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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식(金亨植)은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2일 경북 예천군 용문면(龍門面) 상금곡동(上金谷洞)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주도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의 만세운동은 권석인(權錫寅)이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례차 상경했다가 서울의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오면서 구체화되었다. 이에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김형식은 권석인·권석호(權錫虎)·권석효(權錫孝)·변용구(邊用九) 등과 함께 예천읍 장날인 3월 12일에 거사하기로 약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일경의 삼엄한 경계망으로 인하여 거사를 다음 장날인 3월 17일로 미루었으나, 이 때도 역시 일경의 철통같은 감시로 인하여 사전 탐지되어 중지하고 말았다. 이렇듯 거사가 지연됨에 따라, 김형식 등은 어떠한 일경의 탄압과 경계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단행하기로 뜻을 굳히고 4월 2일 오후 10시에 만세시위를 단행하였다. 김형식은 수백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횃불을 앞세우고 면사무소와 동리 각처에서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부터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