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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산화한 동학농민혁명 지도가 김응문 형제들. 아! 동학농민혁명군의 영혼이 서려있는 곳 무안 차뫼마을 옥녀봉 아래 터다. 갑오년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어 농민군을 이끌던 무안 동학 지도자 김응문 형제와 자제가 태어난 곳 그해 내내 백산으로 전주로 서울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렬하게 처형된 농민군의 원혼이 잠들어 있는 장소다. 구누라도 나서야 한다! 나주 김씨 김응문(본명 김창구)은 무안 다산리에서 세세토록 명망있는 유사(儒士)출신이다. 무안향교의 직을 맡고 고을 일을 도맡았으나 부패무능한 조선왕조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임진년 삼례집회에 참여했을 것이다. 농민들은 "오백년 종사(宗社)가 장차 망하게 되었으니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梯忠信)을 지금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겠는가 충의(忠義)로운 선비들을 선발하여 함께 보국(輔國)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외쳤다.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다. 전봉준 대장은 3월 백산에서 "우리가 의(義)를 거하여 이에 이른 것은 그 본뜻이 다른데 있지 않고 창생(蒼生)을 도탄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기위해서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자"고 선언했다. 여기에 배규인(배상옥) 김응문 등 무안 지도자들도 동참하였다. 무안 농민들이여! 농민혁명, 반침략 운동에 동참하라! 갑오년 4월 중순 영광 무안 일대에 주둔한 농민군들은 적을 대할때 네 가지약속과 열두 가지 계군호령(戒軍號令)을 만들어 생명을 중시하고 가난한 약자를 배려하고자 했다. 5월 청계면 청천재 집강소에서 폐정개혁을 이끌었다. 9월 중순 김응문 접주는 왜적침략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는 다산리 집에 대장간을 설치하고 무기를 만들었다. 2차 봉기에는 무안지역 2천여명 농민들도 흔쾌히 참여했다. 2차 봉기에는 무안지역 2천여명 농민들도 흔쾌히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