는 일부동심하였으니 그 청백한 심성과 숭고한 충의정신은 세인의 추중(推重)하는 바가 되었으며 공의 구국행적은 만인의 앙시(仰視)를 받음이 당연한 고로 이곳에 감히 명을 지어 영세에 전하고자 한다. 서기 1984년 갑자(甲子) 8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