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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 권헌이 이출이 등은 예안시위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일련의 독립운동을 통하여 전통유림이 근대유림으로 발전해 갔다. 여기서 현대 유학을 이끈 탁과 윤석등의 학덕까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편 서간도의 경학사 신흥학교 한족회 서로군정서 통의부로 이어진 안동유림을 주축으로 출발한 독립군에는 원일 외에도 풍호 목호 원대등 문중의 청년선비가 무수하게 참가하였고 1925년에는 내몽고에 별도의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진흠 종흠 형제가 김창숙 김화식과 함께 제2유림단운동을 일으켰다. 만수 중업 동흠 3대 독립운동을 내조하다가 일경의 고문에 실명 당했던 김락여사는 그때 다시 잡혀가 옥중에서 묵비투쟁하여 인자한 어머니는 의리를 머금고 산다는 여인 선비상을 세웠다. 하계인에 대한 일본 관헌의 앙탈은 김락여사에 그치지 않았다. 의병전쟁때 온계 및 퇴계종가와 교동과 오산대까지 불태운 그들은 인명도 무수히 앗아갔다. 식민지하에서는 하계촌 복판에 경찰지서를 설치하고 남녀노소를 무지막지하게 잡아가 고문했다. 그래도 의리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고 신념의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동암 13세손 육사 이원록이 원촌리를 떠나 광야를 읊으며 중국대륙을 누볐던것도 이때였다. 마을의 청소년은 예안청년회와 예안노동대나 안동청년동맹같은 새로운 단체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의 폭을 넓혀갔다. 운동노선이 다양해지고 분화하면 통일전선이 제기되기 마련이었다. 마침내 신간회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때 운호 열호께서 주목을 받았던것은 그의 진보성이 1930년을 전후한 전환기에 회자됐기 때문이다. 하계인의 독립운동으로 또 특별한 것은 의병전선에 투신했던 선구 현구 형제가 교동집을 잃고 유랑생활중 현구께서 창씨개명을 반대하다가 자결한 사실이다. 식민지 말기의 자정은 범흥리 이예형의 경우와 함께 암흑같던 해방전야를 밝힌 별빛이라 그 별들이 모여서 해방의 새벽을 열었다. 그러므로 해방은 독립운동사를 다양하게 장식한 하계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