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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수 선생은 우의정을 역임한 조선후기 문신으로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애쓴 경세가이자 동복오씨의 공주 입향조인 인물이다. 선생의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덕이(德而), 호는 수촌(水村)이며 1659년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오정원의 아들로 1632년 2월 8일 한성(漢城)의 낙선방에서 태어났다. 1656년(효종 7) 25세의 나이로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병조와 이조, 평안도 전라도관찰사, 강화부유수, 도승지, 호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 주요직을 두루 겸임하고 1679년(숙종 5) 48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었다. 특히 선생은 백성들의 기근과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1670년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할 때는 구황책을 제시하였으며, 1678년 호조판서 재임 당시에는 새로 개간한 농지에는 2년간 세금을 걷지 않도록 조치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었다. 하지만 1680년(숙종 6) 집권세력인 남인이 대거 축출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에 탄행을 받아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인 1681년(숙종 7) 6월에 사사되었다. 선생은 신원복관을 위한 후손들의 죽음을 무릅쓴 헌신적 노력으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당시 관작을 회복하게 되지만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세력이 재집권하면서 관직을 추탈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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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수차례 후손들이 격쟁하여 선생의 신원복관을 호소하여 추탈 당한지 90년이 지난 1785년(정조 8)에 관작이 다시 회복되었다. 동복오씨와 공주와의 인연은 대사간, 이조참판,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한 선생의 증조부인 묵재(默齋) 오백령(吳百齡)이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 임금을 호종하여 4차례 공주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그 후 선생의 조부이신 오단(吳端), 부친 오정원(吳挺垣), 숙부 오정위(吳挺緯), 아우 오시대(吳始大)가 25년 동안 3세대에 걸쳐 동복오씨 문중의 4명이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며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것이다. 선생의 부친인 오정원은 충청도관찰사 재임 중 의당의 수촌에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정하였다가 그 자리를 외가인 청송심씨에게 양보하고 현 위치인 단성면 단지리 월굴(月窟)에 다시 잡았다. 1667년(현종 8) 부친 오정원이 별세하자 아드님인 선생은 부친이 잡은 신후지지에 부친의 묘를 쓰고 사당을 짓고 살기 시작하였다. 1681년(숙종 7) 선생이 사사 당하자 아들 오상유(吳尙游)와 아우 오시적(吳始積)은 선영인 이 곳에 장례를 지냈고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하게 되었다. 선생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묘소 외에 신도비*가 있으며 저서인 「수촌집(水村集)」이 전해지고 있다. 공주시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애쓴 경세가이자 동복오씨의 공주 입향조인 수촌 오시수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생을 2021년 12월의 역사인물로 선정하였다. * 오시수 신도비 :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18호 / 나란히 2기가 있는데 오른쪽 신도비는 별세 후 8년이 지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복관되어 1694년(숙종 20)에 건립된 것이며, 왼쪽 신도비는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추탈된 관작이 90년이 지난 1784년(정조 8)에 다시 신원, 복관되자 1810년(순조 10)에 건립된 것이다. 신도비 근처에는 동복오씨 가문의 열녀(烈女) 세 분 - 오횡(吳㢬)의 처 남원윤씨, 오정창(吳挺昌)의 처 해주정씨, 오시원(吳始元)의 처 진주류씨를 기리기 위한 동복오씨삼위효열정려(同福吳氏三位孝烈旌閭)(공주시 향토문화유적(유형) 제31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