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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자로 부친의 얼굴도 보신적이 없는 김포검단 유족회 정금모회장께서 추모사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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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慕辭(추모사). 아버지의 4남매중 막내 아들이 당신의 아내 배 속에 한달후면 태여날 자식 이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신체 당신은 억울하게 총살로의 학살을 당하신 冤魂이 떠도는 이자리에서 72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서야 이제 찿아와 미약 하나마 조그만 冤魂碑라도 세워놓고 이곳에서 함께 억울하게 학살되신 모든 魂靈님 들께 억울한 죽엄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명예회복 이라도 하여 드리고 싶어 오늘 무거운 마음으로 이제나마 위로의 白碑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홀 어머니와 29살의 아내와 9살5살의 두 아들과 2살의 딸 배 속의 만삭의 태여날 자식을 남겨 두셨던 한 가정의 가장은 6,25 한국전쟁발발이되고 3일만에 이곳 김포 반도가 적군에게 점령이 되여 점령자들로 부터의 통치가 시작 되였고 이승만대통령과 정부는 예고도 없는 수도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게되니 국가로 부터 보호조차 받을수가 없었던 상황속에서 이곳 김포반도의 군민들은 미처 피난을 할 겨를도 없이 적군의 점령지에 남겨져 전쟁의 참혹한 혼란속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생사의 긴박한 상황속에서 점령군들의 점령 정책에 의하여 양민들은 자기의 意志와는 無關하게 그들의 통치로의 생활에 이루 말할수 없는 공포와 고통이 였음이 당연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1950년9월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의한 수도권 탈환이 시작되고 국군의 반전으로 김포 반도가 수복이 되던 그 시기 군민들은 적군점령 치하에서의 악몽에서 벗어나 수복의 기쁨으로 국군과 경찰을 맞이 하였으나 정부는 인민군들의 점령치하 에서 처절하게 그들의 통치하에 지배되였던 군민들은 本義와는 무관하게 어쩔수 없는 심부름등을 하게되고 그들의 통치로 인한 점령지에 남겨졌던 양민들은 포로 신세가 되여 적군에게 온갖 수모를 겪었으나 국군이 수복후 점령치하에 남겨졌던 군민들을 적군에게 각종 협력을하는 反逆을 하였다는 연유을 물어 부역자로의 낙인을 찍어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었던 자들과 부역 험의자에 대하여는 그 가족들 까지도 滅殺을 하라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경찰과 치안대에서는 대대적인 무작위로의 체포 구금으로 고문을 하고 집단으로 양민을 무참히 학살하게 되니 왜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줄도 모른채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가족들을 뒤로한채 철사줄에 꽁꽁묶인채 총구앞의 사선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한많은 생을 적군이 아닌 아군의 경찰과 치안대에 의하여 총살로의 억울한 죽엄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72년이란 세월이 지난 오늘에서야 이곳 살육으로 얼룩진 현장에서 억욱한학살로의 죽엄으로 구천의 어두움속에서 떠돌고 계실 魂靈들께 비록 조촐하게 冤魂碑를 세우고 맑은 술을 올리오니 그 모든 痛恨을 털어 버리시고 저희들의 술잔을 歆饗 하옵소서, 살아생전 이 세상에 태여나 아버님과 對面한번 하여보지 못했던 이 자식과 저히들 형제자매는 아버님이 그렇게 참혹하게 殺戮 되신후 말도못할 수많은 시련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자식들은 그래도 조상님들의 은덕으로 이 땅에서의 나그네 인생길을 여기까지 꿋꿋하게 살아왔습니다. 다행히도 시절이 바뀌여 국가에서는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진실규명으로의 역사의 사실앞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님의 명예회복을 이제서야 받을수 있게 되였습니다. 이제 미련없이 떠나가야 할 세상 다음생이 있다면 이 자식은 이승에서 相面조차 하지 못했던 아버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아버님과의 암울하고 불행했던 因緣의 이승에서보다 아주 평화롭고 좋은 세상에서 만나 행복하게 살아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72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이제서야 아버님의 冤魂이 떠도는 이곳에서 미약하나마 冤魂碑를 세우고 맑은술을 올리오니 歆饗 하옵시고 짧은생에서의 한 많았던 이승에서의 억욱한 痛恨의 그 모두를 이제는 훌훌 털어 버리시고 부디 좋은 세상으로 훨 훨 날아가시여 평안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辛丑年 10月 26日 遺腹子 琴模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