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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최북실은 해주최씨 문헌공 冲(충)의 후예로 단기 4222년 12월 2일 보성군 득량면 송곡리 호곡의 가난한 농가에서 이버지 성달의 두째아들로 태어나셨다. 천성이 바르고 착한 공은 구한말에 갖은 만행으로 조국을 침략해온 왜적이 4238년 곧 고종 42년 11월 17일 강제로 을사5조약을 맺어 우리 국권을 빼앗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다가 4241년 2월 문덕에서 일어선 안규홍의병장의 휘하로 달려가 의병이 되셨다. 공은 힘이세고 몸이 날랜 장사로 항상 천보대를 메고 앞장서 싸웠으므로 최천보 또는 최포라 불렀고 파청과 호곡싸움을 비롯 보성과 화순 순천 고흥의 각지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가 4242년 8월순종의 의군해산 諭示(유시)에 눈물을 머금고 罷軍(파군) 귀가한후 36년동안 왜적의 눈을 피해 살다가 광복후 4280년 5월 10일 59세로 타계하셨다. 한편 당시의 군사자금조달과정에서 무리가 많았던 사정과는 달리 공은 자기집 전재산인 3두락의 논을 팔아 헌납했을뿐 아니라 향인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삼최선을 다했기에 덕있는 의병으로 가는 곳마다 칭송이 藉藉(자자)했다. 공이 파군후 향리에서 천수를 마칠수 있었던것도 공의 뜨거운 조국애와 따뜻한 향토애에 감동한 향노들이 적극 감싸준 힘이 컸으니 이는 바로 以恩報恩(이은보은)이었다 이제 가신기동 호곡차 전분지동민과 군내 유지들이 공의 영령을 위로하고 그 열렬한 구국충성과 지극한 인애정신을 자손만대의 거울로 삼고자 기적비를 세운다기에 이 갸륵한 정성이 꽃피어 공의 얼이 천추에 빛나도록 그 업적을 대략 이와같이 적는다 공의 아들은 영래 옥동 막동이요 손자는 순종 복만 경수외 8인이다. 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김계업은 비문을 다듬어 짓고 여산 송태경은 정성들여 글씨를 쓰다.