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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침략의 야망을 품고 1895년 을미사변을 이르켰다. 이에 울분한 애국지사들은 의열의 기치를 들고 항일할 것을 다졌다. 공은 1904년 정산에서 일어난 세부토지측량저지의 민란사건에 가담하였으니 이는 일본인이 세금과적의 행위라 하고 저지하였음은 항일의거의 첫자취이다. 흉폭한 일본은 다음 1905년에 을사조약을 맺아 국권을 강탈하니 때에 전임 이조참판으로 정산천 장리에 낙향한 민종식이 동지를 모아 국권을 바로잡기 위하여 깃발을 높이 들매 공은 그 휘하에 출진하여 좌군관으로 참전하니 이것이 1906년 고종 병오 4월에 거사한 홍주의거이다. 이때에 정산 청양 보령 홍산 등지에서 운집한 수천명의 의여로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홍주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통감 이등박문의 주차군사령부에 명령을 내려 그 맹격을 받아 패퇴하였다. 이에 공은 재기를 위하여 청양 유치에서 사백여명의 의병을 수습하여 의병장 민참판과 더불어 1대 의거를 도모할 것을 절치부심 맹약하였으며 기후 1916년 기말에 논산군 연산에서 이용규와 이만식과 조종국 제공과 거의를 모약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여 강화 석모도에서 1년간의 유배형을 받았다. 다음 1917년에 석방되어 향제에 살면서 출입을 삼가하고 세연을 멀리하다가 쇠년에 조국광복의 영광을 맞이하였으니 그 기쁨을 어찌다 형언하리오. 아! 공은 오직 자나깨나 조국광복의 항심은 전생애를 통하여 빼았지 못할 입지요 성인을 위한 구국일념의 업적이라 하겠다. 이 훌륭한 의기와 영명은 공의 몰후에 청사와 구전으로 찬연하더니 반기야 국가보훈처의 상신으로 지난 1990년 8월 광복절에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니 고장 사람들이 공의 평생의 업보라 하며 추송하였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