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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당시 풍기군 은풍현 은산동(당시 하리면 소재지이고, 5일마다 서는 장터임)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활동을 하고 있던 오하근, 박인서, 권창수 등 청년학도병을 돕기 위하여 마을 유지인 이헌호, 이재덕, 이용헌, 채동진과 같이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지원하고 있던 중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여 서울시위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오하근, 박인서가 영주읍 장날 1919년 3월 20일 오전 11시에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군중에 나누어 준 후 힘차게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이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군중이 시위행진을 강행하니 일본군 헌병은 총검으로 이들을 탄압하여 해산 시켰다. 영주읍 만세시위에 고무된 오하근과 박인서 권창수(당시 22세)는 마을유지인 채동진(당시 42세), 이헌호(당시 46세), 이재덕(당시 54세), 이용헌(당시 40세)과 상의하여 주위마을 사람들을 은산동 장날인 4월 4일 동원하여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지금의 하리면 은산동. 황병석의 집)에서 구체적인 거사를 논의 하였다. 이날(1919년 4월 4일) 오후 6시경 마침 장이 열리고 있던 은산동 장터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일본군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로 가서 이를 격파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를 급히 듣고 달려온 일본군 헌병들에 의하여 당시 주동자인 권창수, 채동진, 이헌호, 이재덕, 이용헌을 비롯한 동지들은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독립만세를 불렀다. 권창수 외 4명은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5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