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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부 관아출토 석물(順興府 官衙出土 石物) 이곳에 노천전시된 석조유물들은 옛 순흥도호부 시절 관아건물 등에 사용되었던 주초석(기둥받침)과 비석좌대(빗돌받침) 그리고 누하주석(하주받침)의 일부이다. 순흥은 고구려 때는 급벌산군 신라때는 급산군 고려 때는 흥주도호부였다. 고려 충렬왕.충숙왕.충목왕의 태를 연이어 묻게 되면서 순흥부로 승격되었고, 조선 태종13년(1413)에 순흥도호부가 되었다. 그러다 세조3년(1457)에 단종복위운동으로 부가 폐지되었고, 그 후 227년 뒤 숙종9년(1683)에 절의지향으로 명예회복되어 도호부로 다시 승격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곳 순흥에서는 뜻있는 선비 5백여명이 이 고을 소백산 아래 모여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일본에서 폭도토벌이란 명목으로 군사 1,250명을 순흥부에 투입시켜 의병과의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때에 의병에 동조한 순흥부를 없애고자 일제는 1907년 11월에 이 골을 방화시켰다. 아와 석빙고 그리고 고가 180여호가 전소되고 고을의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참화 속에서도 그 기백은 살아 남아 "선비의 고장"이란 정신문화의 맥을 지금까지 이어 주고 있다. 2012. 12. . 영주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