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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홍(趙顯弘) 1902년 2월 9일생 해방 후 한국은 38선 이남은 민주정부가 이북은 공산정부로 나뉘어서 반목하게 되었다. 이 남북분단의 쓰라린 역사속에서 삼례지역도 좌우익 세력으로 나뉘어 혼란이 계속되고 폭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경찰관, 공무원, 기독교인 등이 우익으로 몰려 공격을 받았는데 덕천교회 김춘호 장로(본교회 초대 장로, 3대 국회의원)는 남노당이 중심이 된 좌익 세력에게 지목된 공격의 대상이었다. 1949년 가을 어느 날 좌익들은 김춘호 장로를 죽이겠다고 덕천리 김장로의 집으로 쳐들어갔으나 피신한 후였다. 김장로를 찾지 못하자 화가 난 그들은 장포리 동생 집으로 몰려가 김장로 동생을 농기구로 머리를 치며 죽이려 했다. 그 소식을 들은 김장로와 그 부친은 장포리로 갔다. 좌익들은 춘호가 나타났다며 김장로 목에 밧줄을 매자 그 부친은 죽이려면 나를 죽이라며 소동이 벌어졌다. 이때 이 소식을 들은 조현홍 집사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즉시 그곳으로 달려갔다. 과거 김춘호 장로가 좌익 세력에게 피해를 입은 우익세력을 대표하여 경찰서에 고발하였는데 조현홍 집사가 이것은 예수믿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며 취하하게 해서 서로 만족해 했던 일을 상기시키며 서로 잘 지내보자고 좌익들을 달래고 설득했다. 그러던 중 김장로 가족이 몸을 피했고 그것을 알게 된 좌익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너도 한패인 예수쟁이다" 라며 대신 조집사를 장작으로 무참하게 두들겨 팼다. 그들은 축 처진 조집사를 마을 모정 밑에 버리고 가버렸다. 조집사는 그로부터 몸져눕게 되었고 오랫동안 회생하지 못하고 결국 1951년 12월 31일 향년 42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그 날밤 늘 즐겨 부르시던 찬송가 주의 주실 화평을 3번 부르시고는 하나님께서 날 천국으로 데려가시려고 보낸 천사들이 문밖에 왔으니 싸리문을 어서 활짝 열라고 하시며 "예수님 잘 믿어라."는 유언을 3번 반복하시고 주님을 만난다는 기쁨과 감격으로 천국에 입성하셨다. 장례식은 덕천교회 박윤영 목사의 집례 하에 교회장으로 온 교우들의 애도 속에 엄수되었다. 순교자 조현홍 집사는 기도를 많이 하는 기도의 용사였다. 교회의 회계 일을 맡아 보았으며 옳은 일에는 양보가 없이 말씀대로 사신 분이었다. 친구를 위하여 고난을 대신 짊어진 순교자는 부인 임금옥 권사와 어린 5남매를 두고 순교의 잔을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순교의 댓가를 외상으로 남겨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순교자의 자녀들을 인도하셔서 장남 승기는 목사로, 차남 만기는 집사로 큰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세 딸들은 권사로,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곳곳에서 주님께 충성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역사 속에 순교로 이어졌던 믿음의 끈은 덕천교회 가운데 아직도 단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